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알고 소리를 내야지 모르고 내면 안 된다.” 조선시대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에서 수많은 명창들을 키워내던 동리 신재효는 판소리의 자세를 이렇게 말한다. 류승룡은 신재효를 연기하면서 자신도 연기의 기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판소리의 수칙을 읽어가는데 그 가르침이 연기를 할 때와 똑같더라. 내 연기 스승님들이 생각나고, 연기를 배우던 시절도 떠오르더라.” 수양딸 송화(오정해)에게 약을 먹여서라도 판소리의 맥을 이어가려던 <서편제>(1993)의 유봉(김명곤)이 극한의 방식으로 치달았다면,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 진채선(배수지)과 그를 길러낸 신재효의 방식은 지금으로 따지자면 합이 잘 맞는 멘토와 멘티에 가깝다. 단 이 과정에는 7살 때부터 사서삼경을 다 읽고 입신양명을 꿈꿨지만, ‘천한 중인배’의 신분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던 신재효의 울분과, 여성의 신분으로 언감생심 소리꾼이 될 꿈을 꾸지 못했던 진채선의 열망이 함께 응집되어 있다. 진채선이 ‘소리꾼으로서의 소리’를 낸다면, 신재효는 그 소리가 날 수 있게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직언의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신재효의 소리가 없었다면 진채선의 소리도 없었을지 모를 일이다.
<도리화가>에서 그 변화를 몸소 겪고 표현해내는 건 진채선을 연기한 배수지의 몫이다. 배수지가 그런 커다란 사건과 감정의 격랑에 휘말리는 동안, 류승룡은 외려 확신과 소신, 평정의 변하지 않는 감정의 흐름을 짚어내야 했다. 특히 진채선에게 가르침을 주는 과정에서 꾸짖고 칭찬하는 그 태도를 ‘숨기면서 또한 드러내야’ 하는 장면들은 류승룡이 그간 작품을 통해 보여준 ‘디테일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신분이나 캐릭터가 하늘과 땅 차이인 광해와 천민 하선의 사이를 오가며 극의 흐름을 굳건히 잡아낸 허균의 연기를 기억한다면, 류승룡이 이 평정의 연기를 어떻게 또 훌륭하게 해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바가 아니다. “신재효는 고아로 자란 진채선의 아버지이자, 판소리 스승이자, 또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나무 같은 존재다. 자칫 진채선의 변화만 읽히는 것 같지만 <도리화가>가 재밌는 건 이 두 캐릭터 사이에 깨우침이 오간다는 것이다.” 중년을 훌쩍 넘긴 신재효는 오히려 부딪히고 도전하는 진채선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할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류승룡은 신재효의 감정의 흐름을 좇아가되 변화의 큰 축은 어디까지나 진채선에게 돌아가는 게 맞다고 말한다. 늘 아이디어가 많은 걸로 소문이 난 류승룡이 이번엔 “남도 출신인 진채선이 전라도 방언을 쓰면 좋겠다”는 의견을 촬영 보름 전에 관철시킨 것도,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영화 전체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연극하던 시절부터 쭉, 그에게 작품은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었다.
“시나리오를 볼 때보다 만드는 과정에서 합이 잘 맞아서, 이번엔 120%의 만족을 느꼈다.” 류승룡은 <도리화가>를 거쳐 차기작의 크랭크인이 늦어지면서 좀 여유를 찾은 올해의 시간들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간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 ‘전화기 켜놓고 충전하는 거지’ 이런 궤변을 늘어놓으며 정신없이 달려왔다. 영화가 기록경기가 아닌데 기록경기처럼 돼버렸다. 이제는 좀 고민도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내 나이도 벌써 50살이 다 되어가고.” ‘주연’이라는 수식에 대해서도 그래서 “그렇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늦게 시작한 만큼 조급함, 배고픔이 있어서 왕성하게, 뜨겁게 했다.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을 하니 코믹도 하는구나, <표적>(2014)을 하니 액션도 되네, 라며 많은 작품이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나는 정작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얼얼함이 빠지고 이제는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갈 시간을 찾으려 한다”고 반성한다. <도리화가>의 개봉과 함께 당분간 그는 추창민 감독의 <7년의 밤>에 매진할 예정이다. 사고로 소녀를 죽인 야구선수 역에 동화되기 위해 살을 빼 지금은 얼굴에 한층 날카로운 멋이 드러난다. “입던 옷을 정리할수록 입을 옷이 많이 나온다고 하더라. 필요 없는 살을 빼면서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었다. 행복하냐, 무엇 때문에 열심히 미친 듯이 하냐, 이런 질문을 해봤다. 흥행, 인정 같은 것 때문에 연기를 해온 게 아니었다. 그게 행복이라서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닌데, 그저 연기가 좋아서 미친 듯이 한 건데, 그간에는 내 마음과 달리 오도가 많이 됐다.” 치유의 시간을 보낸 류승룡의 새로운 도약에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