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시?>(2014) <봉인된 비밀>(2013) <레일라를 만나며>(2012) <라스트 스텝>(2012) <오렌지 슈트>(2012)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펠리시티 랜드>(2011) <시린>(2008) <고독한 밤>(2007) <먼 나라 여인의 초상>(2005) <계절의 샐러드>(2005) <쓰레기의 시>(2005) <버려진 정거장>(2002) <물과 불>(2001) <달콤한 잼>(2001) <믹스>(2000) <영국가방>(2000) <세이다>(1998) <레일라>(1996)
히잡을 패션으로 승화시키는 여인, 살아 있는 잉그리드 버그먼, 이란의 보석, 우아함과 기품을 어깨에 두른 여인. 레일라 하타미를 표현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그녀의 기품 있는 외모와 분위기에 대한 상찬이다. 사진만 봐도 단박에 이해가 간다. 레일라 하타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랍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릴 만한 그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히잡으로는 가릴 수 없는 오뚝한 콧날에, 피부는 사막의 모래빛으로 은은히 빛나고, 가늘게 뻗어 힘 있는 눈썹과 깊고 검은 눈동자는 그림마냥 선명하다. 도톰하게 살이 오른 입술은 생기 넘치는 선홍빛인데 웃을 때 양쪽에 길게 그려지는 주름마저 마치 그것이 원래의 자리인 듯 단아하다. 본인은 평범한 이란 여성의 얼굴이라고 겸손해하곤 하는데, 그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어디 하나 빼거나 더할 곳이 없는 완벽한 균형이란 점에서는 과연 평균이라 할 만하다.
이란을 대표하는 여배우 레일라 하타미는 1996년 다리우스 메흐르지 감독의 <레일라>를 통해 평단과 대중의 호평 속에 데뷔했다. 어쩌면 이 범상치 않은 등장이 배우로서 레일라 하타미의 갈 길을 너무 일찍 짚어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레일라> 속 레일라는 남편과 아무 불화가 없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의 중혼을 이해해야 하는 여인이다. 심지어 시어머니의 종용을 이기지 못해 망설이는 남편을 직접 설득까지 해야 했다. 사회적 요구와 개인적 욕구 사이에서 오롯이 홀로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타 문화권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인배우였던 레일라 하타미는 그 미세한 균열과 혼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 제목처럼 삶의 일부를 녹여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교한 연출, 설정된 연기가 분명함에도 카메라가 진실을 포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란 뉴웨이브의 기수인 다리우스 메흐르지 감독은 이를 “영화가 현실을 대면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레일라 하타미의 연기는, 나아가 이란 배우들의 연기는 그 연장선에서 현실을 한폭의 그림처럼 카메라에 담는다. 비전문성, 비전형성이라 불러도 좋겠다.
비전문배우를 즐겨 기용하는 이란 뉴웨이브의 정서는 전문배우와 함께할 때도 공유된다. 우리가 그들의 연기에서 리얼리티를 발견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연기의 흔적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실제 같다는 느낌은 단지 생경함만으로도 피어날 수 있다. 레일라 하타미의 숙련된 연기를 보고 비전문배우라고 할 순 없지만 그녀의 표정과 말투, 행동은 극영화의 전형성 바깥에 있다. <버려진 기차역>(2002),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라스트 스텝>(2012) 등 그동안 하타미가 생명을 불어넣은 영화 속 캐릭터들을 잇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삶의 바닥을 마주하고 있는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한 인간의 솔직하고 황망한 표정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들 캐릭터의 고뇌와 갈등은 화면 밖에서 서성이지 않는다. 격렬한 감정의 표현과 급박한 사건 전개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홀로 삼키고 삭이는 고뇌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를 두고 또 하나의 전형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그 낯선 방식의 연기에 사실의 흔적 같은 리얼함이 묻어 있는 것까진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 방식은 매우 시적이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레일라 하타미 역시 감독이 구상한 한폭의 그림 속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풍경의 일부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여배우로서는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경지로 도약하는 중이다.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여인 골리 역은 그 여실한 증거 중 하나다.
저명한 평론가이기도 한 사피 야즈다니안 감독의 첫연출 데뷔작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시?>는 다소 현학적이고 형식미를 추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독창성을 중요시한 실험적 영화는 아니다. 잉마르 베리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모더니즘영화의 선구자들이 이미 선보였던 연출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화면으로 이야기하는 쪽에 가깝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보다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관객이 공백을 적극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화면 속에서 레일라 하타미의 연기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 골리는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적극적으로 구애해오는 남자 파하드(알리 모사파)가 부담스럽다. 영화는 골리가 과거를 잊어버린 것처럼 혼란스럽게 현재와 과거, 장면과 장면 사이를 점프한다. 구체적인 룰에 대한 설명조차 없는 퍼즐 게임 같은 영화에서 관객은 골리와 같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골리의 혼란에 감정이입하기 마련이고 그녀의 표정 하나, 반응 하나가 영화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상황 속에 녹아들어가 함께 느끼되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레일라 하타미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대신 관객과 같은 눈높이에서 이 여정에 동참한다.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하거나 의미하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나오는 시퀀스조차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사람들의 인생에서 잊히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들,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없겠지 싶은 순간들, 그걸 보여준다는 게 좋았어요.” 레일라 하타미의 고백에서 그 누구보다 영화의 본질을 짚고 있는 노련함이 느껴진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그저 반응하는 태도, 연기가 아닌 듯한 연기, 이란영화 특유의 리얼리티는 역설적으로 배우의 존재감을 기반으로 성립한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반응은 어쩌면 영화에 둘러싸인 일상의 익숙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 알리 하타미는 영화감독이었고 영화배우였던 어머니는 남편의 첫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 역시 부모처럼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알리 모사파와 결혼했고 이번 영화에서 남녀 주연으로 함께 출연했다. 영화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건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러한 장점을 십분 활용한다. 하타미의 데뷔작인 <레일라>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두 배우는 1999년에 실제 부부가 되었다. 이후 2012년 알리 모사파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라스트 스텝>에서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고, 이번 영화에서 세 번째로 만났다. 하타미는 “가족과 함께 영화 작업을 하는 걸 특별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사실 재정이 넉넉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죠”라며 현실적인 선택을 언급했지만, 영화 바깥에서의 안정감과 자연스러움이 영화 안쪽으로 스며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사실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요. 장면들 스스로가 당신을 끌고 가서 영화의 주제를 이해하도록 돕는 거예요. 배우들도 관객과 다를 게 없죠.” 그녀가 남편과 함께한 인터뷰 중 <시네마 이란>이 이전 영화들과의 유사성에 대해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관객은 부부가 함께 출연한 <레일라>나 <라스트 스텝>, 혹은 비슷한 상황을 그린 다른 영화와의 유사성을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작품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혀 다른 공기가 끼어든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녀는 비슷한 상황, 유사한 설정에도 익숙한 연기를 풀어내는 법이 없다. 매 장면의 감정이 유일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소박한 세트에서 촬영할 때 카메라는 배우에게 고정이 됩니다. 그때 화면은 한폭의 그림이 되죠.” 주어진 상황에 솔직히 반응하는 연기와 그것을 차분히 관찰하는 카메라. 이란의 보석이 해가 갈수록 빛을 발하는 비결은 여기에 있다. 몬트리올국제영화제(<버려진 정거장>), 베를린국제영화제(<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라스트 스텝>) 등 숱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에 초청되는 명성도, 세월에 빛바래지 않는 보석 같은 외모조차 이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새겨진 연기에 대한 확신과 열정에 비하면 하찮은 것들에 불과하다.
일상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시?>의 홍보를 위해 레일라 하타미가 카메라 앞에 선다. 영화에 대한 가벼운 문답이 오가는 인터뷰 말미에 일곱살 난 그녀의 딸이 불쑥 튀어나와 카메라를 만지며 놀기 시작한다. “촬영을 잠시 중단한 줄 알았어요”라며 수줍게 웃은 뒤 아이를 다독이는 그녀의 모습은 이후 촬영현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이어진다.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이자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남편 알리 모사파와 촬영장을 뛰어노는 아이들. 한 화면 안에 잡힌 가족. 문득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녀의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