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걸작과 범작 그 어디쯤
2015-10-29
글 : 송경원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의 성취와 아쉬움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광은 <디판>에 돌아갔다. 프랑스영화의 오늘을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인 자크 오디아르는 매번 놀라운 영화를 선보여왔고 이번에도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상이 반드시 권위를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칸영화제의 주인공이라면 충분히 되돌아볼 만하다. 다만 <예언자>(2009)의 충격과 <러스트 앤 본>(2012)의 생생함과 비교한다면 <디판>은 다소 어정쩡해 보인다. 물론 <디판>은 충분히 아름다운 영화다. 내전을 피해 망명한 이민자들의 불안한 내면에 대한 접근도 치밀하고 자크 오디아르 특유의 스타일과 인장들도 그 파괴력이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 영화에 마냥 동의하긴 어려웠다. “칸의 자국영화 사랑이 함량 미달의 프랑스영화까지 경쟁부문에 포함시켰다”는 일부 외신의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디판>의 수상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개봉을 앞둔 <디판>이 자크 오디아르의 세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켰는지, 이 작품을 과연 자크 오디아르의 걸작으로 부를 만한지 조심스레 살펴봤다. 이 글 역시 당신의 감상을 풍성하게 돕기 위한 하나의 견해에 불과함을 미리 밝히며, <디판>의 성취와 아쉬움을 함께 돌아본다.

내전을 피해 유럽을 찾은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탈출과 이민을 위해 ‘디판’이란 이름을 산다. 이민국이 원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이제 남자에겐 가족이 필요하다. <디판>은 프랑스에서의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남자가 처음 만난 여자와 9살 소녀와 함께 가짜 가족을 꾸리는 이야기다. 하지만 <디판>은 이민자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난민들이 가짜 신분과 가족을 연기하면서까지 타국에 정착하려는 이야기가 이민자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예언자>, <러스트 앤 본>에 이어 다시 한번 소수자의 삶에 주목하지만 감독의 관심사는 그들이 이방인이라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적인 장치 혹은 조건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비극적으로 가족이 해체된 이들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 하나로 섞이는 과정을 따라간다. 가짜 가족이 진짜가 되는 이야기. 또는 의지할 데라곤 서로밖에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장벽을 허무는 드라마. 여기서 좀더 주목해야 하는 건 영화 속에서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 장벽, 이민자와 바깥 세계를 가르는 구별에 대해서다.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는 철저히 구분된 두 세계를 나란히 놓고 진행된다. 이민자와 바깥 세계가 뒤섞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프랑스 땅에서 철저히 격리된 채 그들끼리 다시 한번 섞일 따름이다. 외부 위협은 내부 결속을 한층 단단하게 만들고 가짜 가족이 서로에게 기대는 동기가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이민자의 정착기처럼 보이는 건 영화가 주는 일종의 환상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환상의 초점이 어디에, 누구에게 맺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세계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이방인, 아름답게 스며들다

<디판>은 표면과 내면이 완벽하게 구분된 영화다. 우선 영화의 표면을 따라가보면 일견 아름다운 듯 보인다. 스리랑카의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온 남자는 처음 본 여자와 소녀와 함께 가족을 연기해야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뿐인 이들은 내전으로 가족을 잃었다는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다. 조건과 필요에 의한 출발이었지만 서로 급속히 가까워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여느 드라마라면 이들이 갈등과 악조건을 이겨내고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로 마무리될 것이다. 이 영화의 표피 또한 정확히 그렇다. 디판(제수타산 안토니타산)과 가짜 아내 얄리니(칼리스와리 스리니바산), 가짜 딸 일라얄(클로딘 비나시탐비) 사이에 감도는 서먹함은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영국에 있는 사촌에게 가려고 했던 얄리니는 얼떨결에 디판을 따라 프랑스에 건너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다. 일라얄 역시 영화 내내 디판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일라얄은 이 낯선 남녀로부터 다시 한번 버려질까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이들은 가짜 가족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공동체를 유지한다. 일라얄은 프랑스말을 배워 외부와의 소통을 담당하고, 디판은 건물 관리인으로 취직해 돈을 벌어온다. 아내 얄리니는 여느 가정에서처럼 가사 전반을 도맡는다. 가짜 가족이라도 주어진 역할을 하다 보면 적응하고 익숙해지기 마련, 영화는 중반까지 이들이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을 끈기 있게 따라간다.

한껏 웅크린 채 날을 세우던 얄리니를 응시하던 건조한 시선은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조금씩 풀어진다. 얄리니의 마음이 풀어지는 만큼 그녀를 응시하는 카메라에도 욕망의 물기가 돌고 급기야 디판과 하룻밤을 보내기까지 한다. 딸 일라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교실에도 들어가기 두려워 금방 뛰쳐나오던 일라얄은 어느새 등굣길에 “나도 뽀뽀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자신에게 좀더 잘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관객도 햇살 가득한 피크닉 한가운데에 동참해 있다. 탈출에서 정착까지 일련의 흐름이 인물의 심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중반부까지 이 영화는 햇살에 녹는 얼음처럼 때때로 아름답고 푸근하게 느껴진다.

외부의 조건도 이들을 뭉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디판 가족이 정착하는 르프레는 갱단이 활개치는 변두리 마을이다. 내전의 공포를 피해온 이들인 만큼 다시금 마주하는 일상에 녹아든 폭력에 진저리를 칠 만하다. 얄리니가 총격전이 일어나는 마을을 뒤로한 채 몰래 영국으로 떠나려 시도하는 것도, 디판이 불같이 화를 냈다가 가족을 지키려 갖은 애를 쓰는 것도, 두 사람의 결속을 다시금 단단히 다지기 위한 적절한 시련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디판>은 같은 상처를 공유한 두 남녀(더하기 아이 하나)가 이국 땅에서 서로를 쓰다듬는 동화다. 곳곳에 배치된 갈등과 위협이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실제 난민들을 배우로 캐스팅해 날것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려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 영화에 리얼리즘은 없다. 오직 극단적으로 세팅된 드라마만 있을 뿐이다. 단지 프랑스 내부의 난민의 삶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디판>은 이민자에 대한 관찰, 난민의 적응기로 오해되기 십상이지만 드라마로서 <디판>은 그저 서로를 보듬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다큐멘터리적인 외양이 주는 효과는 지대해서 그들의 통속적인 드라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환영으로 거듭난다.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

<디판>은 철저히 디판의 시선으로 재편된 드라마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디판은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총을 든 군인이었다. 영화 중반 쉐란 대령의 등장과 함께 밝혀지는 디판의 정체는 디판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내전으로 동료와 가족을 모두 잃은 디판은 스스로 전쟁을 끝내고 타국으로 도망쳐왔다. 이 장면 이후 가족 사진이 담긴 액자를 만들어 액자의 문을 닫는 디판의 행동은 상징적이다. 잃어버린 가족을 덮어두고 새로운 대안 가족을 새 땅에서 만들겠다는 의지. 하지만 새롭게 정착한 땅, ‘작은 초원’을 뜻하는 르프레 마을은 낙원이 아니라 여전히 정글이었다. 갱들은 서로에게 총질을 하고 거주민들에게까지 위협을 가한다. 이제 디판은 새로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난폭해져야 한다. 디판의 시선에서 정리된 영화는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며 명료하다. 내전에 대한 디판의 속죄기이자 다시금 깨어나는 (가족에의) 욕망에 대한 서사다. 항상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는 디판의 뒷모습은 안쪽과 바깥쪽, 새롭게 구성된 이민자 가족과 프랑스 땅을 완벽하게 격리시킨다. 디판은 프랑스에 건너와서도 여전히 전쟁 중이다. 다만 스리랑카에서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면 이제는 새롭게 얻은 가족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 장면 이후로 영화는 프랑스 르프레 마을에 적응하는 이민자의 삶이 아니라 정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한 남자(혹은 가족)의 이야기로 그 의미가 좁혀진다.

이때부터 영화가 혼란스러워지는 건 몇 가지 시선들의 충돌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디판의 시선으로 정리된 만큼 영화는 얄리니와 일라얄의 불안과 욕망을 종종 점프하고 생략시킨다. 가령 일라얄이 처음 교실에 들어서는 장면은 일라얄의 불안한 시점숏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이내 숏은 점프하고 불안을 견디지 못한 일라얄이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디판에게 안기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관객은 오직 일라얄의 심리적 충격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얄리니 역시 마찬가지다. 갱단의 숙소에 일하러 가서 마주치는 갱단 보스 브라힘(뱅상 로티에르)과 얄리니에게는 미묘한 소통의 기류가 형성된다. 굳은 표정에 종종 미소가 번지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거기까지다. 우리는 얄리니의 풀어진 태도로 심적인 변화가 있음을 짐작할 뿐 그 실체와 이유를 알진 못한다. 매우 구체적인 장면과 상징들로 반복되는 디판의 심리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가 디판의 내면을 자세하게 이해하고 동조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느 드라마라면 응당 그랬어야 하지만 <디판>은 종종 관객에게마저 디판과의 동일시를 차단한다. 이때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사회의 단면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관찰이 들어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마지막 장면은 디판의 바람인가 디판이 꾸는 꿈인가, 현실인가. 디판과 그의 가족이 새로운 땅에서 찾은 미소는 과연 행복인가.

자크 오디아르가 펼쳐놓은 기호의 미로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디판을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스리랑카 내전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고 이민자들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이민자에 대한 프랑스 내부의 시선에 대해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관객은 그들(이민자)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잘 표현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디테일에 굳이 주목하려고 하지 않았다”(<씨네21> 1007호 칸국제영화제 특집 중 <디판> 감독 자크 오디아르 인터뷰)는 감독의 증언처럼 심지어 연출자의 관심 바깥에 있다. 창밖(이민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시선)과 창 안(생존을 위한 이민자의 시선)을 완벽하게 구분하지만 둘 중 어디에도 관객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이 단순하고도 복잡한 영화가 뒤죽박죽 섞어놓은 기호들 사이에서 길을 헤맨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철저히 장르적으로 해석하고 싶다면 (아마도 쉽진 않지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 줄기 모호함이 가슴속에 남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디판으로 대변되는 이민자의 삶을 바라본 것인가. 파편화되는 유럽의 상황은 제대로 상징화되었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해피엔딩에 이르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인가. 섣불리 답하기 망설여진다.

<디판>은 어느 장르영화보다 장르적이고 멜랑콜리한 드라마다. 하지만 <디판>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과 차단된 시선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복잡한 상상에 빠지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자크 오디아르가 흩어놓은 갖가지 상징과 기호들이다. 빛과 어둠, 멈춰선 카메라, 인물의 뒷모습, 몸의 관찰, 다큐멘터리로 시작해 장르영화로 끝나는 전형적인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 짐작하건대 자크 오디아르의 관심사는 대비되는 극적 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대립이지 구체적인 증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전혀 리얼하지 않다. 굳이 정의하자면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주의적인 영화인 척 행세하는 표현주의적인 영화에 가깝다. <예언자>가 여러 장르와 방법론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않는 방법론을 취함으로써 실패한 상태 그 자체를 하나의 스타일로 양식화시켰다면, <디판>은 그 스타일만을 반복, 변주, 소비하는 장르영화다. 하지만 이 모호함이 여전히 매력적이거나 유효하게 작동하는지는 의문이다. <디판>은 분명 흥미로운 출발이지만 <예언자>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도리어 도식을 깨고 나왔던 자크 오디아르가 다시금 자신만의 장르 도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조금은 걱정스럽다. <예언자>의 모호함은 영화에 대한 유효한 질문과 화두를 불러일으켰지만, <디판>의 미적거림은 찜찜함을 남긴다. 그것이 온갖 장르 스타일과 예술적 도표들이 난무하는 이 영화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음에도 온전한 지지를 표명하기 힘든 이유다. 다만 한 가지, 디판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얄리니의 손길, 그 움직임만은 아직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망막에 새겨져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족할지도 모르겠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자전거 도둑>

비전문 배우가 전하는 강력한 사실성

때론 정확하게 지시된 연출보다 우연히 포착된 순간에 진실이 묻어날 때가 있다. 디판 역의 제수타산 안토니타산은 실제 스리랑카에서 반군 활동을 했던 소년병 출신으로 25살 무렵 프랑스로 망명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그의 연기를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의도 이상의 어떤 순간들을 보여주는 배우들의 표정을 관찰했다고 한다. 스스로 잘 모르는 스리랑카를 굳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진실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우리는 비전문 배우를 통해 날 것 그대로의 사실성 혹은 이면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 <디판>처럼 비전문 배우를 통해 감독의 연출 의도 이상의 것을 전달하는 작품들은 드물지 않다. 켄 로치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에서 스코틀랜드 하층민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실제로 여러 차례 감옥을 전전한 폴 브래니건을 캐스팅한 바있다. 유럽 하층민의 현실을 꾸준히 관찰해온 다르덴 형제 역시 매 작품 비전문 배우와 함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를 비롯한 숱한 감독들이 비전문 배우를 통해 연출된 것 이외의 새로운 사실성을 발굴해왔다. 비전문 배우와 함께한다는 건 정형화된 연기 이상의 어떤 것을 전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방식임에 분명하다. 디테일한 내러티브, 빛과 이미지를 통해 인물의 내면에 접속하는 자크 오디아르의 방식과 비전문 배우의 강력한 사실성이 결합한 화학반응은 실제 이상의 감흥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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