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26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한 <사도>의 또 다른 주역은 음악이다. 전통 선율과 오케스트라의 만남으로 영화 속 정서를 고양시킨 <사도>의 음악 중, 단연 빛나는 것은 경문을 담아낸 ‘옥추경’과 ‘조상경’. 도입부에서부터 북소리, 징 소리와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외워 혼을 쏙 빼놓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화에서 소경박수 역을 연기한 배우 정해균 본인이다. 법사에게 수개월간 가르침을 받고 자나 깨나 경문을 외운 그는 현장과 녹음실에서 직접 연주와 노래를 했고, 이는 발매된 음원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정해균은 <내가 살인범이다>(2012)의 변태적 살인마 제이, <신의 한 수>(2014)의 야비한 하수인 아다리 등 특색 있는 역할로 눈도장을 찍은 배우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한국적 색채의 공연을 주로 선보이는 극단 여행자의 간판 배우이자 부대표이기도 하다. “연기와 무속은 비슷한 데가 있다. 연기는 순간적으로 몰입해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 끌어내는 일이다. 그 순간의 에너지는 무속인의 신력과도 닮아 있다”고 말하는 그다. 소경박수일 수밖에 없었던 배우 정해균을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도> ‘옥추경’의 인기가 대단하다. 생소할 수 있는 음악인데도 관객이 많이 찾더라.
=기술시사회 때 처음 영화를 봤는데, 도입부에서부터 내가 부른 노래가 나와 깜짝 놀랐다. (웃음) 정식 발매 전부터 네이버 지식인, 블로그 등에 ‘옥추경’이 뭔지 묻고 어떻게 알았는지 가사도 공유하고 있어 신기하더라.
-연기에서 더 나아가 직접 ‘옥추경’과 ‘조상경’을 부르게 된 까닭이 있나.
=이준익 감독님이 이건 “배우가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예를 들어, 무대에서 무용을 하는 것과 드라마 속에서 무용을 하는 건 다르다. 드라마 속에선 무용도 극적 구성이 된 상태로 연기와 연결되기 때문에 실제 공연과는 톤이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나도 직접 노래를 불렀고, 동시에 양손에 북과 징을 들고 연주했다. 내가 속해 있는 극단 여행자에서는 국악기를 연주하는 등 한국적 색채가 묻어나는 공연을 주로 한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국악에 대한 이해는 있는 상태였다.
-<사도>의 소경박수 역은 그런 자질 때문에 캐스팅된 건가.
=그렇진 않다. 이준익 감독님과는 그가 씨네월드 대표를 하던 시절 <공포택시>(2000)를 통해 제작자와 배우로 만났고, <황산벌>(2003)에선 감독과 배우로 만났다. 이후엔 연이 잘 닿지 않더라. 감독님이 <사도>를 만든다는 얘길 듣고 제작사로 찾아갔다. 배역이 있으면 아무거나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캐스팅보드에 소경박수 역만 비어 있는 거다. (웃음) “제가 박수무당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대사 한마디도 없이 경만 하는 캐릭터라고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 그렇게 소경박수를 맡긴 데는 얼마간의 믿음도 있었을 거다. 감독님이 내가 출연한 극단 여행자의 공연을 보신 적이 있으니 말이다.
-기본기가 있다고 해도 경을 읊는 건 처음이지 않았나.
=제작사에서 법사님을 소개해줬다. 배운 뒤 녹음한 걸 들으면서 혼자 연습을 하고, 법당을 주기적으로 찾아가 점검을 받았다. 법사님은 목소리가 트여야 하니 노래방에 가서 하라고 했는데, 큰 소리로 연습을 하려니 옆방 눈치가 보이더라. 극단 연습실이 비는 아침마다 연습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조깅하면서도 외웠다. 누가 옆에서 지나가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웃음) 그렇게 연습하니 나만의 색으로 경을 욀 수 있게 되더라.
-소경박수의 경은 어떤 것이었나.
=서너 시간짜리를 2분으로 압축하는 만큼 강하게 표현하려 했다. 난 2분짜리 박수다. (웃음) 그러나 경을 통해 주는 감정만큼은 실제와 같게 가려고 했다. 법사님은 경을 읊는 건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 <사도>에서 소경박수 역시 사도세자에게 위안을 건네는 입장이다. 감독님이 말씀하길, 사도세자가 가장 가까이 두고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며 속엣말까지 건넨 이는 소경박수였을 거라고 하더라. 사도의 정서에 이입해 그의 한을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경박수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경을 외는데, 그건 악귀를 쫓는 경이 아니라 사도를 비롯해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위한 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1998년 극단 여행자에 입단했다. 한국적 색채의 공연을 많이 하는 극단이다. 2003년 카이로국제실험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연 카르마>가 그 색깔을 지니게 된 시초다. 사람이 나고 자라고 결혼하고 죽어가는 네 가지 테마를 대사 없이 표현하는 공연인데, 입관하고 무덤에 흙을 달구질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따로 배울 길이 없어 녹음을 해서 무작정 따라 불렀다. 이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공연하는 등, 유럽부터 중남미까지 해외 공연을 다녔다. 해외 페스티벌에 가면 비언어극을 많이 보게 된다. 배우도 몸짓과 표정을 활용하고 관객도 더 집중한다. 영화도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지 않나. 지문으로만 나와 있는 게 대사보다 큰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영화는 연극보다 도망갈 데가 없다. 스크린은 왜 그렇게 큰지. (웃음) 클로즈업이 잡히면 피할 수 없고, 에너지를 다 보여줘야 한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숨겨진 주역 제이 역을 맡으면서 영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몽타주>(2013)의 어리바리한 최 형사, <신의 한 수>의 야비한 아다리 등 특색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제이를 연기할 땐 머리를 기르고 변태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속눈썹까지 붙였다. (웃음) 악당을 많이 했으니 더는 미안해서 악당 역을 못 맡기겠다는 감독님도 있던데, 그렇지 않다. 아직 할 수 있는 악당이 많다. 아다리와 제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나. 특수한 역할을 해온 편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결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다. 몸의 90%가 연극살이지만, 앞으로는 영화, 드라마 가리지 않고 도전해보고 싶다.
-최근 드라마 <화정>에서 광해의 뜻을 지지하는 도원수 강홍립을 맡기도 했다.
=광해의 밀명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는 특사로, 광해와 뜻을 공유하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또 다른 광해가 전쟁터에 가 있는 것이다. 강홍립이라는 인물의 특징보다는 광해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로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경박수가 사도세자의 마음을 대변하며 경을 읊듯이 말이다. 그래서 강홍립의 캐릭터 자체에 대해선 많이 고민하진 않았다. 주는 작품이고, 부는 캐릭터다. 주와 부가 바뀌면 배우만 튀어버린다. 작품의 흐름이 먼저이고 캐릭터로서 어떻게 도드라질까는 나중 문제다.
-차기 계획은 어떻게 되나. 어떤 배역에 도전해보고 싶은지.
=SBS 드라마 스페셜 <퍽>에 출연할 예정이다. 아이스하키 드라마인데 빚도 지고 지질하게 사는 대학교 아이스하키부 감독으로 출연한다. 다행히 스케이트는 안 탄다. (웃음)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장르적으론 시사성 강한 드라마, 가족드라마, SF, 슬랩스틱 코미디 등이다. 해보고 싶은 배역은 작품마다 다르다. 특정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는 역할을 맡고 싶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어떤 역할도 꼽지 못하는 게 더 욕심이 많은 거다. 이런저런 거 다 해보고 싶은데, 그걸 다 얘기 못하니까 그저 “시켜만 주십시오” 하는 거지. 나는 욕심이 많은 배우다. 그러니, 무엇이든 시켜만 주셨으면 좋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