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의 2014년 필모그래피가 공란으로 비어 있는 게 자못 낯설다. “1년에 1편, 많으면 2년에 3편씩” 일정하진 않아도 꾸준한 템포로 그간 작업을 해왔으니, 의도치 않은 그의 휴지(休止)가 꽤 길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 세편의 영화가 개봉한) 2013년이 좀 특별했다. 어쩌다보니 지난해엔 작품이 없었는데. 혹 일부에선 (<변호인> 이후) 외압을 받아서 출연을 못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웃음)” 송강호는 2014년을 <사도>와 함께 보냈다. 52년간 조선의 왕위를 지킨 장수한 성군이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모진 아버지 영조를 연기하면서. <사도>는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적 사건을 중심에 놓고 풀어낸다. 이준익 감독은 볼거리보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사극, 90%가 팩트인 사극을 만들었다. 배우보다 캐릭터의 존재감이 더 클 수도 있었을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아니나 다를까 송강호만의 영조를 만들어낸다.
송강호는 영조의 40년 세월을 넘나들며 연기한다. 70살의 왕을 연기하는 데에는 준비가 필요했다. 수염과 주름과 검버섯으로 노화를 보여주는 일차적 준비가 아니라, “꼬장꼬장한 칠십 노인”의 모습에 사실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걸음걸이와 목소리까지 준비해야 했다. 송강호는 갑갑하고 탁한 발성으로 일흔의 영조를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지금 49살이니까, 영조를 연기하는 데 물리적으로 20년의 차이가 있었다. 최대한 목소리나 걸음걸이가 그 나이로 보이게끔 노력을 했던 건 사실이다. 외모만으론, 저건 특수분장이구나 하고 관객이 알아채니까. 하지만 목소리까지 그렇게 나온다면 정말 현실감 있는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탁한 목소리를 통해서 관객이 영조의 험난하고 굴곡진 인생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우의 개성보다 장르의 개성이 부각되기 쉬운 사극에서도, 송강호는 이처럼 철저한 계산과 준비로 제 개성을 지킨다. 꼬장꼬장한 영조에게서 송강호란 배우가 또렷이 보이게끔.
오히려 송강호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준비가 많이 필요했던” 작품이라고 말한다. 송강호는 <사도> 촬영에 들어가기 전 <사도>팀 아무도 모르게, 매니저와 후배 배우 최덕문을 데리고 합숙소에서 2박3일간 두어번 연기 연습을 했다. “그게 참 비밀이었는데 어디서 노출이 돼가지고. (웃음) 어쨌든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게 좀더 조심스럽다고 해야 하나. <변호인>도 그렇고 <사도>도 그렇고. 영조대왕은 스스로 기본 토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물이다. 연기의 창의성이란 게 아무런 토대도 없는 상태에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작품에 맞게끔 준비를 해야겠지만, 연습을 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게 있다.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 연습한다기보다, 자신감을 획득하기 위해 연습을 한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그게 어떤 자신감이냐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감이다.” 언젠가 이준익 감독이 “대한민국 연기 대통령”이라고 칭한 적 있는 송강호에게서 ‘두려움’과 ‘자신감’이라는 얘기를 듣고나니, 어쩌면 이 두 단어가 지금의 송강호를 있게 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10월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이후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김지운 감독과 <밀정> 촬영에 들어간다. <밀정>에선 “이쪽 저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밀정이었던 인물”을 연기한다. 작품 때문에 기르고 있는 콧수염과 턱수염이 벌써부터 <밀정>의 새 캐릭터를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송강호는 “<사도>가 잘됐으면 좋겠다”라며 기어이 <사도> 이야기로 말을 맺는다. “<베테랑>의 흥행과 성공이 굉장히 반갑다. (웃음) 유아인씨가 있어 개인적으로 부담이 확 낮아지면서 편하고 좋더라. 뭐 가벼운 농담이지만, 어찌됐건 관객 입장에서도 좋아하실 거 같다. 나도 한 2년 만에 영화에 나오니까 반갑지 않을까?”(이런 말이 낯간지러운지 괜히 먼 산을 바라본다.) 왜 아니겠는가. 언제나 보고 싶은 배우, 송강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