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나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길 위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란 점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1995)와 비교되곤 한다. <비포 선라이즈>만큼 주인공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신비롭고 로맨틱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로맨스영화로 한정짓고 보지 말자. 이 영화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니까. 장건재 감독은 전작 <회오리 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보다 더욱 간결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완성했다. 장건재라는 이름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통해 확실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장건재 감독은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공기를 담아내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엔 거창한 담론, 굴곡진 서사, 스펙터클한 연출, 스타배우가 없다. 화려하지 않은 고백처럼 그의 영화는 꾸밈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그의 장편 데뷔작 <회오리 바람>(2009)은 열여덟의 문턱을 넘으며 방황하는 고등학생 소년의 회오리치는 마음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였고, 두 번째 영화 <잠 못 드는 밤>(2012)은 결혼 2년차 커플의 현실적 고민과 그들의 일상에 뭉근하게 밴 사랑을 포장하지 않고 담아낸 영화였다. 일본의 나라현 고조시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한 환상곡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장건재 감독의 개성과 장기가 응축된 영화다. “내가 계속해서 진보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있다면 이 영화가 내 최고의 영화여야 하는 게 맞다”고 장건재 감독은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 말은 옳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장건재 감독의 진화를 확인케 해주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다.
서사 없는 공간,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일본 나라국제영화제의 제작지원 프로젝트 ‘NARAtive’를 통해 완성됐다. 나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영화의 판을 짰다. 장건재 감독에게 주어진 조건은 고조시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일본 스탭 및 배우와 협업하는 것이었다(가급적 고조시의 불꽃놀이 축제 장면을 영화에 등장시켰으면 좋겠다는 요청도 있었다). 그리고 1억원의 예산을 프로덕션 비용으로 지원받았다. 촬영 6개월 전 장건재 감독은 촬영 답사차 3박4일 일정으로 고조를 방문했다. 하지만 고조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풍경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고조의 명소, 그 명소의 역사를 짧은 시간 보고 들어서는 그 공간을 안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장건재 감독의 영화는 모두 자신이 아는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회오리 바람>은 장건재 감독의 10대 시절이 반영된 영화이고, <잠 못 드는 밤>은 장건재 감독과 김우리 프로듀서 부부의 삶이 반영된 영화다. “(이야기를) 멀리서 찾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고민을 자연스레 담은 영화들이 나왔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역시 그렇다. 장건재 감독이 고조에서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한 과정을 “취재기 형식의 트리트먼트”로 완성해 1부의 이야기로 삼았다.
영화는 두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흑백의 1부는 고조에 영화를 찍으러 온 한국의 영화감독 태훈(임형국)과 통역을 담당한 조감독 미정(김새벽)이 시청 홍보 직원 유스케(이와세 료) 등 현지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만들 영화의 재료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극중 태훈의 모델은 장건재 감독인 셈이다). 흑백의 화면은 2부가 시작되면 고유의 색을 입는다. 분량으로는 2부가 전체의 2/3쯤 된다. 아마도 태훈이 만들었을 법한 영화로 보이는 2부는 혼자서 고조에 여행 온 혜정(김새벽)과 고조에서 감 농사를 짓는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가 길 위에서 보낸 1박2일을 담는다. 혜정은 유스케의 안내를 받아 고조의 이곳저곳을 거닌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길 듯 끊기지 않는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는 없다. 공간이 있고,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진득하게 그들의 대화를 실어나른다. 장건재 감독은 두 인물의 대화 장면을 연출할 때 두 인물과 삼각형을 이루는 꼭짓점 자리에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보여주는 것을 즐긴다. 특정 인물의 반응숏을 클로즈업으로 따서 보여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카메라는 입 무거운 친구처럼 그 자리에 동석해 있다. 개입하지 않고 관찰하는 장건재 감독의 스타일이 반영된 숏들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선 그 실험이 좀더 심화된다. 개입은 줄었고 관찰은 늘었다.
즉흥과 우연, 잼세션을 하듯 찍은 영화
그것은 작업 방식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장건재 감독은 1부의 시나리오만 써놓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2부는 시나리오 없이 촬영했다. 그날그날 배우 및 스탭들과 상의해서 장면을 만들어갔다. 촬영날 아침 그날의 대본을 쓰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방식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쪽대본’조차 쓰지 않았다. “스탭들한테는 다음날 촬영 장소 정도만 얘기해줬다. 매일 기본 설정만 가지고 (영화의) 순서대로 찍어갔다. 배우들과도 상의를 많이 했다. ‘중간에 이런 대사 한번 해볼까. 그런데 기억나면 하고, 기억 안 나면 안 해도 돼.’ 그런 식이었다. 이런 연기 연출은 <잠 못 드는 밤> 때도 시도했던 방식이다.” <잠 못 드는 밤>과의 차이라면, 배우 김새벽과 장건재 감독이 “언어의 한계에 갇힌 상태”에서 연기를 하고 연출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일본어 실력을 가진 김새벽은 이와세 료와 즉흥적으로 대사를 주고받아야 했고, 장건재 감독은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배우들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느낌으로 ‘컷’을 외쳤다. (웃음) 그러면 일본 조감독, 촬영감독, 스탭들이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오케이가 나면, 그 신이 머금은 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 또 촬영을 이어갔다.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재밌었다.” 마치 “잼세션”을 하듯 영화를 찍은 것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즉흥과 우연이 빚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영화다. 날 세운 감각으로 길어올린 아름다운 우연의 순간들이 영화를 총총히 수놓는다. 롱테이크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한 방편으로 적극 활용된다. 2분이 넘는 숏들이 예사로 등장한다. “감 농사를 지은 지는 4년쯤 됐어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죠?” “저도 뭔가 만드는 일을 해요.” “뭘 만들어요?” “뭔가를…. 여기서 뭔가를 찾고 있어요.” “무언가라…. 뭘 찾고 있는데요?” “재료!” “재료?” 관광안내소에서 처음 만난 혜정과 유스케가 신마치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눌 때, 카메라 역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하염없이 신마치길을 걷는다. 숨막힐 듯한 한여름의 뙤약볕, 인적 없는 길을 채우는 바람소리, 두 사람의 웃음소리, 말을 고르고 대답을 정리하기까지의 짧은 정적, 숨길 수 없는 호감의 표정들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긴다. 쉽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내일 한국에 돌아가요.” “아쉽네요.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중략) 남자친구로 어때요?” “남자친구 있어요.” “제가 조금 늦게 만났네요. 일본의 남자친구로는 어때요?” 유스케가 혜정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맥줏집 장면도 7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연출됐다. 어느 순간 카메라의 존재는 잊혀지고,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가 스크린 너머 전해진다.
장건재 감독은 롱테이크 연출이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기술적인 선택이었다”고 했다. “실제적으로 컷을 나눌 수가 없었다. 대본이 없으니까. 또 컷을 나누면 후시녹음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러면 일본의 배우를 한국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럴 비용이 없었다. (웃음)” 딱히 롱테이크와 고정숏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 찍는 게 효과적인가, 그것만 생각한다.” 장건재 감독은, 감각은 최대한 곤두세우되 태도는 한없이 유연하게 가져가면서 영화를 찍는다. 그 감각과 유연함이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생동감을 부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에선 배우의 존재감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장건재 감독이 스케치를 했다면, 김새벽과 이와세 료는 그 그림에 채색을 했다. 영화의 여백을 채우는 막중한 임무를 배우들이 떠안았다. 계산된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배우는 본능적으로 상황에 반응한다. 이들의 본능적 연기는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그 매혹이 영화의 매혹으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올림픽을 앞둔 선수처럼
“영화를 만드는 동안엔 내 몸의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쓴다. 마치 올림픽게임을 앞두고 있는 운동선수처럼 정신적, 육체적 감각을 소중하게 다룬다. 경기에 임하듯이 영화를 찍는다. 이번 작업은 그 감각이 최상의 상태였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사고하는 영화가 아니라 감각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감각은 요구된다. 감각을 열어두면 영화의 공기가 물씬 느껴진다. 아이스커피가 맛있는 오래된 카페, 폐교된 지 오래인 초등학교의 먼지 쌓인 복도, 신비로운 전설을 가진 우물, 짙푸른 녹음의 마을,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고조의 8월, 그 여름의 한때를 함께한 여자와 남자…. 이들의 시간이 나의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때 그 여름에만 가능한 이야기
김새벽 배우와 김우리 프로듀서가 말하는 장건재 감독과 <한여름의 판타지아>
김새벽 배우
“장건재 감독님은 ‘진짜’를 좋아한다. 영화에 진짜를 담으려고 한다. 사실 시나리오만 봤을 땐 이게 어떤 영화인지 전혀 감이 안 왔지만,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확신을 받았다. ‘이제까지 보여준 새벽씨의 모습 말고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런 얘기 들으면 사실 배우로서 너무 기분 좋지 않나. 일본어 연기에 대한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았다. 일본어는 10년 전에 공부했었는데, 갑자기 공부한다고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라 상황을 느끼면서, 촉을 세워서 연기하려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상대배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리액션도 할 수 없으니까 더 집중하게 되는 면도 있더라. 이런 현장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싶어서 촬영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약간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최근에 포스터 촬영을 하러 고조에 다시 갔는데 그때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이 영화는 2년 전 그날, 그때, 그 여름에만 찍을 수 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모든 것이 담긴 영화다.”
김우리 프로듀서
“예전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이었다. 그 애정의 크기만큼 열심히 노력한다. 자신의 삶을 꾸준히 진전시키기 위해서 공부하고, 반성하고, 노력한다. 그 모습에서 배우는 게 많다. 후반작업도 지독하게 하는 편이다. 특히 편집과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불꽃놀이 장면을 극장에서 다시 보면서 왜 장건재 감독이 이렇게 사운드에 신경을 쓰는지 알겠더라. 이런 소리 하나하나가 영화를 더 감동스럽게 만든다는 걸 새삼 느꼈다. 프로듀서 마인드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내가 장건재 감독에게 ‘연출에 더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정도다. 독립영화의 특성상 감독이 A부터 Z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많고, 그런 상황에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로서의 역할도 중요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