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부산영화 다이어리
2015-10-01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김성훈
글 : 정지혜 (객원기자)
글 : 김수빈 (객원기자)
글 : 윤혜지
글 : 문동명 (객원기자)
제 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들을 소개합니다
제 20회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1일부터 10일까지 열린다. 전세계 75개국 304편의 영화가 초청된 올해 영화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20’이라는 숫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게 된다. 특히 올해의 부산에선 세계 각지에서 당도한 매혹의 영화들과 더불어 영화제의 스무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다양한 기획전과 행사들이 마련되어 있다. 지난 1020호 특집 기사로 소개한 ‘아시아영화 100’선 중 1위부터 10위까지의 작품이 상영될 예정이며 60년대 한국영화의 숨은 걸작들을 알아보는 회고전과 ‘내가 사랑한 프랑스영화’ 특별전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지난 1회부터 부산영화제의 변화하는 모습을 충실히 담아왔던 <씨네21> 또한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의 전당 비프힐 1층에서 영화제의 지난 19년을 추억하는 사진전을 열 예정이니 10월 초 부산행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길. 더불어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에서의 관람 여정을 도울 30편의 추천작을 엄선했다. 여섯개 구획으로 나눈 이 안내서가 영화의 바다로 향하는 당신의 좋은 동반자가 되길 바라며.

거장귀환

<자객 섭은낭>

<자객 섭은낭> The Assassin

허우샤오시엔 / 대만, 중국, 홍콩, 프랑스 / 2015년 / 104분 / 갈라 프레젠테이션

도대체 어떤 무협영화가 탄생할 것인가. <자객 섭은낭>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거다. <빨간풍선>(2007) 이후 오랫동안 꿈꿔왔던 무협영화를 드디어 만들겠다고 선언한 허우샤오시엔의 신작 프로젝트는, 8년이란 시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영화의 제작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담아내는 데 결코 소홀함이 없는 이 대만의 거장은 오랜 시간을 공들여 기어코 자신의 첫 무협영화를 완성해냈다. 그 작품이 바로 <자객 섭은낭>이다.

9세기 당나라의 전기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여승에게 납치돼 암살자로 길러진 섭은낭(서기)의 이야기다. 부패한 관리를 암살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이나, 섭은낭은 암살해야 할 관리의 집에 잠입했다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를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한다. 여승은 암살에 실패한 섭은낭에게 가혹한 임무를 내린다. 그녀가 나고 자란 웨이보로 돌아가 그곳의 군주인 티안지안(장첸)을 죽이라는 것이다. 섭은낭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데다 한때 약혼까지 했던 티안지안을 죽일 것인지, 혹은 암살자로서의 임무를 저버릴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물과 공간이다. 무협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이러한 그의 신조는 변하지 않는다. 관객의 눈을 쉽게 현혹시킬 화려한 액션이나 빠른 편집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채, 허우샤오시엔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등장인물의 본질과 개성을 육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자객 섭은낭>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카메라의 머뭇거림이다. 늘 멀리서 숨죽이며 대상을 바라보는 섭은낭의 시선, 사랑했던 남자를 눈앞에 두고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이식한 마크 리의 카메라워킹은 숨막히게 아름답다. 더불어 허우샤오시엔이 최적의 시간을 기다려 포착한 자연의 빛과 바람은 <자객 섭은낭>의 미학적 성취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마치 중국의 화폭에서 걸어나온 양 비현실적인 풍경 사이로 차분하게 걸어가는 이 여성 암살자의 모습은 앞으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기억될 것이다. 새로운 클래식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

<산하고인>

<산하고인> Mountain May Depart

지아장커 / 중국, 일본, 프랑스 / 2015년 / 126분 / 갈라 프레젠테이션

펫 숍 보이스의 <Go West>가 배우 자오타오의 춤과 함께 이 영화의 시작을 열고 끝을 장식한다. 같은 노래지만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정서가 다르게 다가온다. <산하고인>은 지아장커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현재를 마주하고, 또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상상하면서 시작된 이야기다.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펜양, 진성과 량지, 두 친구는 타오(자오타오)를 동시에 사랑한다. 진성은 탄광주 아들로 부유하고 오만하며 자신감이 넘친다. 량지는 가난하고 착하다. 타오는 진성을 선택한다. 2014년, 타오는 남편 진성과 헤어지면서 아들의 양육권을 진성에게 넘긴다. 량지는 탄광촌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병을 앓으면서 가족과 함께 고향 펜양으로 돌아온다. 타오는 자신을 찾은 량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준다. 2025년, 타오와 이혼한 진성은 아들 달러를 데리고 호주로 이민 간다. <산하고인>은 중국에서 주로 영화를 찍었던 전작과 달리 처음으로 호주에서 영어 대사로 찍은 작품이다.

<찬란함의 무덤>

<찬란함의 무덤> Cemetery of Splendour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타이, 영국, 프랑스, 독일, 말레이시아, 한국, 멕시코, 미국, 노르웨이 / 2015년 / 120분 / 아시아영화의 창

“이 작품이 타이에서 촬영한 나의 마지막 영화가 될 것 같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군부 정권 아래 표현의 자유에 한계를 느낀 그는 조국에 안녕을 고하는 의미로 <찬란함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고향인 콘 카엔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타이 시골 마을의 군인 이트와 그를 돌보는 중년 여성 젠의 사연을 들여다본다. 젠에게는 켕이라는 친구가 있다. 이트의 영혼이 깃든 켕과 젠이 함께 숲속을 거닐며 찬란했던 과거를 반추하는 장면은 애상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위라세타쿤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찬란함의 무덤>은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영화다.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이들 사이를 거닐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누군가의 영혼이 타자의 육체를 넘나드는 위라세타쿤의 세계는 여전히 보는 이들을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이끄는 마력을 지닌다. ‘꿈’이라는 상징을 빌려 관능과 금기, 압도적인 힘에 대한 메시지를 에둘러 전하는 위라세타쿤의 태도에는 21세기 타이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가 은근하게 숨겨져 있는 듯하다. 끊임없이 색을 바꾸어가며 관객을 꿈의 세계로 인도하는 빛의 구조물이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

<해안가로의 여행>

<해안가로의 여행> Journey to the Shore

구로사와 기요시 / 일본, 프랑스 / 2015년 / 128분 / 아시아영화의 창

집을 나간 남편 유스케(아사노 다다노부)가 3년 만에 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집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아내 미즈키(후카쓰에리)는 놀라우면서도 그리 놀랍지 않은 듯한 표정이다. 미즈키에게 유스케는 자신은 바다에 빠져 죽었고, 긴 여정 끝에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이라 말한다. 이윽고 잠에서 깬 미즈키는 이상한 꿈을 꿨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꿈 같지만은 않다. 곧이어 다시 나타난 유스케는 미즈키에게 그동안 자신이 있었던 곳, 자신을 돌봐준 사람들이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기차를 타고 두 사람이 이른 곳에는 한 노인이 있다. 그는 이미 죽은 자이며 먼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다. 유스케와 함께 허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노인을 보듬어주던 미즈키는 꿈에서 깨듯 일순간 폐허가 된 노인의 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다. 두 번째로 이들은 교자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또 한번 두 사람은 아픈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안주인을 위무한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잃고 며느리와 함께 사는 노인을 만난다. 인간과 영혼의 중간계에 존재하는 유스케와 산 자인 미즈키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는 환상 같은 여정을 함께한다. 그 과정 속에서 유스케에 대한 원망을 간직한 미즈키도 위로받는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지발견

<타를로>

<타를로> Tharlo

페마 체덴 / 중국 / 2015년 / 123분 / 아시아영화의 창

가늘고 귀여운 꽁지머리를 한 사내가 경찰서장 앞에서 추문 비슷한 긴 글을 암송한다. 서장이 놀라운 암기력이라고 칭찬하자 사내는 자신이 기르는 양 수백 마리를 색깔별로 나눠가며 몇 마리가 있는지까지 헤아려 보인다. 서장이 사내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사내는 사람들은 자신을 꽁지머리라고 부르며 진짜 이름은 타를로라고 말한다. 자신이 몇살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도 덧붙인다. 마주 선 두 사람의 선문답 같은 대화가 12분여간의 롱숏으로 지속된다. 그런 타를로에게 서장은 신분증을 만들어야 하니 증명사진을 찍어오라고 한다. 타를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알고 있는데 굳이 신분증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지만 소용없다. 사진관에 들러 난생처음 사진을 찍은 뒤 타를로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 여인을 만난다. 여인은 타를로를 이끌고 노래방에 가서 그에게 술도 권하고 노래도 해보라 한다. 얼결에 그녀와 하룻밤까지 보낸다. 티베트 시골 마을에서 양치기로 살아온 타를로에게 도시와 그곳에서 만난 도시 여자는 생경하고 이상한 경험이다. 타를로가 다시 서장을 만났을 때, “도시에서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 말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타를로>는 흑백영화로 고정된 앵글의 롱숏들의 연속으로 전개된다. 타를로를 숏 안에 두고 그를 둘러싼 외적 변화와 그가 겪는 내적 갈등을 지켜본다. 타를로가 경찰서에 들러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신분증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인공의 공간에서 노래하며 술과 담배를 접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에게는 그 자체로 근대적이고 현대적인 시공간과의 접촉이다. 도시에서 이 모든 일을 겪고 양을 돌보기 위해 다시 외딴 마을로 돌아갔을 때 타를로는 그전의 타를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왠지 “나쁜” 짓을 한 것 같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살아온 땅을 벗어날 수도 없어 보인다. 그저 변화된 자신을 스스로 끌어안고 비극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중국 칭하이성의 티베트인 거주지역에서 태어난 페마 체덴 감독의 신작이다. 데뷔 시절부터 꾸준히 티베트의 관습, 역사, 정체성을 자신의 영화적 주제로 삼아왔다. 간결한 영화적 형식 안에서 한 티베트인의 내면을 묵묵히 들여다본 작품이다.

<펜양에서 온 사나이>

<펜양에서 온 사나이> Jia Zhangke, a Guy from Fenyang

월터 살레스 / 브라질 / 2015년 / 98분 /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중앙역>(1998),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등을 만든 브라질 출신의 월터 살레스가 지아장커와 함께 그를 탐구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 자리한 중국 펜양이라는 도시에 갔다. 펜양은 지아장커의 고향이자 지아장커의 데뷔작 <소무>(1997)를 포함한 <플랫폼>(2000), <임소요>(2002), <세계>(2004)의 배경이 된 곳이다. 월터 살레스와 지아장커, 두 감독은 <소무>의 시내 거리, <플랫폼>의 극장 등 펜양의 이곳저곳을 걸으며 당시 영화에 얽힌 사연을 나눴다. <플랫폼>의 연극 장면을 찍을 때 당시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마을 사람들을 보조출연자로 동원할 수 있었다. 지아장커의 아내이자 뮤즈인 배우 자오타오가 <플랫폼>에 처음 출연하면서 지아장커와 인연을 맺게 된 일화도 들려준다. 또 200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아장커는 영화 촬영 때문에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해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할 기회가 없어서 죄송스러웠다”고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월터 살레스의 꼼꼼한 구성이 돋보인, 시네아스트 지아장커에 대한 에세이다.

<검은 말의 기억>

<검은 말의 기억> Black Horse Memories

샤흐람 알리디 / 이란, 터키 / 2015년 / 90분 / 뉴 커런츠

터키 지배하의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쿠르드어 사용과 그 교육은 철저히 금지돼 있다.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일군의 젊은 쿠르드인들은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비밀리에 모국어로 된 교과서를 복사해 초등학교에 배포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그러던 와중에 이들과 함께 지하 투쟁을 이어가던 아세케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다. 동료들은 그녀가 숨을 거둘 때 꼭 이루고 싶다고 소망해온 일을 대신하기로 한다. 그건 아세케가 고향 땅에서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검은 말 만다나를 그녀가 매장되기 직전에 그녀 곁에 두는 일이다. 그러나 암말인 만다나는 임신을 한 데다 고향을 벗어나 낯선 땅에 와 있다 보니 신경이 더없이 곤두서 있다. 작은 소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불안한 눈빛이다. 그런 만다나의 눈망울을 통해 물속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세케의 모습이 교차된다. 마치 말의 눈을 통해 아세케의 고통이 생생히 전해지는 듯하다. 테헤란 출신의 감독 샤흐람 알리디는 “검은 말을 통해 폭력이 불러일으키는 여파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극도의 긴장감이 젊은 쿠르드인들과 말을 통해 공유된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홍콩 삼부작>

<크리스토퍼 도일의 홍콩 삼부작> Hong Kong Trilogy: Preschooled Preoccupied Preposterous

크리스토퍼 도일 / 홍콩, 중국 / 2015년 / 85분 /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동시대 홍콩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홍콩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세계적인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과 연출을 맡았다. 홍콩의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를 대변하는 세대별 이야기가 삼부작으로 펼쳐진다. 1부 <프리스쿨드>(Preschooled)에서는 아이들이 처한 환경만큼이나 다양한 일상이 학교를 배경으로 나열된다. 2부 <프리오큐파이드>(Preoccupied)는 지난해 세상을 뒤흔든 우산혁명 당시의 홍콩 도심이 생생히 그려진다. 청년들은 시위의 일환으로 거리를 점거하지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생활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운다. 마지막 3부 <프리포스테로스>(Preposterous)에서는 노년의 즐거운 이벤트에 몰입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청년세대를 다룬 두 번째 파트가 영화에서 가장 묵직한 자리를 차지한다. 혁명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청년들에게 ‘연대’와 ‘긍정’의 가치를 전한다. 청년세대는 혁명의 유산을 미래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할 뿐 아니라 과거 세대가 전하는 유산을 물려받을 줄 아는 지혜를 얻는다. 청년층을 대변하는 티에리와 마오산이 세 파트를 유기적으로 이으며 이 같은 세대간의 연결을 암시한다. 감독의 홍콩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애정, 여기에다 그의 카메라만이 지닌 힘으로 쌓아올린 작은 성취와도 같은 작품.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Paradise

시나 데나 아테이안 / 이란, 독일 / 2015년 / 98분 / 아시아영화의 창

이란의 25살 여성 하니에는 교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출퇴근 경로가 너무나 길고 지루한 나머지 하니에는 집과 가까운 테헤란 시내로 전근을 시도한다. 하지만 게을러빠진 공무원들 앞에선 서류 통과조차 먼 일일 뿐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니에는 작은 탈출구를 찾고 싶어 하지만 그 무엇도 그의 실제 삶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카메라는 자주 인물을 자른다. 의도적으로 가린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인간, 한 사람의 여성,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하니에는 불완전하다. 오프닝부터 하니에는 실체 없이 목소리만 존재하는 인간이다. 하니에가 시도하는 사소한 일탈들에서도, 가령 화장실 환풍구에 대고 몰래 담배를 피운다거나 달리는 차의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민다거나 하는 장면들에서 모두 하니에는 반쯤 잘려나가 있다. 삶을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찾은 도피처에서조차 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는 하니에의 모습이 마냥 먹먹하고 슬프다. 시나 데나 아테이안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테헤란 3부작 중 첫번째 작품이며, 자파르 파나히의 동생 유세프 파나히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뱀의 포옹>

<뱀의 포옹> Embrace of the Serpent

치로 게라 / 2015년 / 콜롬비아 / 122분 / 월드 시네마

카라마카테는 부족에서 혼자 살아남은 주술사다. 어느 날 죽어가는 독일인 과학자 테오도르와 동행 만두카를 실은 나룻배가 카라마카테 앞으로 도착한다. 이들은 재생의 유일한 방도로 여겨지는 식물 야크루나를 찾아 떠날 것을 제안한다. 카라마카테는 착취를 일삼는 백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지만 자연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신성한 식물을 찾는 여정에 오른다. 30여년 후, 테오도르가 남긴 밀림에 대한 기록을 들고 미국인 과학자 에반스가 찾아온다. 그의 목적도 하나, 야크루나를 찾는 것이다.

아마존의 풍광이 압도적이다. 흑백 화면은 밀림의 생동하는 기운을 묵직하게 전한다. 두 시대를 넘나들며 네명의 여행자들이 겪는 기이한 체험들이 영화의 기묘한 정서를 배가한다. 자연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여정을 추동하는 주술사 카라마카테는 가장 힘 있는 캐릭터이다. 불구가 된 고무 플랜테이션의 노동자, 종교의 이름으로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에 아마존에 가해진 잔혹한 폭력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제57회 칸국제영화제 예술영화상 수상.

<경계의 저편>

<경계의 저편> The Other Side

로베르토 미네르비니 / 이탈리아, 프랑스 / 90분 / 2015년 /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이탈리아인으로서 줄곧 미국 남부의 생활상을 주목해온 다큐멘터리스트 로베르토 미네르비니의 신작. <두근대는 심장을 멈추고>(2013)를 마지막으로 ‘텍사스 3부작’을 마치고, 루이지애나의 사람들에 카메라를 돌렸다. <경계의 저편>의 과반을 차지하는 건 마크와 그의 애인 리사의 황폐한 삶이다. 국가 시스템의 일부가 되지 못한 그의 일상은 단순하다. 마약을 팔거나 직접 투여해 환각에 취하고, 리사와 함께 정사를 나눈다. 이 대목들은 다큐멘터리로서 촬영이 가능했을까 싶을 만큼 가깝게 찍혔다. 더한 충격은 마크가 임신부인 스트리퍼에게 마약을 놔주고, 그녀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비추는 시퀀스에서 온다. 눈감고 싶어지는 순간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마크가 리사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병든 어머니를 성심껏 보살필 때 종종 뭉클함도 따른다. 마지막 30분은 한 무리의 예비군들에게 할애된다. 마크의 흔적이 갑자기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은 훈련을 하고, 해변에서 방탕한 파티를 즐기고, 미국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마크와 예비군 무리 사이의 교점은 오바마를 향한 경멸이 유일하다. ‘텍사스 3부작’을 촬영한 디에고 로메로가 이번에도 카메라를 잡았다.

신성주목

<사울의 아들>

<사울의 아들> Son of Saul

러슬로 네메시 / 헝가리 / 2015년 / 107분 / 월드 시네마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고,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사울(게저 로흐리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손더코만도’(가스 실험으로 살해된 수용자들의 시체를 나르던 잡역부를 일컫는 말)다. 가스 실험 때문에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수용소 안에서 그는 자신의 아들로 보이는 시체 한구를 발견하고 흥분한다. 사울은 그의 시체를 제대로 묻어주기 위해 생사를 걸고 수용소 안팎을 숨가쁘게 오간다.

<사울의 아들>은 형식적으로 기존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과 여러모로 다르다. 잔인한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희생자의 죽음을 전시하는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그때 그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화면비가 4:3인 데다가 카메라가 사울의 클로즈업숏과 시점숏만으로 이야기를 펼쳐내고, 화면 밖의 울부짖음과 수용소 소음이 시끄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영화 속 아우슈비츠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극히 제한된 이미지와 사실적인 사운드만으로 관객은 영화 속 공포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칸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참신한 형식 때문만은 아니다. 사울이 시체를 묻기 위해 수용소를 탈출할 궁리를 하는 과정에서 앞뒤를 가리지 않는 행동들을 하는데, 그게 살아남은 동료들을 종종 위험에 빠뜨리는 까닭에 윤리적인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흥미로운 건 사울은 여느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이다. 나치의 감시를 피해가며 아들의 시체를 묻으려고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것도 그래서다. 극한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음에도 그가 목숨을 걸고 아들의 시체를 묻으려고 하는 건 그에게 생존만큼이나 절박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자신의 스타일을 힘껏 밀어붙이는, 신예다운 힘과 패기가 있는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헝가리 출신의 러슬로 네메시는 <비전스 오브 유럽>(2004)과 <런던에서 온 사나이>(2007)에서 벨라 타르의 연출부로 일한 적이 있으며, <사울의 아들>이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아빠>

<아빠> Babai

비사르 모리나 / 독일, 코소보, 마케도니아, 프랑스 / 2015년 / 104분 / 플래시 포워드

코소보 국경지대에서 검문을 받던 게짐은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라는 검색 대원의 말에 순순히 응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게짐도 생각지 못했던 인물, 10살 소년이 타고 있다. 다름 아닌 게짐의 아들 노리다. 노리는 절대로 자신을 혼자 두고 아빠만 떠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게짐을 빤히 쳐다본다. 부자는 먼 친척 집에 얹혀살며 거리에서 담배를 팔아가며 겨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게짐은 또 한번 노리를 두고 홀로 독일로 향한다. 노리는 삼촌이 귀하게 여기는 장총을 팔아 돈을 벌어 아빠를 찾아갈 생각이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겨우 독일로 간 노리는 아빠와 재회한다.

게짐과 노리 부자는 발칸전쟁 이전의 코소보에서 가난과 비탄에 빠져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초상이다. 먹고살기 위해 아들을 버리고 유럽으로 향한 아버지의 피곤함과 그런 아버지를 고집스레 쫓아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일은 안타깝다. 특히 이들 부자는 거리를 걸을 때면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걷는다. 아들은 앞서가는 아빠의 뒤통수를 보며 “아빠! 아빠!”라고 부르지만 이들의 사이는 영영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코소보 태생의 감독 비사르 모리나가 만든 장편 데뷔작으로 올해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무스탕>

<무스탕> Mustang

데니즈 감제 에르구벤 / 프랑스 / 2015년 / 97분 / 플래시 포워드

교복 차림의 다섯 소녀가 바다로 뛰어든다. 한바탕 물놀이를 한 이들은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고 도망친다. 들뜬 얼굴로 숨을 고르는 소녀들에게 이들의 할머니가 다가와 매질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혼난 이유는 사과를 훔쳐 먹어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남자아이들과 목마를 타고 놀았기 때문이다. 소나이, 셀마, 에체, 눌, 랄레. 주체할 수 없는 생기로 빛나는 다섯 자매는 전통과 규율을 강조하는 가정에서 살고 있다. 바다에서의 일로 이들은 집 안에 갇힌다. 소녀들이 ‘감옥’과 ‘정신병원’ 같은 집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이들의 방을 두르고 있는 창살은 촘촘해진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어른들의 구속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이들을 짓누르고, 다섯 자매는 각자 결단을 내린다. 강제결혼과 같은 구시대적 관습이 상존하는 현대 터키의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가정을 탈출하려는 소녀들의 고투가 극 내내 긴장감을 유발한다. 바깥공기 한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소녀들의 현실과 달리 창틈으로 유유하게 새어드는 햇볕이 만드는 따뜻한 톤의 화면이 인상적이다. 7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베니스 데이즈 초청, 68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 유로파 시네마 레이블상 수상.

<램스>

<램스> Rams

그리무르 하코나르손 / 아이슬란드 / 2015년 / 93분 / 플래시 포워드

아이슬란드 산중턱엔 양떼를 기르며 모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양털과 양젖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한번씩은 서로의 양들을 견주어보는 일로 낙을 삼는데, 그중에서도 농부 굼미와 키디 형제의 양들의 기량이 단연 발군이다. 그래서인지 형제는 40년 이상을 남처럼 지낼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다. 어느 날, 의문의 바이러스가 마을을 덮쳐 대부분의 양들이 폐사한다. 굼미는 양들을 따로 빼내 지하실에 숨겨 키우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굼미가 몰래 양을 키우고 있었단 사실이 드러난다.

별것 아닌 소동극처럼 시작한 영화는 무시무시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초반부엔 손때 묻은 가구, 보풀이 일어난 색색의 스웨터 같은 것들이 마을의 무드를 만든다. 한적한 농촌에서 나이 든 농부들이 벌이는 신경전은 그저 귀여워 보인다. 자연광을 사용한 화면도 사랑스럽다. 와이드 스크린에 담아낸 아이슬란드 농경지의 풍광은 아늑하지만 때로 위압적이다. 영화는 단출하지만 조명과 음악이 분위기를 조율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음악감독 아틀리 오바르손은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2007)의 음악편집을 맡았고, <헨젤과 그레텔: 마녀 사냥꾼>(2013)의 음악감독이었던 작곡가다.

<소통과 거짓말>

<소통과 거짓말>

이승원 / 한국 / 103분 / 2015년 / 뉴 커런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남녀가 주인공이다. 직장 동료들과의 성관계가 상사한테 까발려지면서도 태연한 여자, 다산콜센터에 옆집 개가 자신을 노려보니 그 사실을 주인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남자. 같은 보습학원에서 일하는 그들을 잇는 건 섹스가 전부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고 평범하지 않은 섹스를 나눈다. 둘은 방 안에 갇혀 ‘행위’가 끝난 후에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있다. <소통의 거짓말>은 많은 부분 벌거벗은 사람을 비추지만, 그곳들에는 기쁨이 끼어들 틈이 없다. 주인공들이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부터 등장하는 과거 신들은 그들의 기행이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하지만 느닷없이 뭉텅뭉텅 배치되어 그들의 감정을 애써 해설하는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온전히 두 사람 사이의 건조한 관계만을 강조한다. 흑백과 4:3 비율로 찍힌 영화는 인물이 놓인 공간은 배제한 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결국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서글픈 모습을 기억하게 한다. 주로 연극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이승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크리샤>

<크리샤> Krisha

트레이 슐츠 / 미국 / 82분 / 2015년 / 플래시 포워드

알코올중독에 빠져 연락도 없이 자취를 감췄던 크리샤는 가족의 추수감사절 식사에 맞춰 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이 나아졌음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오붓했던 분위기는 점차 어두워져 간다. 간결한 제목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온전히 크리샤라는 중년여인을 집요하게 쫓는다. 크리샤의 얼굴로 천천히 들어가는 기괴한 오프닝(클로징 역시 비슷하게 찍혀 대구를 이룬다)을 지나면, 그녀가 도착해 집을 헤매다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롱테이크가 따라온다. 트레이 슐츠의 첫 장편영화 <크리샤>는 가시적인 테크닉으로 금세 관객의 눈을 홀린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는 그녀가 끝내 자신의 증상을 이기지 못하고 불화를 부풀리는 과정을 담은 영화는 시각적인 쾌감뿐만 아니라, 재기 넘치는 사운드 활용을 통해 인물 안에 떠도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한다. 밴드 더티 프로젝터스의 드러머 브라이언 매콤버가 만든 ‘소리’는 폴 토머스 앤더슨 근작들의 조니 그린우드와 <언더 더 스킨>의 미카 레비의 성과에 비견할 만하다. 주인공 역에 트레이 슐츠의 이모 크리샤 페어차일드를 비롯해 감독의 가족들이 대거 배우로 참여했다.

장르탐닉

<디판>

<디판> Dheepan

자크 오디아르 / 프랑스 / 2015년 / 109분 / 월드 시네마

자크 오디아르의 건재함을 전세계에 알린,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정부에 맞서 반군으로 활동하다 프랑스로 망명한 한 남자를 조명한다. 그는 수년 전 사망한 ‘디판’이라는 외국인의 여권을 사용해 프랑스로의 불법 이민을 시도한다. 그가 추방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스리랑카에서 함께 망명한 생면부지의 여자, 소녀와 함께 가족인 척 행세하는 것이다. 이 세명의 위장 가족은 프랑스 근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왔건만 프랑스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다. 지역 갱단과 우연한 계기로 얽히게 되면서 디판과 그의 가짜 가족은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상 주인공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디판’이라는 이름처럼, 이 영화는 모든 것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 디판의 ‘가짜’ 삶이 진정성을 얻게 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살아남기 위해 뭉쳤던 디판의 가족은 어느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존재가 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드라마의 극적인 고양을 위해 멜로와 액션 장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자크 오디아르의 연출력이다. 후반부의 긴박감 넘치는 액션 신에서는 <예언자>(2009)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유대를 그린다는 점에서는 <러스트 앤 본>(2012)이 다시금 떠오른다.

<화려한 샐러리맨>

<화려한 샐러리맨> Office

두기봉 / 중국, 홍콩 / 2015년 / 117분 / 아시아영화의 창

10억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아 주식공개상장(IPO)을 앞두고 있는 기업 ‘존스&선’. 누구나 선망하는 곳이지만, 이곳의 현실은 <모던타임즈>(1936)의 공장과 다를 바가 없다. 직원들은 같은 색깔의 정장을 입고,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줄의 책상에 줄지어 앉아 톱니바퀴처럼 일을 하다가 제각기 다른 시간에 퇴근한다. 첫 출근한 리시앙(자의)과 캣, 신입사원 두명도 예외는 아니다. 장 사장(장애가)이 신뢰하는 데이비드(진혁신)는 매일 야근하는 여자 소피(탕웨이)와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날, 호 회장(주윤발)은 그의 정부이기도 한 장 사장에게 1대 주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회계감사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억지로 봉합해놓았던 일들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장애가가 시나리오를 쓴 <화려한 샐러리맨>은 할리우드영화 <성공시대>(1967)를 떠올리게 하는 뮤지컬영화다. 두기봉 감독이 최근의 <단신남녀> 시리즈를 포함한 로맨틱 코미디를 오래전부터 만들어온 건 익숙하지만, 뮤지컬 장르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윤발, 장애가, 진혁신, 탕웨이 등 출연진 역시 화려하다. 특히 <행운의 별>(1989), <우견아랑>(1989) 등 두기봉 감독의 전작에서 짝을 이뤘던 주윤발과 장애가가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건 반갑다. 영화는 회사의 부속품으로서 노동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처지를 풍자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씁쓸하다. <화려한 샐러리맨>은 리먼 사태 이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홍콩 직장인들의 불안감을 뮤지컬 장르로 신선하게 풀어나간 작품이다

<전사 바후발리>

<전사 바후발리> Baahubali: The Beginning

라자물리 스리 사이랄스리 / 인도 / 2015년 / 137분 / 오픈 시네마

인도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한 이야기를 2부작 영화로 각색한 판타지액션영화다. 마하바라타라는 생소한 서사시를 몰라도 감상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전사 바후발리>는 바후발리라는 한 영웅의 신화를 화려한 춤과 노래 그리고 스펙터클로 포장한 작품이다. 폭군 발랄라가 지배하고 있는 인도 고대 국가 마히쉬마티,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시부두(프라바스)는 어릴 때부터 힘이 남달라, 자칫 발을 잘못 디뎌 계곡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죽을 수 있는데도 계곡의 바위와 바위 사이를 뛰어넘는다. 성장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고, 발랄라에 맞선다. 인도영화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약 3800만달러가 투입된 만큼 서사의 규모가 어마어마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톨리우드(뭄바이의 발리우드처럼 남인도 영화계를 지칭하는 말)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스타가 된 프라바스가 연기하는 영웅 역시 꽤 매력적이다. 이 영화는 힌디어가 아닌 텔루구어와 타밀어로 제작된 까닭에 비힌디어영화로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넘어섰으며, 2016년 2부작이 극장 개봉한다.

<아름다운 계절>

<아름다운 계절> Summertime

카트린 코르시니 / 프랑스 / 2015년 / 105분 / 월드 시네마

시골에서 트랙터를 몰며 농사일을 하던 델핀은 1971년 무작정 파리로 향한다. 대학생이 된 그녀는 학교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하여!”를 외치는 여성 동지들을 만난다.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토론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사고하며 생각한 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중에는 리더십 강한 카롤도 있다. 델핀은 카롤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 마음을 전한다. 남자친구가 있는 카롤은 델핀의 마음이 당황스럽지만 곧이어 그녀 역시 델핀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서 카롤은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그사이 델핀이 급히 고향에 내려가게 되자 카롤은 그녀를 찾아간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 몰래 카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델핀은 못내 불안하다. 도시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농촌 사회에서 행여나 자신의 성정체성이 의심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1970년대 유럽 사회에서 비롯된 여성주의 운동의 단면을 멜로드라마 안으로 끌어왔다. 델핀과 카롤 중 어느 한쪽의 심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둘의 관계에서 각각 겪는 갈등을 균형감 있게 그렸다. 사랑에 눈뜨며 성숙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오렌지 캔디>

<오렌지 캔디> Orange Candy

비주 비스와나스 / 인도 / 2015년 / 90분 / 아시아영화의 창

길 위에서 벌어지는 요란한 소동극. 응급 구조사인 사티야에게 심장발작 환자의 구조 요청 전화가 걸려온다. 고생 끝에 오지에 있는 환자의 집을 찾지만 환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구조진을 맞는다. 괴팍한 환자 카일라삼은 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사티야와 응급차 기사 카브야의 속을 긁는다. 셋을 태운 응급차는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 카일라삼은 입원이 필요한 시한부 환자이다. 설상가상으로 눈앞에서 돈까지 도둑맞는다. 카일라삼이 안쓰러웠던 사티야는 그를 목적지까지 태워주기로 하고, 둘은 다시금 길 위에 오른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카일라삼과 그에게 당하고선 얼굴을 붉히는 인물들의 대비가 웃음을 자아낸다. 카일라삼이 불현듯 차를 멈춰 세운 뒤 도로 한가운데에서 무표정으로 정체 모를 춤을 춰대는 장면은 압권이다. 작정하고 웃기려는 장면인데 생경하고 역동적인 몸짓이 사라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사티야와 카일라삼은 결여된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를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유사 부자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둘의 관계변화가 다소 급하게 이뤄져 설득력을 담보하지 못한다. 1999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을 맺어온 비주 비스와나스 감독의 2015년 신작.

규정불가

<더 랍스터>

<더 랍스터> The Lobster

요르고스 란티모스 / 영국, 그리스, 아일랜드 / 2015년 / 118분 / 월드 시네마

<송곳니>로 2009년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수상했던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더 랍스터>는 그리스어 영화를 만들던 그가 할리우드 스타 콜린 파렐, 레이첼 바이스, 프랑스 배우 레아 세이두 등과 작업한 첫 영어영화이기도 하다. 시공간을 알 수 없는 세계가 배경이다. 파트너가 없는 사람들은 격리된 호텔에 수감되어 제한된 시간 내에 그 안에서 ‘짝’을 찾아야 한다. 짝을 찾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동물로 변해 숲으로 방출되고, 더 강한 동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사냥당한다. 이 음울한 호텔 101호에 새 입주자, 데이비드(콜린 파렐)가 들어온다. 그는 어떻게든 파트너를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탈출을 시도한 그는 한 여자(레이첼 바이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세계에서는 ‘규칙’이 중요하다.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관습적으로 따르는 규칙 말이다. 감독이라는 창조자가 일상의 질료를 새롭게 조합해 만들어낸 이질적인 세계에서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는 <더 랍스터>의 인물들은, 역으로 규칙의 부조리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특히 ‘101호 남자’를 연기한 콜린 파렐의 모습은 더없이 이질적이다.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이 영화에 콜린 파렐이 나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 그 모습이 묘하게 <그녀>의 호아킨 피닉스와 닮았다.

<아야즈의 통곡>

<아야즈의 통곡> Immortal

하디 모하게흐 / 이란 / 2015년 / 90분 / 뉴 커런츠

노인 아야즈는 운전자인 자신의 실수 때문에 버스에 탄 가족 모두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가 삶에 미련을 버리고 자꾸 어디론가 떠나려 할 때마다 어린 손자 아브라함은 그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런 할아버지를 향해 윽박지르고 울부짖기도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야즈는 길에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발이 찢어져 온전히 걷지 못해도 계속 집을 떠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야위어가는 아야즈는 자연히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란 감독 하디 모하게흐의 두번째 장편인 <아야즈의 통곡>은 아야즈가 떠나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돌아오는 과정의 변주가 영화를 이끌지만, 반복의 지루함에 빠지지 않는다. 단조로운 드라마들 사이로 등장하는 뛰어난 비주얼이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는 동네의 곳곳이 불타는 장면들은 그 모습 자체로도 기묘한 스펙터클을 안기고, 아브라함의 여자친구가 만들어내는 따스한 공기는 영화의 명도를 때마다 조정한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하던 아야즈가 거동이 불편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오고서도 그를 정성으로 돌보는 아브라함의 우직함은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나라없는 국기>

<나라없는 국기> A Flag without a Country

바흐만 고바디 / 이라크 / 2015년 / 97분 / 아시아영화의 창

쿠르드 지방의 에르빌에서 태어난 나리만 안와르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오랜 꿈이었던 비행기 제작에 돌입한다. 몇대의 비행기를 손수 만들어 하늘에 띄운 나리만은 쿠르드 항공사에서 어린이들에게 파일럿 교육을 하고 있다. 나리만은 항상 “인간애에 바탕한 파일럿이 될 것”을 강조한다. 쿠르드족 출신의 헬리 루브는 어린 시절 터키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 핀란드로 망명한다. 핀란드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해 현재는 미국에도 진출했다. 팝스타가 된 뒤로는 반전을 노래하며 쿠르드족 난민 구호에도 힘쓰고 있다. 이라크 정부군과 연합해 ‘IS’를 상대로 싸우는 민병대 페쉬메르가(Peshmerga)의 대원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나리만과 헬리 루브의 이야기를 교차로 소개한다. 자연스레 삽입된 헬리 루브의 뮤직비디오는 영화의 기운을 돋운다. 다리를 다친 전직 파일럿 나리만은 쿠르드인들의 미래를 교육하고, 젊고 건강한 헬리 루브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쿠르드인의 현재를 엮는다. 하지만 멀리 ‘IS’의 폭격이 시작되고, 나리만과 헬리 루브는 전장으로 향한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가고, 청년들을 태운 군용차량은 지평선 너머로 떠난다. <나라없는 국기>는 줄곧 쿠르드인들의 정신과 인권에 대해 말해온 바흐만 고바디의 반전영화이자 나리만과 헬리 루브의 전기영화이며, 세계의 평화를 노래하는 음악영화이기도 하다.

<20세기 프로젝트>

<20세기 프로젝트> The Project of the Century

카를로스 킨텔라 / 쿠바, 아르헨티나, 독일 / 2015년 / 100분 / 플래시 포워드

애인과의 이별에 괴로워하던 레오나르도는 한때 잘나가던 엔지니어였던 우울한 아버지와 모든 사람들과 싸울 준비가 돼 있는 신경질적인 할아버지가 사는 고향 주라구아로 향한다. 쿠바 출신 감독 카를로스 킨텔라의 <20세기 프로젝트>는 다큐멘터리의 영향이 물씬한, 느슨한 극영화다. 중심이 되는 공간인 주라구아는 1980년대 피델 카스트로 집권 당시 쿠바 정부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던 곳이다. ‘세기의 작품’이라 기대를 모으던 프로젝트가 소련이 붕괴되자, 카스트로는 1992년 건설을 중단했다. <20세기 프로젝트>는 영광이 고스란히 살아 있던 당시의 여러 푸티지들을 적극 활용하면서, 삼대에 걸친 가정의 미시사와 대표적인 공산주의 국가가 무너지는 20세기 말의 거시사를 포개어놓는다. 대부분 흑백 화면을 유지하던 영화는 쿠바의 선전 영상만을 컬러로 사용했다. 색채 없이 건조하게 이어지는 세 남자의 일상에 희망찼던 과거의 순간들이 끼어드는 양상이 얄궂게 느껴진다면 카를로스 킨텔라의 어두운 농담이 통했다고 봐도 좋겠다. <20세기 프로젝트>는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공동수상했다.

대중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바닷마을 다이어리> Our Little Sister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일본 / 2015년 / 128분 / 갈라 프레젠테이션

영화 스틸만 보아도 해사해지는 느낌이다. 아야세 하루카와 나가사와 마사미, 가호와 히로세 스즈 등 일본의 톱스타와 촉망받는 여배우들이 네 자매로 출연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영화로 분류될 작품이다. 일본의 바닷마을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네 자매의 사랑과 우정, 비밀스러운 마음들을 들여다보는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버전의 <작은 아씨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오래전 자매를 버리고 다른 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장례식에 세 자매가 참석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매들은 장례식장에서 그녀들의 배다른 자매인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스즈의 어머니와 헤어진 아버지는 또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기에, 큰언니 사치(아야세 하루카)는 마음 둘 곳 없어진 열세살 소녀 스즈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 사치와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치카(가호)는 스즈와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네 자매는 한 지붕 아래 동거를 시작한다.

요시다 아키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원작의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주목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영락없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장이 느껴진다. 특히 그는 큰언니 사치와 막내 스즈의 사연에 주목한다. 각자의 이유로 자매들에게 소홀했던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맏이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결과의 산물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막내는 자신의 속내를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이들이 새롭게 형성된 관계 안에서 과거를 극복하고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영화는 사려깊게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주요 등장인물의 죽음을 거쳐 또다시 아버지의 1주기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곳곳엔 죽음이 맴돌고 있다. 하지만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 뒤에 남겨진 이들이 새롭게 써내려갈 발자취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치어 요리, 매년 연례행사처럼 담그는 매실주를 함께 음미하며 자매들은 사라진 이들과의 추억을 안고 누구와도 같지 않은 생의 발자국을 아로새겨나간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치킨>

<치킨> Chicken

조 스티븐슨 / 영국 / 2015년 / 86분 / 플래시 포워드

지체장애인인 리처드는 무뚝뚝한 형 폴리와 함께 트레일러에 살고 있다. 리처드는 폴리가 자는 동안 식사 준비를 하고, 폴리가 일을 하러 나가면 숲속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리처드의 숲속 친구들은 피오나라 이름 붙인 닭 한 마리와 동물의 사체들이다. 리처드는 종종 동물의 사체를 주워와 헛간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그들과 상상 속의 티파티를 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트레일러를 세워둔 땅이 새 주인에게 팔리면서 리처드와 폴리의 보금자리가 위협받는다. 폴리는 자신의 상황에 점점 스트레스를 받고, 종종 리처드에게 그 분노를 푼다. 리처드는 폴리의 구타를 피해 숨을 곳을 찾던 중 낯선 소녀 애나벨을 만난다. 리처드가 처음으로 사귄 사람 친구가 형제의 소중한 집을 위협하는 사람의 딸이라는 사실, 리처드와 애나벨이 가까워지는 동안 피오나가 소외되고 있다는 것, 폴리의 스트레스가 고조되는 지점들이 점차 긴장을 쌓아간다. 리처드는 폴리가 발설한 형제의 비밀을 알게 되며 고통스러운 성장의 순간을 맞이해야만 한다. 리처드의 감정의 격랑은 보는 이의 마음을 거칠게 흔든다. 리처드의 순수함과 야생성을 놀라운 연기로 표현한 신예 스콧 챔버스의 공이 크다.

<블랑카>

<블랑카> Blanka

하세이 고키 / 2015년 / 이탈리아 / 77분 / 아시아영화의 창

블랑카는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좀도둑질로 살아가는 떠돌이 소녀다. 우연히 TV에서 입양을 장려하는 광고를 접한 뒤 어른들이 아이를 입양하듯 자신도 돈을 벌어 엄마를 사겠다는 꿈을 품는다. 그러고선 눈먼 거리의 악사 피터를 만나 더 큰 도시로 향한다. 피터의 반주에 따라 노래를 하던 블랑카는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다. 덕분에 블랑카는 피터와 함께 작은 바에서 고정적으로 노래를 하게 되지만 주변의 모함과 질투로 금세 쫓겨나고 만다. 도시에는 여전히 블랑카를 향한 검은 손길들이 가득하다. 어린아이가 우연히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성장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하지만 길 위에서 낱낱의 개체로 존재하던 이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과정은 충분한 감동을 안긴다. 출중한 노래 실력으로 이미 유튜브에서는 스타로 자리매김한 시델 가부테로가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ACF 후반작업지원펀드로 완성된 작품이다. 7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소리소 디베르소(Sorriso Diverso)상과 란테르나 마지카(Lanterna Magica)(CGS)상을 수상했다.

<세 도시 이야기>

<세 도시 이야기> A Tale of Three Cities

장완정 / 중국 / 2014년 / 130분 / 아시아영화의 창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직후인 1951년의 영국령 홍콩, 웨롱(탕웨이)은 거리에서 주전부리를 팔다 검문에 걸려 경찰에 체포된다. 체포된 웨롱은 중국 국민당의 밀정으로 일하다 도피해 홍콩 경찰로 위장 중이던 다오롱(유청운)에게 인계된다. 홀로 두 아들을 책임지고 있는 다오롱은 남편과 사별하고 거리를 전전하며 어렵사리 두딸을 키우는 웨롱의 처지가 안돼 보여 그를 풀어준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지고, 안휘성으로 이주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공산당을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다오롱의 입장에서 새 가족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둘의 인연은 역사의 파도에 휩쓸릴 운명에 놓인다.

두 남녀의 이별과 만남을 통해 중국 현대사의 혼란기를 짐작게 하는 장대한 멜로드라마다. 메이블 청이 2003년에 연출한 다큐멘터리 <용의 흔적: 성룡과 그의 잊혀진 가족>에서 더 깊숙하게 들어간 이야기로, 배우 성룡의 부모님이 서로를 만나게 된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며 놀랍게도 영화 내용의 대부분이 실제 있었던 일이다. 주제곡 <영원한 미소>는 탕웨이가 직접 불렀다. 중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신예 정백연도 웨롱의 친구와 사랑을 키우는 다오롱의 동지 역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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