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연기의 끝까지 가고 싶다
2015-07-21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파스카>에 출연한 대학로 최고의 배우 김소희 스토리

영화 <혜경궁 홍씨>(2015) <야간비행>(2014) <파스카>(2013) <춘정>(단편, 2013) <굿바이 보이>(2010) <오구>(2003)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1999)

연극 <혜경궁 홍씨>(201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2013) <고곤의 선물>(2012) <맥베스>(2011) <햄릿>(2010) <갈매기>(2010) <베니스의 상인>(2009) <길>(2008) <원전유서>(2008) <아름다운 남자>(2006) <오월의 신부>(2005) <리어왕>(2004) <하녀들>(2002)

<파스카>

“인간 내면의 감추어진 욕망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국내 최고다.”(이윤택) “이제껏 만나본 여배우 중에서 에너지가 가장 넘치는 배우.”(송강호) “어렸을 때는 줄리엣 비노쉬 같았고, 나이가 들면서 이자벨 위페르처럼 늙어가는 여배우.”(김윤석)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속이 후련하다.”(오달수) 한국 최고의 연출가와 배우들로부터 상찬을 받은 이 여배우는 김소희다. 김소희? 아! 하면 당신은 연극을 좀 챙겨본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낯선 이름일 것이다. ‘이윤택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그녀는 극단 연희단거리패에서 20년 넘게 연기를 해온 극단의 간판스타이자 대학로 최고의 배우다. 2008년부터 이윤택 연출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희단거리패의 대표가 됐고, 올해 3월 첫 연출작 <갈매기>를 내놓았다. 또, 7월9일 개봉한 영화 <파스카>의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다음 장부터 펼쳐질 김소희 스토리로 안내한다.

무대 위의 그녀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기자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녀가 출연한 연극의 대부분을 챙겨봤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0년 전에도 그녀는 대학로의 흥행 보증수표였고, 연극과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연기의 교과서였다. <햄릿>에서 그녀가 연기한 오필리어는 사랑에 실패하고 미쳐가는 여자였는데, 국립극장의 넓은 야외무대인 하늘극장이 소극장처럼 느껴질 만큼 꽉 차 보였고, 그녀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는 그 어떤 영화나 연극 속 레이디 맥베스보다 훨씬 더 고독했다. <오구>에서 과수댁과 무녀를 함께 맡아 신명나는 굿판으로 안내했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맡은 신여성 혜숙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 광호가 자신이 아닌 홍도를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는 조연이었는데, 광호와 홍도 사이를 떼어내기 위해 모략을 꾸미는 모습이 등장만으로도 관객을 웃겼다. 무대 밖에서는 옆집 누나처럼 친근하다가도 무대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180도 돌변하는 여배우가 김소희였다. 어쩌면 연희단거리패 3기 출신인 안선경 감독이 자신의 영화 <파스카>의 주인공에 1기 선배인 김소희를 떠올린 것도 그녀가 무대 위에서 어떤 연기를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녀들>

이윤택의 페르소나

<파스카>에서 김소희는 열아홉살 남자를 사랑하는 마흔살 여자 가을을 연기한다. 시나리오작가인 가을은 고양이를 키우고, 길고양이의 밥을 챙겨줄 정도로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김소희는 오랜만에 찾아온 안선경 감독으로부터 “얼굴 좀 빌려 달라”는 말과 함께 시나리오를 받았다. 가을은 여러모로 자신과 달랐다. “일단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 개 같은 동물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안선경 감독에게 ‘내 얼굴은 흔하니 좀더 개성 있는 얼굴을 찾아보라’고 거절했다. 같은 극단 선후배 사이지만 영화와 연극 작업을 각각 하느라 바빴던 까닭에 거의 왕래가 없었던 후배가 자신의 색깔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빨리 찍어야 하는 일정이고, 자신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데다가 제작비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김소희는 가을이라는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기로 했다.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을은 “20살 연하의 남자와 함께 살고, 버려진 고양이를 키우는 여자”라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대본을 받았을 때 어떤 캐릭터가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다. 대신 그 캐릭터가 왜 그런 삶을 살아가는지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편이다. 그렇게 말을 걸다보면 인간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 점에서 <파스카>의 가을에게 공감이 됐다.” 그녀가 <파스카>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을과 요셉 커플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다. “그게 가난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이 커플은 가난하다. 가난이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가난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인상적이었던 또 다른 하나는 녹록지 않은 현실임에도 서로 끌어당기고, 껴안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이 특수해 보이는 건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 이야기였다.”

<굿바이 보이>

사실 <파스카>가 그녀의 첫 영화 출연작은 아니다. 눈썰미가 좋은 관객이라면 이송희일 감독의 <야간비행>에서 기웅(이재준)의 엄마 역으로 출연한 그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경구와 함께 출연한 영화 데뷔작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감독 전수일)를 시작으로 연희단거리패 식구들과 함께 연극 <오구>를 영화로 만든 <오구>, 술주정뱅이 남편(안내상)에 대한 불만 때문에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 아내를 연기한 <굿바이 보이>(감독 노홍진) 등 6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녀다. 주로 무대 연기를 해왔던 까닭에 처음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카메라가 낯설”었지만, 지금은 “많이 릴렉스”됐다.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나 <오구> 같은 작품은 대부분 롱테이크, 롱숏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카메라가 약간만 얼굴 가까이 들어오면 부담이 컸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어떤 각도로 보여야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를 많이 알았다. 연기가 성에 차지 않으면 감독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번 더 가겠다고 요청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렇게 하는 게 쑥스럽다.”

김소희가 어떤 배우인지 좀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연기를 시작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녀는 입학식 때 우연히 극예술연구회 동아리방에 갔다가 동아리 사람들에게 끌려 연극에 발을 들이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는 대학 생활 내내 도서관이나 강의실보다는 동아리방에 더 많이 갈 정도로 연극에 흠뻑 빠졌다. 연극을 하면서 연기는 남들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녀 스스로 남들을 재미있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대학을 졸업할 때쯤, 선배의 권유로 출연한 한 프로 연극을 경험하면서 깨졌다. “그 연극은 감정적으로 뭘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대학 때 좁은 의미에서만 연극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보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면서 그 세계에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 연극을 다시 시작했다.”

<햄릿>

연출가 이윤택이 이끌었던 연희단거리패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때쯤이다. 1994년, 연희단거리패에서 운영한 우리극연구소가 1기 배우를 모집하는 오디션을 열었고, 김소희는 수석으로 입단했다. “대학원에서 영어 연극으로 <맥베스>를 해봤다고 해서 보여달라고 했다. 연기하는 도중에 돌발적인 주문을 했는데, 그 주문에 대한 리액션을 무언(無言)으로 보여주더라. 연출가가 요구하는 디테일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오는 걸 보고 감탄했다”는 게 이윤택 연출가의 회상이다. 우리극연구소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이윤택 연출가의 소개로 당시 연우무대에서 활동하던 송강호, 김윤석과 함께 연극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극본•연출 주인석)에 출연한다. 황지우 시인의 시를 연극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살찐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하루를 그린 일기다. 배우 박광정, 김동범, 추상미가 연기한 본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단 그린씨어터가 출연진을 송강호, 김윤석, 김소희로 구성해 연장 공연을 올린 것이다. 송강호와 김윤석은 당시 김소희와의 만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송강호는 “(김)소희가 연극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소희 하면 에너지가 떠오른다. 무대 위에서 그렇게 힘과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김)윤석씨와 함께 ‘힘소희’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웃음)”고 떠올렸다. 김윤석은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를 하기 전에 소희씨가 했던 연극 <오레스테스>(연출 이병훈)를 인상 깊게 본 적 있다. 나이는 어렸지만 대학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유망주이자 보석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녀는 <오구> <햄릿> 등 연희단거리패의 작품들을 차례로 하다가 1999년 9월 연희단거리패와 함께 밀양으로 내려간다. 연희단거리패의 밀양 연극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존의 연극과 다른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연극을 만들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상을 계속 꿈꿀 수 있는 현실을 마련해야 이상과 현실을 함께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윤택 선생님이었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밀양으로 내려가 연극을 하는, 특별한 삶을 선택했다.” 다행스럽게도 집에서 그녀의 선택을 반대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개방적이시다. 처음에 연극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유학을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얘기할 정도였다. (웃음) 공연 때 친구분들 모시고 보러 오시기도 하고. 다만, 부모님께서 연극을 하면 돈이 안 된다는데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남들에 비해 크지 않다. 좋은 집도, 차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 연희단거리패의 밀양 연극촌 생활은 훈련, 작업, 공연의 연속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연극촌 근처 저수지에 가서 산책과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공연에 필요한 소품이나 의상, 무대 등을 만든 뒤 저녁에는 공연을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하루 종일 연극만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 생활이 배우 김소희를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녀를 포함한 연희단거리패는 7년간의 밀양 생활을 마친 뒤, 2006년 5월 대학로에 소극장 게릴라극장을 마련해 올라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소희는 <햄릿> <맥베스> <원전유서> <고곤의 선물> <혜경궁 홍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어머니> 등 많은 연극에 출연하면서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어느덧 그녀의 이름 앞에는 ‘이윤택의 페르소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면의 심리를 몸으로 드러내는 배우

배우로서 김소희가 여러 연출가와 동료 배우들에게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인간의 숨겨진 내면과 욕망을 몸으로 잘 표현하는 배우”라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김소희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한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예술감독은 “배우의 역할은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게 아니다. 내면의 심리를 몸으로 드러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 점에서 김소희는 한국 최고의 배우”라며 “지성과 감성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리브 울만과 메릴 스트립 사이에 있는 배우이며, 현재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배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야간비행>을 함께 작업한 이송희일 감독 역시 “그녀는 카메라를 끌어당길 정도로 좋은 배우”라고 평했다. “기웅 엄마(김소희)가 기웅이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었다. 카메라가 그녀와 거리를 유지한 채 찍었는데도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하고, 현장의 공기를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스탭들이 숨을 안 쉬었다. 나 역시 카메라를 그녀쪽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가야 그 순간을 온전히 담을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고민이 많았다”는 게 이송희일 감독의 말이다.

그녀는 언어를 잘 표현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사를 전달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윤택은 “언어가 소통이잖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의미 전달 차원에 그치지 않고, 언어 뒤에 있는 인간의 본성까지 드러낸다”고 칭찬했다. 대본에 갇히지 않고 열려 있는 배우라는 의견도 있다. 연극 <우리에겐 또 다른 정부가 있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김경익은 “보통 마지막 공연 때는 배우들이 연출의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소품이나 의상을 이용해 장난을 칠 때가 있다”며 “이상한 의상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기를 한 대목이 있었는데, 소희가 당황하지 않고 리액션을 해주더라. 그만큼 상대방에게 열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소희가 극단 연희단거리패 생활을 한 지 올해로 22년째다. 그녀는 2008년 이윤택의 뒤를 이어 연희단거리패의 대표가 되었다. 연기하는 것도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 일인데 동료 배우들을 챙기고 극단을 운영하는 대표 자리가 부담스럽진 않을까. “이윤택 선생님으로부터 대표를 맡을 것을 제안받았을 때 자신감이 아주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윤택 선생님과 또래의 동료 배우들도 있어 큰 부담감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맡은 인물의 삶을 간접체험이라도 해서 많이 알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겪는 경험이 내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바빠도 그녀의 연기 작업은 계속된다. “지난 3월 첫 연출작 <갈매기>에 이은 두 번째 연출작을 준비하고 있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적>으로, 20, 30분짜리 작품이 될 것 같다. 배우로서 하이너 뮐러의 <사중주>에 오른다. 10월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연극은 2인극으로, 대단히 실험적인 작품이다. 영화 출연? 마음을 닫은 적 없다. 또 하게 된다면 재미있게, 잘하고 싶다. 어쨌거나 연극이든 영화든 배우로서 갈 수 있는 영역이 있는데, 끝까지 가보고 싶다.”

김소희가 꼽은 자신의 연극 베스트3

<원전유서>

01. <원전유서>

“연극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연희단거리패만이 할 수 있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감동으로 충만했던 5시간짜리 연극. 매 맞고 사는 아내 역할이었는데,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방법을 조금 더 알게 된 작품.”

<혜경궁 홍씨>

02. <혜경궁 홍씨>

“가장 최근작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대표작이라 말씀해주시는 작품. 인간의 고통과 불굴의 의지에 잘 매료되는데, 이 작품은 그것을 극단적으로 상상하고 체험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배우로서 조금 더 의연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03. <고곤의 선물>

“실제 모습과 가장 가까운 역할. 연극을 연극인들만큼이나 사랑하는 관객을 실제로 만나는 계기가 된 작품. 그 이후 관객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긴장과 애정을 갖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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