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준상의 매니저로 일주일쯤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공란을 찾을 수 없는 스케줄 관리 수첩에 빼곡히 일정을 기록하다가 아마 배우보다 먼저 피곤함을 토로하게 되진 않을까. 워낙에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로 유명하지만, 사실 유준상의 대단함은 열정의 강도가 아니라 열정의 꾸준함에 있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를 찍는 동안에도 뮤지컬 <로빈훗>과 <그날들>의 무대에 올랐고, ‘J N Joy 20’(유준상이 20살 어린 기타리스트 이준화와 결성한 밴드)의 세 번째 앨범을 발매했다. 드라마가 끝나자 영화 <성난 화가>의 홍보에 돌입했다. 강우석 감독의 신작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도 캐스팅돼 일찌감치 차기작을 결정했다. 올해로 배우로 데뷔한 지 20년. 언제나 젊음, 유준상의 최근을 들여다봤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병행하며 일한 지 5년이 넘었다. 가끔은 ‘내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진 않나.
=그렇게 일한 지 7∼8년은 됐다.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공연 스케줄이 항상 1∼2년 전에 잡히기 때문에 그 스케줄에 맞춰 영화와 드라마를 하다보면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공연을 안 할 수도 없다. 공연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내겐 아주 크다.
-셋 중 에너지 소모가 가장 큰 게 뮤지컬이다. 쏟는 게 많은 만큼 얻는 것도 많은 건가.
=물론이다. 운동선수들이 시즌이 끝난 겨울에 훈련을 엄청 하잖나. 그러고는 봄부터 가을까지 경기를 뛴다. 여름쯤 되면 힘이 든다. 훈련량이 많이 축적돼 있어야 그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다. 나는 그런 훈련을 공연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 영화를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건 공연을 통해 축적된 에너지 때문인 것 같다. 물론 힘들고 괴롭다.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을 만큼 괴로운데 그게 너무 좋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촬영하면서도 뮤지컬 <로빈훗>과 <그날들> 두편을 했다. 진짜 믿을 수 없는 양의 작업을 소화한 거지. 하지만 그 성취감은 대단하다.
-전규환 감독의 <성난 화가>가 6월18일 개봉했다. 전규환 감독과는 여러 영화제에서 오다가다 만난 적이 있고, 다음에 작품 한번 같이 하자는 얘기를 주고받은 게 인연이 돼서 이번에 함께하게 됐다고 들었다.
=그렇다. 전규환 감독님의 영화들을 보면서 저 현장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경험해본 현장은 무척 평화로웠다. 예산도 적고 환경은 열악한데 왜 이렇게 촬영이 수월하게 진행되는지 신기할 정도로. 그렇다고 감독님이 쉽게 타협하고 넘어가는 분도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냥 넘어갈게요, 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좋았다.
-<성난 화가>의 화가 캐릭터는 평상시엔 도축장에서 일하고 악인을 만나면 신의 대리자처럼 악인을 벌하는 인물이다. 모호한 구석이 많은 캐릭터다.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다. 시나리오상에는, 마지막에 그가 모두를 심판하고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는 장면이 있었다. 날개를 CG로 만들어야 했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결국 표현하지 못했다. 감독님도 그 부분을 안타까워했고 내게 미안해하셨다. 물론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은 많았다. 천사인데 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까 하는. (웃음) 하지만 정말로 이 세상에 그러한 천사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찍었다.
-전규환 감독의 영화는 이야기나 표현의 수위 면에서 불편한 지점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고민이나 걱정은 없었나.
=전작들을 볼 때 손으로 눈을 가리며 봤다. ‘어우, 왜 저렇게까지…’ 이러면서. 뭐든 푹 빠져서 보는 편이라 영화를 무척 힘들게 봤다. 지금까지 감독님과 함께 작업한 배우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부와 영광을 누리게 해주는 영화도 아닌데 배우들이 성기까지 다 노출하잖나. 그들이라고 왜 창피하지 않겠나. 그런데 작품을 믿고 그렇게 연기하는 거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모습 노출 장면이 있지만 동료 배우들의 과감한 노출과 체위 때문에 노출 신이 다소 묻힌 감이 있다.
=그러게, 잊고 있었는데 뒷모습 노출 장면이 있었네. (웃음) 사실 나는 노출이랄 게 별로 없었다. 문신을 보여주기 위한 상반신 노출이 있어서 감독님이 사전에 몸을 좀 만들라고 하셨다. 보통은 연출자가 몸을 만들어달라고 얘기하기 전까지는 굳이 몸을 만들지 않는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젠 젊지가 않아서 힘들다.
-에스토니아 촬영 당시 예산을 직접 댔다고 들었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마지막에 에스토니아에 촬영하러 갈 비용이 없었다. 그게 안타까워서 ‘갑시다’ 한 거다. 감독님, 나, 매니저 등 소수만 간 거라 그리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전규환 감독은 <성난 화가>의 배급 상황이 좋지 않아 근심하더라. 최근의 배급 환경에 대한 한탄도 하고. 마케팅 비용을 크게 들일 수 없는 저예산영화에 참여할 때 배우로서 느끼는 책임감도 크겠다.
=지금까지 저예산영화들을 꽤 많이 했다. 친한 친구인 민병훈 감독과도 <터치>(2012)를 함께했는데, 가까이서 힘들게 배급하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런 상황을 잘 안다. 하지만 또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란 게 있다. 그 몫은 다하려 한다. 개봉했을 때 당장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좋은 영화는 계속 회자된다. 그 옛날에 찍은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2009)도 아직까지 사람들이 보고 얘기하잖나. 극장에서 봤지만 금세 잊혀지는 영화들도 많다. 관객 5만명 든 영화가 1천만명 든 영화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도 많고. 참여한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되고 회자되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큰 바람이다.
-배우의 몫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나.
=나는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파는 사람은 아니다.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해서 사람들이 극장에 많이 들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대신 홍보는 열심히 해야지. 관객에게 ‘이런 영화입니다’라고 알리는 것도 배우의 몫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작이나 연출을 해볼 생각은 없나.
=그건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음악은 또 다르다. 5월에 ‘J N Joy 20’의 세 번째 앨범을 냈다. 음악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이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는데, 학교 다닐 때 단편영화를 만들어봐서 내가 나를 안다. (웃음)
-지난 6월2일 <풍문으로 들었소>가 종영했다. 오랜만에 만난 묵직하고 재밌는 드라마였다. 안판석 PD와 정성주 작가와는 전에 인연이 있었나.
=이번 드라마로 처음 만났다. 드라마를 하면서 짜릿짜릿했다. 이런 대사를 칠 수 있다는 게, 이런 상황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드라마에선 종종 과장된 연기도 능청스럽게 선보이는데, 배우로서 양식적 연기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는 편인가.
=대본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되는 것 같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대본을 받고서 여러 톤으로 대사를 읽어봤다. 그때 지금의 한정호 톤으로밖에 표현이 안 되더라. 녹음해서 들어봤는데 어쩌면 사람들한테 욕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인 대화 톤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리해도 그 톤으로밖에 연기가 안됐다. 이건 이렇게 쓰인 대본인가보다 싶었다. 대본 리딩 때 다행히 작가님과 PD님이 좋다고 하셔서 그 다음부턴 용기를 냈다.
-<풍문으로 들었소> 1화에 “진정한 법률가는 냉철한 휴머니스트이자 열정적인 합리주의자”라는 한정호의 대사가 있다. 실제로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인가.
=‘냉철한’은 아닌 것 같고 ‘열정적인’은 확실하다. (웃음) 합리주의자보다는 휴머니스트에 가까운 것 같고.
-그럼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인 거네.
=이성적으로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금처럼 철없는 게 좋다. 그러면서도 정치•사회 문제엔 관심이 많다. 평상시에도 현안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한정호 역할을 한 다음엔 더 나랏일을 걱정하게 됐다. 보수의 아이콘인 한정호가 자신의 능력을 좀더 좋은 쪽으로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좋은 보수와 좋은 진보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간이다. 이러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게 있다면.
=글쎄, 언젠가 스님 한분을 만났는데 ‘긍정적이기 위해 항상 도를 닦습니다, 수행을 합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이 무척 와닿았다.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스님에겐 평생 이루고자 하는 일인 거다. 긍정의 힘은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좀더 기분 좋게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그런 생각을 한다.
-스스로는 잘 타협하지 않는다.
=타협 안 한다. 나 자신한테는 엄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배우가 거저 되는 게 아니다. 눈 딱 떴는데 배우가 돼 있고, 가만히 있으면서 배우로서의 자리를 유지하는 경우는 없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고민의 깊이도 상당하고 훈련의 과정도 치열하다.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계속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간의 심리에 대해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음악을 만든다. 음반을 내는 일도 연기를 잘하려고 하는 일이다. 연기의 연장선인 셈이다.
-8월에 촬영 예정인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엔 흥선대원군으로 캐스팅됐다. <이끼>(2010), <전설의 주먹>(2012)에 이어 강우석 감독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게 됐다.
=강우석 감독님의 스무 번째 작품을 꼭 같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님이 만드는 사극에 꼭 한번 출연하고 싶었다. 막연히 몇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작품이 그 두 가지가 딱 맞아떨어진 작품이라 더없이 좋았다.
-현재 개봉일을 조율 중인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도 출연한다.
=거긴 한 신 나온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출연하는데, 두 신 중에 한 신 잘렸다고 하더라. (웃음) 홍상수 감독님과는 한 신, 두 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장을 함께한다는 게 중요하다. 홍상수 감독님 현장에 가면 굉장히 힘들다. 내가 왜 이걸 한다 그랬지, 하고 후회한다. 물론 이번에도. (웃음)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 자체가 좋은 거다. 완전히 극과 극인 두분인데, 내 인생에서 강우석 감독님, 홍상수 감독님을 만난 건 배우로서 큰 복인 것 같다.
-1995년 S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데뷔 20주년이다.
=‘겨우’ 20년 연기했다. 20년 동안 잘 버텼네, 다행이다, 그런 마음이다. 그다음에도 또 잘 버텨야 할 테고. 이젠 건강이 중요한 나이가 됐다. 지금도 20살 어린 친구들과 무대에서 같이 공연을 하는데, 당연히 힘이 든다. “형님 지치신 거예요?” “그럼 지쳤지.” 그렇게 힘들다는 거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책임감이 있으니 그 책임감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나와 함께 작업한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참 그때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한다고요?’ 그런 얘기 듣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