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가. 산악인들을 향한 반복된 진부한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진부하게, 혹은 농담처럼 답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현란한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도 그곳에서의 체험을 온전히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겪어본 이들만이 어렴풋하게나마 공유할 수 있는 홀로 완벽한 경험. 이처럼 극도로 개인적인 체험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산악영화가 마주하는 장벽이다. <에베레스트>는 산악영화가 직면한 여러 갈림길 중 자연의 거대함을 철저히 체현시키는 방향을 골랐다. 그 길이 다른 방식에 비해 유효한가는 둘째치고 시각적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는 극한의 완성도를 선보인다.
1996년 에베레스트 등반 붐과 함께 참사가 일어났다. 상업등반대 ‘어드벤처 컨설턴츠’와 ‘마운틴 매드니스’가 에베레스트 정산 등반 후 하산하다 다섯명의 사망자를 낸 것이다. 이때 등반에 참여했던 저널리스트 존 크라카우어는 논픽션 서적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통해 여러 인물들의 관점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조금 다르다. 당시의 상황을 극화했지만 사건을 재구성해 시시비비를 가릴 의도는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저 산에 도전하는 과정을 최대한 꼼꼼히 묘사한다. 여기에 극적인 사건이나 영웅담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 영화 앞에 허락된 수식어는 오직 ‘사실적’, 그뿐이다.
스타일은 재난영화에 가깝지만 여느 재난영화와 조금 다르다. <에베레스트>가 재현한 재난의 스펙터클은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 본래 거기 있던 것들이다. 때문에 혹독한 시련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등반 과정은 때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한 걸음을 떼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절박하고 힘겨운지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산을 왜 올라야 하는지, 그들이 왜 거기에서 죽음을 맞이했어야 하는지 같은 질문 따윈 뇌리에서 사라진다.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단순한 대답의 행간이 그제야 실감되는 것이다. 때론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족될 때가 있다. 이 영화의 광활한 조감숏이, 인물들의 클로즈업된 표정이 그렇다. “실제 에베레스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란 감독의 호언은 과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