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영 감독의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2002)가 보여줬던 개성 강한 사운드트랙 실험은 당시 활동 중이던 영화음악 작곡가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각본가로 시작해 연기와 연출은 물론 방송 진행자, 라디오 DJ 등 여러 매체에서도 활동했고 두편의 소설까지 냈던 버라이어티한 이력의 소유자 이무영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역시 음악이다. 그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도구 가운데 음악을 가장 사랑한다. 그가 최근 펴낸 팝송 해설서 <명곡의 재발견: 영어 해석으로 보는 팝송이야기 100>(이하 <명곡의 재발견>)은 어쩌면 이무영 감독이 평생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음악이라는 도구의 사용설명서 같다. 20세기 이후 세계음악사에서 중요하게 등장했던 팝송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미국의 실체, 나아가 국제 정세까지도 읽어내려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신작 <한강블루스> 역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들려주는 영화다. 마침 <씨네21>과 만나기로 한 날, 지난주에 역시 <씨네21>과 인터뷰했던 강헌 선생과 막 담소를 나누다 왔다는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영화계와 대중문화 전반에 관해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팝송 해설사 이무영 감독이 들려주는 영화와 음악,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교, 온라인 서점, 영화제 등 꽤 다양한 곳에서 이무영 감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년 전부터 동서대 임권택예술영화대학에서 단편 워크숍과 시나리오 작법 수업을 맡고 있다. 지난해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했던 신작 <한강블루스>를 찍었고 지금은 적절한 배급 경로를 찾는 중이다. 알다시피 쉽지 않다. (웃음) 6월에는 1990년대부터 틈틈이 밥벌이 삼아 모아왔던 자료를 추려 팝송 해설서를 냈다. 곧 개막하는 올레국제스마트폰영화제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일도 돕고 있는데 스마트폰영화제 집행위원은 올해까지만 하고 물러나려고 생각 중이다.
-스마트폰영화제에 참여하면서 동료 감독으로서 시대의 변화상 등 느끼는 바가 있다면.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결국 어떤 권력에 맞서는 태도일 수 있다.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그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준익, 봉만대 감독 등이 의기투합해 진행하고 있는 영화제다. 나는 아이디어는 있지만 명확하게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다.
-영화제와 학교에서 만나는 젊은 영화학도들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지 궁금하다.
=테크닉은 점점 좋아지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고착화된 자본주의의 위력이 젊은이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리고 요즘 경쟁은 1등이 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꼴등을 면하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치는 모양새다. 인간이 처한 슬픈 상황이다.
-그들에게 선배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뭘 원하는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뭔지 그것부터 파악해야 한다. 시나리오 수업에 앞서 ‘너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뭐냐’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게 중요하니까.
-<명곡의 재발견>을 읽다보면 바로 그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어 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감미로운 사랑 노래 올드팝 소개가 아니라 첫곡부터 그린데이가 부시 대통령과 정치인을 향한 비판의식을 가사에 담아낸 <American Idiot>를 소개한다.
=물론 책에 실린 곡들은 알파벳 순서다. (웃음) 하지만 그렇게 의도치 않게 무언가가 드러나기도 한다.
-미국 팝송이 주로 소개되는 이유가 있나.
=팝음악에서는 영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정세를 보더라도 미국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흔히 록마니아나 헤비메탈 신봉자들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사실 미국의 맹점에 대해 제대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다. 책에는 싣지 않았지만 그의 대표곡 <Born in the U.S.A.>는 미국의 표면적 가치를 보여주면서도 사실은 부도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다. 그린데이 역시도 아무 생각 없이 괴성만 지르는 펑크록 밴드가 아니다. 부시 정부의 부도덕에 대해서 그들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런 소개는 뮤지션 개개인의 위대함을 알리기보다 대중음악이 현실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밥 딜런이 흑인 인권운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한국의 대중음악이 좀더 자극받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딱히 ‘태도’라는 게 없으니까.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나.
=사실 1990년대에 음악을 통해서 먹고살다시피 했는데 내가 책을 한권도 안 쓴다는 것은 좀 반칙 같았다. 그렇다고 이 방대한 양의 집필을 혼자서 할 엄두는 안 나서 음악평론가인 임진모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임진모 선생이 먼저 내게 통역사로 활동했던 전력 등을 이유로 팝송 가사의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는, 그걸 가지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쓰라고 주문했다. 그의 자극으로 약간의 죄의식과 함께 시작한 것이 이 책이다.
-곡의 선정 기준도 궁금하다.
=순전히 내 개인 취향대로 곡을 선별하면 자연스럽게 영미권 팝음악의 역사와 미국 사회상을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취향에 치우친 책을 쓰고 싶었으나 임진모 선생이 중심을 잡아줬다. 전체 100곡 가운데 절반은 내가 선택하고 30%는 임진모 선생이 골라줬다. 나머지는 역사적인 의의를 보고 골랐다.
-영미권의 아이돌 그룹 노래가 전혀 없다.
=싹 뺐다. (웃음)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도 제외하고 마돈나의 <Like a Virgin>만 넣었다. 아이돌 음악에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을까? 최근에 딸이 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들려줬는데 정말 잘 꾸며진 백화점식의 프로덕션 곡이 흘러나왔다. 누구든 그에 대해 다양한 장르를 실험한다고 했겠지. 물론 그 곡들은 음악적으로는 훌륭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취지에는 맞지 않다.
-리스트에 오른 뮤지션들이 활동했던 시대도 중요하다. 팝음악사에 있어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대 취향도 반영됐나.
=내가 가장 동경하는 시대는 1960년대와 1990년대다. 이때는 대중문화의 목소리가 컸던 시대다. 1960년대에는 흑인 인권운동이 있었고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면서 사회가 양분되어 싸웠지만 나는 그게 건강했다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애국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울부짖는 진지한 태도가 맞붙어 싸웠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대중문화가 체제에 대해 너무나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도 마찬가지다.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과 기성세대의 불신, 월가로 대변되는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시대의 모순점 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고민이 담기기 시작했던 시대다. 힙합의 전성기와 얼터너티브 록이 태동했던 이 시대는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기이기도 하다. 내가 동경하는 음악이 등장했던 시기와 실제로 살았던 시기의 음악이 같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한국도 1990년대만 하더라도 대중음악의 위상이 지금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일찍 복고 열풍에 휩쓸린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음반산업이 몰락하고 이제는 음원 싸움으로 가는 데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앨범을 정성스레 완성할 시간이 어디 있나. 노래 한곡 살아남을 시간도 부족한데. 대단한 시도 없이 그저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힙합이 좀 실망스럽다. 힙합의 본질은 울분이다. 그 울부짖음을 요즘 한국 힙합에서 별로 찾아보지 못한 것 같다.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1990년대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뭘 해도 최초인 시기도 있었다. 생각하면 그것을 그냥 구현하면 됐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많지 않나.
=물론 절박감과 상실감은 있을 수 있으나 지금도 뭐든 시작할 수는 있지 않나. 스마트폰영화제의 철학이 바로 이거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봉만대 감독이 스마트폰 강좌를 열면 많은 직장인들이 강의를 듣는다. 뭔가 영향을 주려면 스마트폰으로 장편을 찍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계속 얘기 중이다. 그래야 누구든 따라 움직이지 않을까. 화가 나면 날수록 의기소침해지면 안 된다. 그건 적들이 좋아한다. (웃음)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수 중에 그런 태도에 주목하고 있는 가수도 있나.
=장범준의 버스커버스커가 좋았다. 한국의 현실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일종의 통로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을 이해한다. 심사위원들이 장범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할 때 통쾌했다. 그런 자기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들이 계속 나와야지. 자본의 지원을 받아 세상에 대한 외침을 가진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내가 <한강블루스>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100% 동인제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 조금의 위로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노숙자 장효(봉만대)와 집 나온 게이 추자(김정석), 가출 소녀 마리아(김희정) 등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 사람들이 다리 주변에 살면서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이야기인 <한강블루스>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을 의식하고 찍은 것은 아니다. 촬영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시기는 그저 우연이었다. 이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이야기다. 작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마치고 더더욱 그들의 삶에 이런 위로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행은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와 가장 맞닿아 있는 영화들을 꼽는다면 어떤 영화가 있을까.
=대학에 들어갈 당시 나는 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1960년대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재발견했던 그 아름다웠던 1960년대를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살 생각도 없었고 최소한의 돈을 벌면서 살겠다고 했지.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1985)와 숀 펜의 <인투 더 와일드>(2007)가 보여주고 있는 삶은 너무 고결하다. 요즘 젊은이들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어렵더라도, 영화와 음악이라도 그런 세상을 꾸준히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최근 한국영화에서 어떤 삶의 태도에 영향을 끼칠 만한 태도를 중시하는 영화가 있었던가. 최근 본 영화 중에서는 <더 헌트>(2012)가 인상적이었는데 전세계적으로 죄의식과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이 시대에 담아둘 만한 문제의식을 집어낸 영화였다. 미안하다는 염치 좀 갖고 살자.
-상반기 이후 다음 작품으로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나.
=이미 상반기에 두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정두홍 감독이 제작을 맡을 예정이며 <도색사진>이란 제목의 구한말 시대 이야기다. 왠지 예산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 <아버지>라는 제목의, 짐승 같은 남자의 이야기도 새로 썼다. 겉으로는 <피와 뼈>의 김준평 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속은 솜사탕처럼 여린 이율배반적인 남자의 이야기다. 장르? 나는 장르보다는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창작자들이 관객에게 어떤 세상을 펼쳐 보일지 더 치열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