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의 영화비평] 판타지의 파괴
2015-06-26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 현실을 수용하는 방식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쥘 베른의 소설 <카르파티아 성> 서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있을 법하지 않으니 진실이 아닐 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이르다. 지금은 불가능이 없는 시대이며, 온갖 과학적 수단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 짧은 문구를 통해 어쩌면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의 판타지적 성향을 간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쥘 베른의 말처럼 과학에 의해 현실화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그때의 서사를 판타지라고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이 경우엔 ‘그로테스크하다’거나 ‘있음직하지 않다’라는 식으로 감상을 정리하는 편이 더 적합해 보인다.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이렇듯 흔히 판타지라 부른다는 점을 떠올리며 영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트와 의상의 화려함에 비례한 불안

1938년 경성의 여자 기숙학교, 16명의 소녀들이 생활하는 304호 기숙사에 폐병을 앓고 있는 소녀 주란(박보영)이 등장한다. “이제 혼자구나. 괜찮아. 틀림없이 건강도 좋아질 거야”라는 교장(엄지원)의 목소리와 더불어, 연약해 보이는 주란의 모습은 쉽사리 프랜시스 버넷의 동화 <소공녀> 속 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 부유했던 소녀가 순식간에 억압적 환경에 갇히고, 다수의 친구들이 그녀를 피하지만 단짝친구가 생기면서 학교생활이 즐거워진다는 서두가 두 작품은 닮았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전부다. 동화적인,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실적 설정들은 이후 호러영화의 활로를 향해 나아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녀들의 공간 곳곳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관객과 주인공은 그 비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당황하게 된다. 주란의 몫으로 배정된 침상이 실은 그녀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던 소녀의 것이라거나,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하던 주인공의 상태가 급격하게 좋아진다는 설정은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의 비정상적인 성향을 높여준다. 다만 그 비밀스러움이 아름다운 외관으로 치장되기에, 이곳의 비밀들에 대해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이 점이 특이하다. 공들인 세트와 화려한 의상은 이 작품이 나아가는 암흑의 미스터리에 대한 공포를 상쇄해주는 효과를 지닌다.

흔히 미스터리하다고 여기는 사건의 기저에는 ‘불합리’와 ‘비정상’이라는 상황들이 연관돼 있다. 그리고 이때의 이례적인 상황을 부각시키기 위해, 미스터리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영화는 대개 ‘현실의 환경’을 관객에게 친숙한 형태로 그려낸다. 초반의 상황을 통해 익숙한 코드의 현실이 상상되자마자, 그 실제의 환경 속으로 무언가 침입하는 것이다. 아마도 실제와 가까운 환경이 그려진 후 거친 미스터리가 침입한다면, 그 대비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가 그랬고, 영화 <캐리>와 <샤이닝>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겪으며 주인공들은 자신이 겪는 미스터리의 효과를 부각시킨다. 마치 이전까지 자연적 요소들이 그들이 만나게 되는 특이한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환상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보편성은 이후 그들과 함께 등장하는 비정상적 요소들의 출현을 부각시키는 장치가 된다. <경성학교>의 경우도 비슷하다. 영화 속 현실과 초자연적 비현실의 콘트라스트는 주란이 ‘알약’을 받던 순간을 기점으로 이후 점점 커진다. 알약을 삼키며 교칙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하던 주란의 모습은, 단짝친구 연덕과 함께 학교의 비밀스런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하게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초반 이후 드러나는 평범하지 않은 이상 징후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먼저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겁을 주어 무섭게 만드는 목표를 지니는 미장센의 요소들이 앞서 등장한다. 특히 중반 이전에 이 성향은 두드러진다. 때문에 여기까지 영화의 장르는 호러영화인 양 느껴진다. 과거 <링>이나 <주온> 등 영화가 보여주던 방식, 그러니까 현실세계의 자연적 법칙들과 호환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을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목도하게 된다. 예컨대 학교에서 사라진 소녀의 환영이 귀신의 형태로 주인공의 눈앞에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나, 관절을 트는 기괴한 친구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설정, 혹은 침대 밑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겁을 주는 장치 등은 주인공보다는 관객을 겨냥해 연출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주인공의 ‘불안’과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설정된 미장센이 중반 이후에 자주 드러난다. 이 두 번째 특성 탓에 영화는 표현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어쩌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여성적인 뉘앙스, 다시 말해 지나치리만치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완성된 세트 구성은 이런 성향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로 유학가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소녀들의 집착, 일본제국에 인정받으려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여교장 캐릭터는 세트와 의상의 화려함에 비례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인물들의 행동이 세트의 아름다움과 상반된 불쾌함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기형적인 욕망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소품의 안락함과 어긋날수록, 그것을 지켜보는 제3자의 시선은 더욱 불편해진다.

은유가 아닌 과학

미장센이 드러내는 표현주의적인 미의 향연이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영화는 어쩌면 극단적으로, 이탈리아 지알로 장르의 후예 즈음에 위치시켜야 옳았는지 모른다. 섹슈얼리티로 대변되는 장르의 욕구가 미술적 장치로 자리바꿈한 것 정도가 두 작품의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경성학교>는 후반부에 1930년대란 배경의 특성을 토로하며 장르를 바꿔간다. 그리고 그즈음, 영화가 지향했던 판타지의 실체가 현실적 요소를 토대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주란이 보았던 귀신이 ‘현실’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예지의 근원이 과학적 근거에 기대어 있음을 관객은 끝내 설득당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와 견줄 수 있다. <여고괴담>의 첫 번째 시리즈가 공포의 장치들을 적극 활용했던 것과 달리 이 두 번째 작품은 1990년대 후반 한국을 강타했던 ‘사회적 상징’을 지닌 공포영화의 대표격으로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이나 <텔미썸딩> 등 당대의 환상영화가 드러낸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경성학교>는 충실하게 재현해 보이는 셈이다.

모호한 시대배경을 드러내며 ‘스페인 내전’이란 키워드를 사용했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나 <악마의 등뼈> 등 스페인 공포영화의 문법과도 이 작품의 맥락은 비교된다. 또한 <장화, 홍련>이나 <알포인트>가 사용한 장르의 혼종 방식, 장르를 통해 집단 무의식을 건드리던 2000년대 한국영화들과도 이는 다르다. <경성학교>가 드러내는 ‘1938년의 식민지’라는 시대의 직접적 수용은 오히려 판타지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사회의 일상적 공포를 드러내려 호러를 활용했던 2000년대 초반과 달리,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은유가 아닌 과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미스터리함이 불러온 서스펜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이 켜켜이 쌓아올린 고딕풍의 공포감은 마침내 희생된 소녀들이 안치된 유리방의 폭발 장면에 이르러 산산조각난다. 만일 이것을 ‘스타일이 있지만 영혼이 부재하는 어떤 경향’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하면 너무 가혹하게 들릴까. 현실의 수용이 가져온 판타지의 파괴,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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