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지요!
(중략)
너희, 사랑의 불꽃들아, 밝은 곳으로 향하자!
스스로 저주하는 자
진리는 구원해주리라.
(중략)
참으로 허망한 것
모조리 쓸어버리고,
영원한 사랑의 핵심
구원의 별이 빛나게 하라.”
-괴테, <파우스트> 비극 제2부 5막 중에서(강조는 인용자)
언젠가 과음으로 떡이 되어 뻗은 다음날. 홀로 있는 조용한 집에 나를 위해 끓여놓은 북엇국 한 수저를 간신히 떴다. 뜨끈한 국물이 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난 살았다는 안도의 신음을 뱉었다. 참회의 맛. 구원의 맛. 그 따뜻한 북엇국 한 그릇은 ‘여전한’ 사랑의 징표였다. 내 눈엔 눈물이 맺혔다.
누구나 용서받길 원한다. 누구나 위로받길 원한다. 구원받길 원한다. 다시 말해 사랑받길 원한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하고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공허하다. 평생을 갈구한 지식들을 내팽개치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뒤 젊음을 획득한 파우스트 박사. 그는 세상의 영웅이 되어 온갖 쾌락과 희열을 맛보지만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영혼을 구해준 것은 천사들과 교부(敎父)의 노래가 일러주듯이 사랑이었다. 사랑이 없으면 구원은 없다. 사랑이 없다면 맹목적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동질성과 동시성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매그놀리아>(1999)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파우스트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자는 뜻밖에도 어린 스탠리(제레미 블랙먼)였다. 그는 <아이들은 뭘 알까요?>란 TV 퀴즈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을 상대로 연속 7주째 승리를 거두며 신기록과 거액의 상금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박학다식한 신동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늘 “사랑한다”란 말로 아들을 독려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오로지 돈과 명예뿐이다. 스탠리는 가방 네개에 가득 책을 싸들고 가 도서관 책상에 모조리 펴놓고 한눈에 그 책들을 읽는 지식 강박증에 시달린다. 아이는 늘 무표정하고 우울하다. 진실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인물이 또 있다. 이미 약 30년 전 <아이들은 뭘 알까요?>에서 퀴즈 왕이 되어 전 국민의 화제가 되었던 도니(윌리엄 H. 메이시). 하지만 그는 많은 신동들이 그렇듯이 무능력한 성인이 되어(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느 날 번개를 맞았다고 한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늘 일자리에서 해고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의 부모는 오래전 그가 탄 상금을 모조리 탕진했고 어른이 된 그는 사람들에게 우스갯거리가 된 지 오래다. 도니는 사랑에 목마르다. 그래서 그는 짝사랑하는 남성 바텐더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치아교정에 집착한다.
40대에 들어선 도니의 이력이 말해주듯이 <아이들은 뭘 알까요?>는 33년 된 최장수 퀴즈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맡아온 지미 게이터(필립 베이커 홀)는 살아 있는 전설의 MC다. 하지만 명사인 남편 곁에서 늘 외로움을 느낀 아내 로즈(멜린다 딜런)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의 위협을 느낀 의붓딸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는 10년 전 집을 나가 코카인을 흡입하며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있다. 불현듯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지미는 딸과 화해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버지에 대해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인 딸에 의해 그는 그냥 발길을 돌린다. 이 가족 안에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수 인기 프로그램 <아이들은 뭘 알까요?>는 TV 프로그램 제작 업체인 ‘빅 얼 파트리지 프로덕션’을 통해 만들어졌다. 인기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큰돈을 벌어들인 얼(제이슨 로바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암으로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이 역을 맡은 로바즈는 실제로 폐암 환자였고 촬영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아내 린다(줄리언 무어)는 사랑 없이 오로지 얼의 재산만을 보고 결혼해 수많은 남성과 외도를 즐겼지만 결국엔 죄책감에 신경쇠약,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약물에 의존해 살고 있다.
얼에게는 이미 이혼한 전처와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은 남성우월주의, 여성경멸주의자가 되어 <유혹하고 파괴하라>란 자신의 책과 비디오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프랭크 매키(톰 크루즈)로 성장했다. 프랭크는 자신의 성장과정을 숨긴 채 아버지 얼을 뼛속 깊이 증오해왔고 그럼에도 임종을 앞둔 얼은 아들 프랭크를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한다. 이 가족 역시 사랑의 결핍에 신음하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은 혈육이 아닌 이상 대부분 만나지 않는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서로 제각기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퀴즈 쇼라는 무대를 통해 조금씩 연결되어 있고 실은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구원의 갈구, 즉 사랑의 결핍이다. 이들은 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동질성, 이야기의 동시성을 보다 선명하게 표현해주는 것은 영화 속의 음악이다.
35분간 반복되는 존 브리옹의 음악
‘매그놀리아’란 타이틀이 등장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에이미 만의 노래 <하나>(One)가 흘러나온다. 원래 이 곡은 2분53초에 불과하지만 영화에서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이 잠깐씩 처음 얼굴을 내미는 7분 동안 노래는 계속 반복된다. 노래는 각기 떨어져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 이들의 공통된 이름은 외로움이다. “하나는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외로운 숫자예요. 둘도 하나만큼 나쁠 수 있죠. 왜냐하면 하나로 나뉠 때 그것은 가장 외로운 숫자가 되거든요.”
이후 영화에서 음악은 한동안 사라졌다가 이야기가 발전하는 영화 시작 40분 지점부터 다시 등장한다. 존 브리옹 작곡의 관현악곡 <작은 도서관 음악>(Little Library Music). 도서관에서 책을 펼쳐놓고 읽고 있는 스탠리를 위한 이 음악은 실은 이미 전 장면에서 경관 짐 커링(존 라일리)과 한 소년이 대화를 나누는 대목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퀴즈 쇼를 향해 서둘러 가는 스탠리와 아버지의 다음 장면부터 음악은 <쇼를 향해 가다>(Going to a Show)로 바로 이어진다. 이 음악이 흐르는 동안 스탠리는 서둘러 퀴즈 쇼를 준비하고, 지미는 오전에 있었던 딸과의 불화를 위스키를 마시면서 아내에게 전화로 이야기하며, 경관 짐은 음악을 너무 크게 틀어놨다는 이웃들의 신고를 받고 클라우디아의 집을 방문하고, 린다는 신경안정제를 구하러 병원에서 처방전을 빼앗다시피해서 약국으로 향한다. 얼은 여전히 사경을 헤매며, 그의 간호사 필(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식료품 가게에서 음식과 성인잡지를 배달시키고, 프랭크는 자신의 세미나에 군중을 모아놓고 여성들을 정복할 전략을 설파한 뒤 TV 기자(에이프릴 그레이스)와 인터뷰를 시작한다. 반면에 도니는 짝사랑하는 남성 바텐더를 보러 바에 갔다가 역시 그를 좋아하는 게이 노인 옆에 앉아 언쟁이 붙는다.
그러는 가운데 생방송 퀴즈 쇼 <아이들은 뭘 알까요?>는 시작된다. 그사이에 필은 배달온 성인잡지에서 프랭크 회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그곳으로 전화를 하고, 기자는 의심이 가는 프랭크의 과거를 캐묻고, 과도한 처방전을 가지고 온 린다는 약사의 몇 가지 질문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며 욕설을 뱉고 약국을 뛰쳐나온다. 이 별개의 사건이 제각기 진행되는 동안 존 브리옹 음악의 단순한 단조 음계는 무려 35분간 반복된다.
물론 이 음악은 클라우디아의 방에서 흐르는 에이미 만의 노래 <가속도>(Momentum), 도니가 찾아간 바에서 울리는 슈퍼트램프의 노래 <안녕 하룻밤>(Goodbye Stranger), 퀴즈 쇼의 주제곡이 흐르는 동안 잠시 멈춘다. 하지만 장면이 그 공간을 빠져나오는 순간 잠복해 있던 존 브리옹의 음악은 여지없이 고개를 든다. 이 각각의 사건들은 동시적이며 그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를 향해 내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략 20분 동안 존 브리옹의 음악은 잠시 사라졌지만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이 지나는 지점부터 그의 음악은 다시 시작된다. 기자는 프랭크의 답변이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당신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직 생존해 있는 얼 패트리지라고 말한다. 프랭크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때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어두운 선율이 나지막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이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장면은 퀴즈 쇼로 넘어간다. 지미는 평소와 다르게 점점 말을 더듬기 시작하고 연속해서 문제를 맞힌 스탠리는 전반부와 다르게 멍하니 앉아 있다. 인터미션 때 화장실에 가지 못한 아이는 결국 바지에 오줌을 싸고, 반면에 지미는 횡설수설하며 문제를 내다가 본인이 정답을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지미가 정신을 차린 후 퀴즈 쇼는 간신히 다시 시작되지만 스탠리는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며 퀴즈 진행을 거부한다. 생방송은 도중에 중단된다.
린다는 남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상속권을 포기하겠다며 얼의 유언장을 고쳐달라고 요구하더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변호사의 답변에 극도로 흥분하여 욕설을 퍼붓고 사무실을 뛰쳐나간다. 과음한 도니는 사람들 앞에서 남성 바텐더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하고, 클라우디아 집을 방문했다가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외로운 경찰 짐은 귀대하는 도중 지역 살인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만나고서는 그를 쫓다가 장대비 속에서 권총을 잃어버린다. 인터뷰를 도중에 거부하다시피한 프랭크는 아버지의 보호자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심정으로 그곳으로 향한다. 그러한 30분 동안 암울한 오케스트라 음악은 계속 흐른다. 그 음악 아래서 구원과 사랑을 갈구하는 이 결핍의 인간들은 모두 하나같이 위기에 봉착한다.
모두가 읊조리는 노래 에이미 만의 <현명해질 때까지>(Wise Up)
이제 이들의 동질성은 보다 명백하게 표현된다. 임종을 앞둔 얼이 간호사 필에게 마지막 인생의 참회록을 힘겹게 이야기한다. 그는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고 결국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버렸다. “이 빌어먹은 후회, 빌어먹을 후회… 사랑, 사랑, 사랑… 인생은 짧지 않고 길어. 이놈의 힘겨운 인생은 엿같이 길어. 젠장! 난 어쩌면 좋은가, 필. 나 좀 도와주게, 필. 나 좀 도와줘.”
그러는 동안 그의 목소리 뒤편으로 방송을 도중에 멈추고 집으로 지쳐 돌아온 지미, 짐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또다시 코카인을 하는 클라우디아, 잃어버린 권총을 찾으러 비 내리는 야간에 총출동한 경찰대 속에서 자책하는 짐, 깊은 밤에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그곳에서 천재와 신동에 관한 책을 읽는 스탠리, 복사해둔 전 직장의 창고 열쇠를 찾고 있는 도니, 차 안에서 강한 수면제와 모르핀을 복용하는 린다, 아버지의 집 근처에 도착해 차 안에서 만감이 교차한 채 고민에 빠진 프랭크. 얼의 참회록은 이들의 모습 위에 조용히 겹친다. 얼의 독백은 이들 모두의 독백이다.
그리고 곧이어 에이미 만의 <현명해질 때까지>(Wise Up)가 흐른다. 울먹이며 코카인을 흡입하던 클라우디아는 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이어서 짐, 지미, 도니, 필, 얼, 린다, 프랭크, 스탠리는 각기 그들이 있던 방, 거실, 침실, 차 안, 도서관에서 같은 노래를 읊조리며 따라 부른다. “하지만 그 고통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멈추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현명해질 때까지.” 지미는 아내 로즈에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외로운 짐과 상처투성이의 클라우디아는 서로를 이해하고, 전 직장의 금고를 털던 도니는 후회 끝에 돈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어린 스탠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아빠에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증오심의 프랭크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뒤 의붓어머니 린다의 병실에 문안을 간다. 이 모든 것이 한날한시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기적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황소개구리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것과 같은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나고 말았다.’ 마치 한 사람의 일인 것처럼.
부끄러운 기억, 최소한의 반성
하지만 그럴 수 있다. 그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모두 같은 것을 갈구하고 같은 것을 소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외롭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에이미 만의 노래처럼 우리는 각각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늘 불완전하고 그럼에도 한편으로 이따금 기적을 만든다. 용서와 구원이라는.
북엇국을 떠먹으며 눈시울까지 붉혔음에도 그 이후에도 나의 과음은 ‘당연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버릇은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의 과오는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누군가가 날 위해 끓여준 따뜻한 해장국을 먹을 때면 나는 지난밤에 뱉었던 허풍과 험담을, 기억하는 만큼은 좀더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또 누군가의 실수를 보게 되었을 때면 좀더 너그러이 용서하고 싶어졌다.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이전보다는 조금 변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매그놀리아> 속의 금언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기억은 최소한의 반성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반성은 엇비슷한 타인의 실수를 이해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들 비슷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 다음날 혼자 해장국을 먹으며 겸손한 묵상에 잠길 때면 무엇인가가 마침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황소개구리가 우박처럼 쏟아지지는 않겠지만 서로가 마음속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노래를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엇비슷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