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적인 여성 캐릭터로 손꼽히는 <에이리언>의 리플리, <터미네이터2>의 사라 코너와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는 너무 많이 봐온 과거의 이름이다. 지금의 관객에게 보다 친숙할, 2000년대의 외국영화가 선보인,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캐릭터 20선을 소개한다.
<판타스틱 소녀백서>(2000) 이니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세상을 바꿔라’라는 표어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도라 버치)와 가장 멀리 떨어진 말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가지는 것들이 영 하찮고 의미없게 느껴지는 소녀 이니드는, 기꺼이 세상의 규칙을 거부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불평과 저항으로 가득한 이 10대 소녀의 일대기는 미국 주류 문화에 대한 귀엽고도 의미심장한 저항이라 할 만하다. 자동차와 치어리더로 대변되던 미국 하이틴 청춘에 대한 묘사에 ‘빅엿’을 날리는 작품이기도 하고.
<더 월2>(2000) 린다와 에이미
부치(대개 남성성을 지닌 레즈비언을 일컫는다)의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HBO>가 제작하고 당대의 주목할 만한 여성감독들과 여배우들이 참여한 <더 월2>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린다(미셸 윌리엄스)와 보이시한 레즈비언 에이미(클로에 세비니)의 사랑을 통해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멋진 대답을 들려준다. “그럼 당신은 남자인가요?”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옷을 입어요?” “이게 편하니까요.” “당신은 당신을 여자로 보나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까봐 그래요? 이게 나예요. 다른 나는 있을 수 없어요.”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2002) 엘비라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 엄마가 스무살 어린 체코 여자와 사랑에 빠져도, 열정페이에 시달리며 고단한 작가의 꿈을 키워가도, 짝사랑 남자와의 로맨스가 순탄치 않아도 둘째딸 엘비라(레오노르 와틀링)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결국엔 잘 해결되리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동성애, 결혼제도, 부모와의 갈등 등 각종 복잡한 문제 앞에서도 밝은 미소만은 놓지 않는 무한 낙관주의에 보는 이도 점점 빠져든다.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면 이런 정신승리라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내가 웃으면 온 세상이 행복해지는 법이니까.
<8명의 여인들>(2002) 8명의 여인들
프랑스 여배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화사하고 수다스러운 심리극 <8명의 여인들>은 마르셀이란 한 남성이 등에 칼이 꽂힌 채 살해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범인을 찾아간다. 재미있는 건 추리의 과정에서 밝혀지는 게 서로의 무고가 아니라 마르셀과 연관된 각자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화의 가장 큰 맥거핀은 마르셀이다. 솔직히 남자 따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화니 아르당 등 이토록 화려한 얼굴들이 스크린을 수놓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녀들의 면면이 이미 프랑스영화의 역사인 것을.
<디 아워스>(2002)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
누구의 것도 아니며 동시에 모두의 것일 수도 있는 삶의 궤적들. <디 아워스>가 세 여주인공의 교차된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건 그처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여성의 일생이다. 연출자인 스티븐 달드리는 몹시도 섬세하게 세 여인의 비슷하고도 다른 삶이 시대와 세대를 거슬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조명한다. 로라(줄리언 무어)가 묵는 호텔에 들이닥친 가상의 밀물처럼, 여자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났다 소멸되는 감정의 격랑을 이토록 사려깊게 담아낸 영화는 드물다.
<텐>(2002) 엄마
차 안에서 시작해서 차 안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어느 영화보다 풍성하고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 깊은 내면을 풀어놓는다. 아들과 엄마의 대화를 통해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미혼모라는 사실 정도다. 자동차의 운전대를 놓지 않는 엄마(마니아 악바리)는 스스로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찾아가는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이미지다. 아들, 노파, 창녀 등 여러 인물을 옆에 태우고 그들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사회의 억압과 편견에 당당히 맞서는 여성의 곧은 심지를 읽을 수 있다. 얼굴을 가릴 히잡 대신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쓴 그녀의 옆모습이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이다.
<킬 빌>(2003) 베아트릭스 키도
“나는 그녀가 동정받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서워 보이길 원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장르 영화사에 영원히 길이 남을, <킬 빌>의 베아트릭스 키도를 만들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과연 우마 서먼이 연기하는 베아트릭스 ‘브라이드’ 키도는 사랑하는 남자와 뱃속의 아이를 잃은 여자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타란티노의 끝내주는 대답이다.
<디센트>(2005) 사라
공포영화에서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어왔다. 특히 윤리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른 여성 캐릭터들은, 호러영화 연출자들에 의해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처단’되어왔다고 할 만하다. “여성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디센트>의 닐 마셜 감독의 결심은 육식 괴물이 배회하는 이 영화 속 동굴에 머물게 된 주인공 사라(슈어나 맥도널드)에게 인상적인 결단을 선사한다. 혹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21세기 <캐리>라고 평하기도.
<귀향>(2006) 딸 라이문다와 어머니 이렌느
진정한 모정은 아낌없이 퍼주는 게 아니다. 교감과 소통을 전제로 한 연대를 통해 어머니(카르멘 마우라)와 딸(페넬로페 크루즈)은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 <귀향>은 어머니의 유령을 통해 여성과 모성의 원천적인 요소를 건드린다.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마지막 장면을 보노라면 여성과 모성이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어머니, 자매, 그녀의 딸, 이렇게 삼대에 걸친 유대는 죽음마저 뛰어넘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여성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 아니, 연대하는 모든 여성은 강하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다.
<주노>(2007) 주노 맥거프
절로 응원하고 싶어지는 상큼발랄 발칙한 10대 임신부. 낙태 대신 출산을 선택한 당당한 열여섯 소녀 주노는 가혹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아이를 입양 보낼 부모를 찾아야 하고 부모의 실망을 마주해야 하지만 삶에 대한 긍정과 의지를 꺾지 않는다. 우연히 생긴 아이를 불임 부부에게 입양보내는 그녀의 선택은 도피가 아니라 책임이다. 뱃속의 아이는 주노에게 자신이 하기에 따라 삶과 사랑, 행복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안긴다. 여느 10대처럼 자주 뾰로통해 있어도 엘렌 페이지의 사랑스러움을 덮을 순 없다.
<플래닛 테러>(2007) 체리 달링
천진난만하다. B급영화, 길티 플레저라는 수식어로는 이 영화의 명랑함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이 좀비에게 뜯겨나간 한쪽 다리에 머신건을 꽂고 살육의 파티를 벌일 때 묘한 해방감에 젖을 것이다. 화끈한 액션 신이나 신체훼손과 절단 때문이 아니다. 의사를 꿈꾸다 댄서가 된 체리 달링은 원래 코미디언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이 농담 같은 상황에서 섹시하고 무시무시한 기계 육체를 휘두르며 완벽한 코미디언으로 거듭난다. 체리 달링의 의족에 장착된 M4 칼빈소총이 머신건으로 교체되어 불을 뿜는 순간 절로 박수갈채가!
<데쓰 프루프>(2007) 테네시 4총사(킴, 조, 에버나시, 리)
마초인 척하는 살인마의 허세를 까발린다. 텍사스에서의 공포 분위기는 이를 위한 밑밥일 뿐. 건강한 테네시의 여인들 앞에서는 국물도 없다. 내면이 강하거나 심지가 굳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정신론이 아니다. 테네시의 여자들은 그냥, 정말로, 신체강건하다. 엔딩 시퀀스에서 스턴트맨 출신의 두 여성과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집단 구타당하는 스턴트맨 마이크가 불쌍해 보일 정도. 네 친구들이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건강미를 뽐내며 수다를 떠는 장면은 있는 그대로의 여성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새삼 증명한다.
<렛미인>(2008) 이엘리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창조해낸 이 북구의 뱀파이어영화에서,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는 창가에 서린 뿌연 김처럼 모호한 존재다.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소녀가 아니라고 말하며, 연약한 듯하다가도 누군가의 사지를 아무렇지 않게 갈기갈기 찢을 만큼 잔혹하다. 인간과 괴물, 소녀와 소년, 아이와 어른이 이엘리라는 존재 안에서 교차한다. 이 캐릭터의 복합적인 매력은 <렛미인>과 같은 해에 첫선을 보인 또 다른 뱀파이어영화, <트와일라잇>에서 에드워드를 미치게 만들었던 벨라의 청초한 목덜미보다 훨씬 더 관능적이고 위험하게 다가온다. 소녀 뱀파이어의 범주에 이엘리를 넣을 수 있다면, 그녀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커스틴 던스트에 이어 가장 인상적인 소녀 뱀파이어로 남을 것이다.
<아이 엠 러브>(2009) 엠마
손짓 하나 떨림마저 우아하다. 러시아에서 이탈리아 명문가로 시집온 엠마(틸다 스윈튼)는 자상한 남편에게 사랑받고 세 자녀의 엄마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어떤 행복이라도 남편에 의해 만들어진 인형의 집임을 깨닫고 그 모든 화려함을 박차고 나온다. 불륜이냐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엠마의 마음속에 이는 격랑이 폭발할 듯 생생하게 스크린을 수놓는다. 생의 찬가, 사랑의 발견을 이토록 감각적이고 현실적이며 육체적으로 표현한 영화도 드물다.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기능에서 여성으로의 해방. 명불허전 틸다 스윈튼. 화장실에서 웃음을 참지 못해 터트리는 장면은 짜릿할 정도로 아름답다.
<밀레니엄>(2009) 시리즈 리스베트
삐삐 롱스타킹은 어른이 되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원작자 스티그 라르손은 그가 창조해낸 천재 여성 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노미 라파스)의 모티브가 삐삐 롱스타킹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자유롭고, 개성 넘치며, 누구에게도 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 스티그 라르손은 아마 그런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밀레니엄> 시리즈의 리스베트도 마찬가지다. 등에 멋진 용문신을 한 이 천재 해커는 자주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들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마지막까지 온전한 자신으로 남는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쇼산나 드레퓌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무너뜨린 건 바로 영화였다”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말한 적이 있다. 실존했던 악인이 만들었던 공포의 제국이 영화로 인해 무너졌다는 것, 그리고 그걸 상징적으로 재현할 영화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타란티노에게 무척 흥미로운 생각이었던 듯하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서사를 움직이는 목표였던 ‘영화에 의한 히틀러의 몰락’을 영화에서 재현하는 건 프랑스 배우 멜라니 로랑이 연기하는 유대인 쇼산나 드레퓌스다. 불타는 극장 속에서 통쾌하게 웃던 그녀는 타란티노 영화에서 나치의 영원한 악몽으로 남는다.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낸 영화 목록에서 타란티노의 작품을 세편이나 선정한 건 결코 편애가 아니다.
<007 스카이폴>(2012) M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서, 여성들은 대개 파티장이나 침실에 머무르는 존재였다. ‘007’ 시리즈를 통틀어 명령 한마디로 본드의 생명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은 주디 덴치가 연기했던 M이었다. 그녀는 본드걸의 섹스 심벌적인 이미지나 나이든 현명한 여성에게 종종 부여되곤 하던 모성애,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다. 어머니 같은 존재를 기대했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를 절망케 하고, 죽다 살아나 겨우 돌아온 본드에게 “대체 어디 갔다 지금 돌아와?”라고 쏘아붙일 수 있는 여자. 주디 덴치의 M은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다.
<제로 다크 서티>(2012) 마야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만드는 여성감독은 고작 6%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스트레인지 데이즈>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를 연출한 캐스린 비글로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1%의 여성감독이다. 그런 그녀와 가장 닮았다고 평가받는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제시카 채스테인)는 추적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한 고독한 인물이다. 마초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한 캐스린 비글로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를 참고하길.
<더 히트>(2013) 섀넌 멀린스
뚱뚱하고 제멋대로라 존재 자체가 민폐인데 왠지 밉지가 않다. 멜리사 매카시의 정수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권한다. 폴 페이그 감독의 <더 히트>는 유능한 형사 사라(샌드라 불럭)와 민폐 형사 섀넌(멜리사 매카시)의 좌충우돌 버디무비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매카시는 (아마도 출연작 중 거의 유일하게) 처음부터 남자들에게 인기폭발이라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저 코미디라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보다보면 정말 철두철미 깔끔 완벽한 샌드라 불럭보다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매카시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자기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사랑받을 줄도 아는 법이다.
<헝거게임> 시리즈(2012~13) 캣니스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의 가장 빛나는 재능은 활쏘기도, 서바이벌 능력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반항하는 재능이다. 영어덜트 소설일 때는 삼각관계 로맨스가 핵심이었지만 영화 속 캣니스에게 연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성큼성큼 내딛는다. 아직은 어설퍼 상처를 입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유다. 제니퍼 로렌스의 말마따나 “캣니스는 직진하는 캐릭터다. 그런 여자가 하는 사랑은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