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성은 증발하고 환상만 남았다
2015-06-23
글 : 송경원
2015년 한국영화 속 여배우와 여성 재현에 대한 단상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불편한 순간은 이 영화의 마지막 세 장면이다. 일영(김고은)이 우희(김혜수)를 찌르는 마지막 장면은 보스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엄마’로 거듭나는 일종의 계승 의식이다. 이 장면은 피 칠갑을 하고 일영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첫 장면과 정확히 조우한다. 한데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영화가 친절하게 뒤에 세 장면을 덧붙인다. 하나, 밀입국한 중국 여자로부터 ‘워 하이즈’라는 말이 ‘내 아이입니다’라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어서 우희가 남긴 코인로커에서 입양 서류를 확인하다. 마지막으로 우희를 찔러 죽인 그 자리에서 향을 피우며 망자를 애도한다.

<차이나타운>은 ‘엄마’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출발하는 영화다. “모성애는 생각지 않고 연기했다”는 김혜수의 말처럼 이 영화는 기존 누아르영화의 공식과 뼈대를 답습하되 두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익숙한 모성과 여성성을 역전시키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를 지나자마자 따라붙는 세 장면은 영화가 갈 길을 정확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세 장면으로 인해 <차이나타운>은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여성 누아르로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 작품에서 다시금 모성신화로 마무리되는 영화로 돌아간다.

일영이 우희를 보스로서의 엄마가 아닌 가족으로서의 엄마로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모든 갈등의 실타래를 순식간에 풀어버리고 온전히 ‘엄마’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적어도 이같은 노골적인 모성신화의 엔딩으로 문을 닫기 전까진 <차이나타운> 속 ‘엄마’는 중층적인 의미로 쓰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은 엔딩의 단 세 장면으로 인해 모두 변명이 된다. 결론적으로 <차이나타운>은 엄마의 마음을 확인한 딸이 엄마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어받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며 관객을 안심시킨다. 스스로 새롭게 해체하고 싶었던 모성신화 속으로 적극적으로 투항하는 것이다.

<무뢰한>

증발한 페미니즘 논쟁과 만들어진 여성

새삼스럽지만 <차이나타운> 속 모성에 대한 견해를 장황하게 언급한 까닭은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의 재현 방식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나 논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다. 2015년 상반기에 나온 몇편의 영화들에는 적어도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뚜렷한 의지들이 엿보인다. 근 10년간 지속된 한국영화의 남성 서사 편중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나 여성성에 대한 논의는 놀라울 만치 증발되어 있다. 다만 <차이나타운>의 김혜수와 <무뢰한>의 전도연, 두 40대 여배우에 대한 상찬과 상대적으로 아쉬운 성적에 대한 위로가 있을 뿐이다.

이상한 일이다. 여성이 극을 이끌고 가는 영화가 흔치 않는 한국영화의 상황에서 여성주의적 시선에 대한 갈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차이나타운>과 <무뢰한>이 성별만 바뀐 역할극 속에서 여전히 남성주의적 시각으로 위장된 영화라면 이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 없을 수 있는 것인가. 악플보다 무섭다는 무플. 다들 이 영화들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변주했을 뿐인 누아르 혹은 멜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성신화로 돌아가는 <차이나타운>의 설명이 매우 친절했던 탓일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여성주의영화를 논하기에 이 영화들의 태도가 함량 미달이기 때문인가.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에 대한 무관심은 현재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재현 양상 전반에 깔려 있는 무관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주의영화에 대한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논쟁은 그것이 실체가 있든 없든 단어를 꺼냄으로써 활성화된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은 요 몇년간 실종됐다.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덩달아 여성 캐릭터들도 부속물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적 매력으로 치장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갈등 해결의 만능키인 숭고한 어머니로 격상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자를 흉내내어 전사인 척하며 또 다른 관능을 뽐내거나. 판에 박힌 논의지만 시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대상화되어 스크린 언저리를 맴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불편한 사실마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페미니즘 논의가 잦아든 건 반페미니즘영화의 선봉 격이었던 김기덕 영화에 대한 관심이 꺼져가던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김기덕이 한국영화의 비평 프레임 바깥에 선 순간부터 페미니즘 논쟁도 활력을 잃었다. 무슨 말이냐면 성녀/창녀의 극단적 이분법이 불러온 반감은 그 반대급부의 논의를 도리어 풍성하게 해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주류영화가 그토록 매달리던 ‘아버지 되기-혹은 아버지 거부하기’와 아예 결별하며 선을 긋는 김기덕의 도발은 한편으론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시선으로 재현되기도 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프레임 자체를 깨부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도발 자체가 천편일률의 규격화, 성장제일주의에 균열을 일으키는 가능성이었다는 말이다. 동시에 이는 한국영화에서 페미니즘적인 시선이 작동하는 방식이 공포와 혐오를 담보로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온전히 두 다리로 자립하는 여성을 찾아내고 응원하는 쪽보다는 여성에 대한 공격을 감지하고 이를 방어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차이나타운>이나 <무뢰한> 속 여성 캐릭터 재현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혹은 한국영화가) 그만큼 여성에게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환경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반여성-폭력’이라는 프레임을 깔아두었을 때는 적극적인 논지를 전개해나가지만 반면에 남성 중심 서사로 편입해 들어가며 여성의 시선이 무뎌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김기덕 영화가 현재 비평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는 건 이 글에서 다루기엔 조금 결이 다른 문제니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이와 함께 페미니즘 비평 역시 논쟁의 프레임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는 건 아쉽다. 적어도 몇년간의 기근을 뚫고 등장한 두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여성 캐릭터의 재현 양상에 대한 몇 마디 첨언은 필요해 보인다.

<스물>

소년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차이나타운>과 <무뢰한>은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부각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기억에 남는 건 <차이나타운>의 우희와 <무뢰한>의 혜경이 아니라 김혜수와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역량일 따름이다. 두 영화 모두 장르 특유의 농밀한 팜므파탈이나 전형적인 보스에서 어느 정도 비껴나 있지만 그것이 온전히 여성의 관점에서 재현되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가령 <차이나타운>은 우희가 몸으로 습득한 생존법을 자식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모계권력의 계승이 남자들의 권력투쟁과는 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독은 부계 중심의 집단과 모계 중심의 집단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나보다. ‘여성이 주인공인 누아르’로서 이 영화는 기존에 여성에게 관습처럼 주어지는 이미지들을 역전시켜 엄마=보스의 위상을 부여하려 한다. 우희는 일영에게 “죽지 마, 죽을 때까지”라는 명제를 남기며 아무 저항 없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후계자가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해줄 동료가 필요해서 우희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어째든 영화는 원초적인 생존법칙의 승계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시점에서 ‘엄마’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고 전형화된 모성의 해체로 작동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단 세컷의 사족을 통해 영화는 딱 들어맞는 퍼즐처럼 모성신화 속으로 투항한다. 애초에 이 영화에서 여성성이란 그녀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것이 더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가깝다. 남자들의 악다구니와는 다른 방식의 권력투쟁이 작동할 거라는 기대는 부계 사회를 모계 사회로 치환시키는 동력이다. 얼핏 사족처럼 느껴지는 모성신화가 모자란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이유는 <차이나타운>이 상당 부분 우희와 일영 두 여성의 감정적 설득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단지 ‘여자니까’로 제시하는 건 ‘여성은 뭔가 다른 게 있을 거야’라는 무지에 가깝다. 이윽고 그 빈자리에는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오랫동안 차용해온 논리, 어머니나 누이로 상징되는 희생하는 여성상이 반복된다.

<무뢰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끌려서는 안 되는 여성에게 끌린 남자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여성의 시각을 대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혜경이, 아니 전도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육감적이거나 청초한 여성상이 아닌 생활에 찌들어 두 다리로 버티고 서려는 여성상을 그려내는 것 정도다. 다만 이를 살아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라고 선뜻 말하기 어려운 것은 혜경이 어떤 처지에 놓인 여성이건 상관없이 두 사람을 둘러싼 핵심 정서기 낭만적 멜로이기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재곤(김남길)을 받아들였던 혜경의 순정은 재곤의 정체를 아는 순간 사실상 훼손되고 정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영화는 별다른 이유나 상황을 제시하지 않고 다시금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한 감정을 끼워넣는다. 식상하게 표현하자면 이 감정의 주체는 혜경이 아니다. 혜경이 그랬으면 하는 남자의 마음, 또는 여성에게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환상에 가깝다. 두 영화 모두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듯하고 실제로 두 여배우는 이 역할을 무난히 수행해내지만, 그것은 캐릭터 해석과 표현력의 성취일 뿐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성취는 아니다.

<간신>

여타 여성의 몸을 전시의 대상으로 활용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겠다. 상업영화에서 부품처럼 활용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도 크게 할 말은 없다. 다만 몇 가지 불협화음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민규동 감독의 <간신>의 경우 기획과 마케팅은 분명 여성의 매혹적인 노출에 방점이 찍혀 있는 영화다. 이런 영화조차 “여성 중심의 이야기”라고 우기면 더이상 할 말이 없다. 무미건조한 정사 장면이 강압적 상황에 놓인 여성의 처연함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는 명백한 실패다. 그 한 장면만 그런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서 영화가 여성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밋밋한 정사 장면은 목표와 방향이 어긋난 기획영화의 불협화음에 가깝다. 이병헌 감독의 <스물>은 더욱 심각하다. ‘인생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란 변명 아래 영화의 빈 곳을 채우고 있는 소위 섹드립은 상대의 인격을 뭉개고 조롱하는 쪽으로 작동한다. <스물> 속 여성은 욕망을 배설하는 대상으로 내몰린다. 장르영화라는 용인 아래 그걸 보고 낄낄거리며 즐길 수는 있다. 다만 그 웃음이 저열하고 저급하다는 것을 환기시킬 반대 진영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안타까운 건 이와 같은 웃음 코드가 별 문제 인식 없이 대중적으로 폭넓게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주어진 길은 남성 서사의 부속물이 되거나 환상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장르영화의 기능상 특정 역할을 담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진짜 걱정스러운 건 전복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왜곡된 환상을 채워주는 쪽으로 기능하는 재현들이다. 이는 얼핏 여성 캐릭터를 추어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겠지’ 정도로 마감하며 기존의 전능한 어머니, 희생된 누이, 완벽한 순정의 정서를 반복한다. 여성은 증발하고 여성에 대한 환상만 남을 때 이 사막에 들어차는 건 무엇일까. 2004년 <씨네21> 446호 기획 기사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에서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영화의 성공과 성장 뒤엔 공동체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홀로 남겨진 소년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젊은 감독과 젊은 관객의 밀월기가 끝남과 동시에 성장영화 시대도 종언을 고할 것이라 분석했다. 이제 한국영화는 홀로 남겨진 소년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2015년의 한국영화는 여전히 여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에 머무른 채다. 2014년 한해에만 1천만 영화가 세편이나 나오는 시대이니 덩치는 완전히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내는 여성은 이랬으면 좋겠다며 어머니를, 누이를, 혹은 불가능한 여성을 꿈꾸는 어른아이에 불과하다. 소년의 마음은 꿈속에 있어 아직, 한치도 자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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