[씨네21 리뷰]
쥬바쿠
2001-03-15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단골 게스트인 하라다 마사토 감독의 첫 번째 국내 개봉작. 지난해에 <바운스>를 들고 왔지만, 10대들의 원조교제를 소재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입추천불가 판정을 받았다. <쥬바쿠>는 97년 금융스캔들을 소재로 <산케이신문>에 연재한 소설 <금융부식열도>를 각색한 작품.

<쥬바쿠>는 금기의 영역에 카메라를 들이민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들과 연장선에 있다. 일본인 이민 노동자(<가미가제 택시>), 소외된 청소년들(<바운스)>에 이어 <쥬바쿠>는 ‘금융부식열도 재팬’을 해부한다. 금기의 소재를 택하되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르포의 자세를 취하진 않는다. 금융제국의 흥망사에 관한 성실한 보고서에 가깝다. 단 <쥬바쿠>는 아웃사이더 대신 엘리트를 등장시킨다. 시스템에 대한 내부의 선전포고다. 부패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은 이전처럼 버려진 자식들의 침묵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사히 은행의 최고 고문인 사사키는 “와인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사위인 기타노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기타노는 붉은 빛깔의 와인에서 숙성된 향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악취를 맡는다. 아랫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는 사사키, 기타노는 그를 수렁으로 밀어붙인다.

섣불리 희망적인 메시지로 갈음하는 성급함을 반복하지 않는 것도 <쥬바쿠>의 장점이다. 기타노는 쓰러진 거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종종 자신의 모습을 본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순간 “검은 세력이 자네를 놓아줄까?”, 기타노에겐 비수처럼 위협적인 목소리가 날아든다. 기타노가 일을 진척시키는 동안 중간에 등장하는 걸인의 피리 소리도 여전히 비가(悲歌)의 톤을 따른다. 검찰과 법원과 은행과 언론의 핵심 부서들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히비야 공원을 무대로 걸인은 이 사각지대의 연결고리들이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임을 예언한다.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로 2천명이 넘는 엑스트라들의 동선을 무리없이 담아내고 있는 <쥬바쿠>는 출연배우들의 면면을 훑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쉘 위 댄스> <우나기>의 야쿠쇼 고지는 <가미가제 택시> <바운스>에도 출연한, 하라다 감독의 파트너. 여기에 <카게무샤> <란> <라쇼몽> 등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 나카다이 다쓰야가 사사키로 나와 관록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기타노를 돕는 앵커우먼 와카무라 마유미는 국내 관객에겐 참신한 얼굴.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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