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 알았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러 간 관객은 극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떠오르는 제목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를 보고 내심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약 56분 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표제로 영화가 새롭게 시작할 때 다시 놀라는 동시에 납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하! 우리의 머리는 부쩍 분주해지고 감각은 고양된다.‘지금’은 언제고 ‘그때’는 언제지? 뭐가 다르지? 뭐가 틀린 거지? 오랫동안 그래왔듯 홍상수 감독은 이 개념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못박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연을 포함해 생동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고정할 수 없는 기운을 끌어들여 영화를 방어한다. 그리하여 ‘비대칭 데칼코마니’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모퉁이에는 따뜻한 감동이 기다리고 있다.
홍상수 영화의 숙련된 관객이라 자부하는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듣게 될지 얼마간 ‘알고’ 객석에 앉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날 것이고, 아마도 구애의 시도가 있을 테고, 취기에 휩싸여 다르게 사는 법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편안한 롱테이크가 일정한 보폭으로 만드는 흐름에 온화한 패닝과 줌이 완급을 주고, 간소한 음악이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오붓한 거리를 간간이 일깨울 것이다. 감독 본인에게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관객에게도 이미 아는 것들과 다시 만나 기적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는 여행이다. 대개 신작의 새로움을 규정한 요소는 넓은 의미의 구조였다. 같은 배우가 같은 이름으로 연기하는 인물의 동일성 없이 움직이는 세계도 있었고(<옥희의 영화>), 환경과 주변 인물은 같은데 주인공의 정체성만 다른 이야기도 있었고(<다른나라에서>), 시퀀스를 뒤섞어 아예 시간 감각을 배제한 세계의 상을 체험시키는 시도도 있었으며(<자유의 언덕>), 직진하는 두개의 시간축이 따로 구역을 갖지 않고 교차해버리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북촌방향>). 이처럼 상투성을 멀리하며 생의 체험을 영화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꿈, 영화, 일기, 편지의 형식이 초대되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홍상수 영화는 마지막 순간 핸들을 꺾어 도식을 튕겨냈다. <자유의 언덕>풍으로 말하자면 홍상수의 편지는 언제나 한장이 사라진 채 도착함으로써 무한대로 발산했다. 이야기를 온전히 장악하려는 저자의 의지를 배제하는 태도, 지어낸 것보다 이미 주어져 있거나 매일 주어지는 현상을 영화에 귀하게 쓰는 원칙, 그리고 감독의 직관을 활발하게 유지하는 규율이 이 어려워 보이는 저항을 가능하게 했다.
가장 물렁물렁하고 하늘하늘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차이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구조는, 구조라고 말할 것도 없는 두개의 직선이다(‘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첫 번째 1박2일을 편의상 1부로,‘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명명된 두 번째 여정을 2부로 부르기로 한다). 동일한 인물들이 만나 대동소이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과정이 반복된다. 두 이야기가 흘러가는 차원은 평평하다. 인물들은 꿈을 꾸거나 졸지도 않는다. 영화 전체를 퍼즐로 받아들이게 했던 바로 앞 영화 <자유의 언덕>과 대조적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경험과 감흥의 현저한 차이를 낳는 변수는 구조가 아니라,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미세하게 다르게 대처하는 인물의 말과 몸짓, 표정, 감정의 흐름이다. 말하자면 가장 물렁물렁하고 하늘하늘한 것들이 차이를 생산한다. 그래서 자세히 말할 수밖에 없다.
일정을 잘못 전달받은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는 ‘관객과의 대화’보다 하루 일찍 수원에 도착한다. 정해진 일과가 없는 하루. 수원 화성행궁을 서성이던 남자는 가장 마음에 흡족한 장소 복내당 툇마루서 쉬다가 바나나 우유를 먹는 여자를 만난다. 지금은 그림 그리는 일만 하며 사는 그녀는 윤희정(김민희)이다. 둘은 함께 화실까지 가고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에 훌륭한 의미를 부여하며 칭찬한다. 이어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를 완전한 남자, 여자라고 부르기에 이른 둘은 윤희정의 선배네 카페로 옮겨 술을 더 마신다. 그런데 동석한 아는 언니(최화정)의 질문으로 윤희정은 함춘수의 좋은 조언이 본인 영화에 대한 평소 인터뷰의 반복임을 발견하고, 이어 그가 바람둥이로 소문난 기혼자임을 듣게 된다. 윤희정은 실망과 수치를 느끼고 남자는 초라하게 돌아간다. 2부에서도 똑같이 함춘수는 복내당에서 윤희정을 만나고 화실과 이자카야를 거쳐 카페까지 동행한다. 그런데 1부에서 윤희정에 대한 함춘수의 접근이 습성처럼 보였다면 이번에는 훨씬 강한 끌림으로 보이고 그래서 여자에게 더 진실하게 대하려고 성의를 기울이는 듯하다. 1부의 함춘수는 “너무 잘 알 것 같다”는 맞장구를 남발하고 자기 그림에 자신이 없는 윤희정을 ‘외워둔’ 말로 다독인다. 그녀를 좋아하지만 결혼은 못할 처지임을 궁지에 몰릴 때까지 밝히지 않다가 품위를 잃는다. 반면 2부의 함춘수는 냉정한 평으로 여자에게 도움을 주려다 처음에는 상처를 입히지만 그로 인해 신뢰를 얻는다. 여기서부터 둘의 감정이 기초한 토대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이어 이자카야에서 그가 결혼 사실을 밝히자 윤희정은 멈칫한 다음 웃으며 섭섭하다고 말한다. 서운하다는 여인의 반응에 울면서 좋아하는 정재영의 연기는 올해 최고의 희비극 연기다.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나 그의 슬픔과 환희는 진짜다. 둘은 길에서 주운 (결혼) 반지로 순간의 진심을 확인하고 이튿날 윤희정은 함춘수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러 온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1부와 2부의 관계는 규정하기 어렵다. 제목이 부르는 착시처럼 과거와 현재도 아니고, 따라서 인과일 수 없으며 ‘남루한 현실 vs. 소원 성취의 판타지’도 아니다. 같은 상황을 찍는 1, 2부의 카메라 위치가 일부 바뀌지만, 인물의 시점이나 반대 앵글의 시야를 드러내는 배치는 아니고 그저 살짝 각도를 트는 정도다. 하물며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특정한 선택을 분기점으로 운명이 갈리는 한쌍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운명처럼 보이는 순간이 하나 있긴 하다. 1부에서 함춘수가 관광객을 피해 복내당을 벗어나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더니 우향우하여 윤희정과 만나게 될 복내당으로 돌아가는 숏이다. 그때 남자를 결단시킨 힘은 “역시 아까 거기가 제일 예쁘네” 정도의 감흥이었을 터다. 어쩌면 딱 그만큼이 홍상수 감독이 긍정하는 상위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도록 하는 우주의 움직임. 그다음부터는 전부 생활(生活)에 달린 것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1부와 2부는 그냥 ‘다른 나라’다. 홍상수 감독에게 두 이야기를 잇는 함수가 확정되는 것은 영화가 망하는 길이며, ‘두 나라’를 망가뜨리고 나아가 영화 바깥의 무수한 나라를 부정하는 일이다.
1부와 2부에서 그나마 두드러진 설계의 변화는, 함춘수의 생각을 들려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유무다. 1부의 함춘수는 상대적으로 많은 말에 둘러싸여 있다. 훌륭한 예술가다, 존경한다는 찬사를 곧잘 접하고, 보이스 오버 독백은 그가 품은 계획과 선입견, 준비된 명제들을 들려준다. 한편 표면으로만 존재하는 2부의 함춘수는 보다 직관적이고 순간에 충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1부의 함춘수는 속물이고 2부의 함춘수는 순수한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두 버전의 함춘수는, 똑같이 매력 있는 여성에게 어색하게 접근하는 유부남일 뿐이다. 1부의 윤희정은 허영덩어리고 2부의 윤희정은 원숙한가? 그렇지 않다. 두 이야기의 함춘수와 윤희정은 같은 성격과 같은 삶의 역사를 가진 동일한 인물이다. 두 버전의 틀리고 맞음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다만 공기 중의 무엇이, 커뮤니케이션의 미미한 차이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약간 굵은 감정의 덩어리를 빚고 그것들이 얼기설기 쌓여 인물의 동선까지 조금씩 틀어놓는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완전 딴판인 결론에 이른다. 어떻게 틀렸던 거지? 뭘 잘한 거지?
우리를 더 큰 자유와 조화로 인도할 신호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수원에서 14회에 걸쳐 촬영했고 2월9일에 크랭크업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장면 순서대로 촬영해서 주연인 김민희, 정재영 이외의 배우들은 두 차례씩 수원에 다녀갔다. 1부를 다 찍고 나서야 이야기의 원점으로 시침 떼고 돌아가 리메이크하는 구조를 확정한 홍상수 감독은 거의 처음으로 1부의 편집본을 두 배우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자는 조금 더 외롭다, 남자는 조금 더 솔직하다 정도로 2부의 안을 공유했다(68쪽 인터뷰 참조). 그리고 1부의 영향 아래에서 감독과 배우가 하루하루 2부를 쓰고 연기했다. 이는 두 세계가 서로에 대해 무지하며 무관하다는 설정과 불일치하는 방식 아닐까? 하지만 이 수준의 모방과 자유는,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기시감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홍상수 영화가 창조되는 방법론을 관객 앞에 어느 때보다 친절하게 제시하는 영화다. 이를테면 우리는 함춘수와 윤희정이 만난 사람들의 동선과 감정을 단서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던 3부, 4부, 5부… 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매우 교훈적이라는 감상을 굳이 회의할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는 예를 들면 ‘지금은이렇고그때는그렇다’가 아니라,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개념을 스스럼없이 제목에 포함시켰다. 극중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은 허튼짓을 조금 덜하고 마주한 타인에게 조금 더 정직해짐으로써 조금 더 바람직한 결과에 도달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모럴리스트 에릭 로메르와 퍼즐의 대가 찰리 카우프먼의 융합”으로 요약해온 일부 해외 평론가들이라면 “이번에는 로메르쪽!”이라고 서슴없이 한쪽 깃발을 치켜들지도 모른다. 유의할 것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교훈은 깨달았다고 자동으로 반복 준수할 수 있는 테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목록 따위는 없다. 살면서 하루씩 일기를 쓰듯 매번 내가 완성해야 하는 흐물흐물한 교훈이다. 문득 돌아본다. 홍상수의 영화가 존재하기 전에도 우리는 과연 이만큼 많은 생의 시간이 루틴(routine)의 반복으로 이뤄져 있음을 각성했던가? 삶은 한번 갔던 자리로 돌아가는 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윤희정의 말대로 “지키지 않을 것 같으면 무너질까봐 무서워서” 루틴을 엄수하기도 하고 “사는 느낌을 매일 확인하는 경험”에 기쁘게 자족하기도 한다. 반복 자체는 두려워할 저주도 안전한 성도 아니다. 분명한 진실은, 우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미덕과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행위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그런 우리의 집에 찾아와 아무것도 안 훔치고 발자국만 남기고 가는 영화다. 언젠가 윤희정의 집에 들었다는 도둑처럼. 아니다. 다시 들여다보니 발자국 말고도 남기고 간 것이 있다. 대동소이하게 반복되는 세계의 얇은 표면에 숨겨져 있는, 우리를 더 큰 자유와 조화로 인도할 신호들이다. 저 반딧불 같은 빛을 내가 정말 본 게 맞을까?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껌벅이는 찰나, 수원의 거리에 종이 울린다.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