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시계획 이론가 포레스터는 과학적 실험보다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생활 경험은 주관적이며, 환경을 개발하거나 보전하는 일은 가치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상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해당 구성원들의 공동 가치를 내포한다. 이 점은 관객을 건축영화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10월28일부터 11월2일까지,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제7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주최 대한건축사협회)가 열린다. 14개국 19편의 장편영화들이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가 관객을 기다린다.
개막작은 현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사로 꼽히는 고트프리트 뵘을 다룬 영화 <뵘 가문의 건축과 함께하는 삶>(2014)이다. 93살의 고트프리트 뵘 외에도 그의 가족들은 4대째 건축사로 활동 중이다. 영화는 노령의 건축사 뵘이 경험하는 현재의 공간과 더불어 같은 장소를 담은 과거 이미지들을 교차편집해 미묘한 시각차를 담은 공감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유명 건축물과 건축사를 소개하는 ‘마스터&마스터피스’ 섹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모던건축의 이정표라 불리는 카를로스 라울 비야누에바를 소개한 영화 <비야누에바, 악마라 불린 천재>(2012)이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대학의 설계를 위해 그는 무려 20년을 쏟았다. 그림과 벽화, 스테인드글라스와 조각 등 다른 예술과 협업을 통해 마침내 대학 마을은 통합적이고 예술적인 공간으로 거듭난다.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는 그의 아이디어를 듣고 “이런 미친 생각은 오직 악마만이 할 수 있다”고 감탄한 바 있다. 제목은 이 일화에서 따왔다. 벨기에 가구 디자이너 마틴 반 세브렌의 삶을 조명한 <마틴 반 세브렌의 무한한 세계>(2014)와 모더니스트 가구 디자이너인 아일린 그레이에 관한 <아일린 그레이: E-1027의 비밀>(2014) 역시 같은 섹션에서 소개되는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낡은 건축물과 이를 복원하는 이야기를 담은 ‘건축 유산의 재발견’ 섹션에는 총 4편의 다큐멘터리가 소개된다. 1960년대 뉴욕세계박람회의 상징이었던 뉴욕스테이트 파빌리온을 소개하는 <뉴욕스테이트 파빌리온의 부활>(2015)에서는 공간의 시간적 소멸과 변화를 생각할 수 있으며, 유럽식 소셜하우징과 조립식 건축의 역사에 대해 다룬 <콘크리트 스토리: 조립식 건축의 역사>(2014)에서는 도시의 생태와 공간구조의 규칙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투겐타트 하우스>(2013)와 <케이프코드 해변의 바우하우스>(2013)를 통해 장소에 중첩된 역사의 이미지와 현재의 반영 정도를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무분별한 도시화에 일침을 가하는 ‘어번스케이프’ 부문에 소개되는 5편의 영화 중 안건형의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2014) 역시 추천작이다. 조선 후기 서화가 허필의 그림에서 시작된 영화는, 홍제천을 비추며 서울의 공간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사운드가 생략된 독특한 형식의 이 작품이 취한 성취는 비단 시청각적 실험만은 아닐 것이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진부한 시각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갖게끔 한다는 데서 영화는 형식 이상의 목표에 도달한다. 이 밖에 ‘비욘드’ 부문에 소개되는 <빅 아이즈>(2014)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2013), <디올 앤 아이>(2014) 등 건축과의 경계를 넘어 패션이나 회화와 결합한 영화들 역시 색다른 재미를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