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상적인 언어로 쓰는 시
2015-12-29
글 : 이화정
사진 : 백종헌
서울에서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를 통해 보는 일본영화계의 현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이와이 슌지 감독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한국을 찾았다. 각각 신작 홍보와 기획전 참석으로 방한한 것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기획전이 열리는 강남에 있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신작 상영회가 열리는 강북에 있었다. 62년생 고레에다 감독과 한살 아래인 이와이 감독은 최근 일본의 모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뒤 친분을 다지게 됐다고 한다. 두 감독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으나 스케줄상 여의치 않았다. 이날 사석에서 만난 두 감독은 일본의 현재를 비판하는 영화를 계획 중이지만 투자 받기가 어렵다는 연출가로서의 고민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두 감독이 작품 스타일은 다르지만 일본이라는 바탕에서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으로서의 고민, 그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갔다. 일본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와이 슌지. 두 감독들이 인터뷰에서 밝힌 견해를 통해 지금 일본영화계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작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한국을 찾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네 자매를 통해 그리고자 한 ‘순환’의 의미를 짚어보는 인터뷰로 지면을 시작한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한 건 <환상의 빛>(1995) 이후 두 번째다. 미야모토 데루의 소설이 단편에서 확장한 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요시다 아키미의 원작 만화(영화는 6권까지를 바탕으로 각색됐다)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처음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을 땐 원작에 있는 걸 그대로 가져오려고 했었다. 6권의 만화를 보면서 신 중에 몇개의 대사를 고르고 추려서 초고를 썼는데 아무래도 뭔가 다이어리 같은 느낌이라 산만하더라. 애초부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보다는 스토리라인이 또렷한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이게 이야기인지 다이어리인지 모호해지는 바람에 아예 원작에 없는 장면도 추가로 집어넣는 방식으로 수정고를 쓰게 됐다. 다행히 그 방식을 원작자가 오케이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걸 보탤 수 있었고, 그 각본에 현장에서 배우들과 함께 호흡해온 것들을 더했다. 오리지널 각본으로 영화를 만들 때 해온 방식으로 찍다보니 완성된 영화를 보면 원작이 있는 작품인지 오리지널인지 구분이 잘 안 가게 완성된 것 같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원작에 이끌린 이유와 영화화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

=만화의 첫 페이지를 보면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한 세 자매와 스즈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언덕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보고 그 순간 압도당했다. ‘이걸 꼭 영화로 찍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원작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이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이야기다. 그동안의 내 영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에서 상당히 공감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이미 쓴 각본 외에 현장에서 새롭게 조율되는 대사들로 작업을 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번에는 여성들의 이야기, 사람들간의 화학작용이 바탕이 되는 작품이라 현장에서 네 배우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 같다.

=현장에서 연출을 하거나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세 가지 있는데 바로 관찰, 기억, 상상력이다. 매 작품 이걸 어떻게 균형 있게 사용할까를 생각하면서 대본을 쓴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경우엔 기억의 비중이 가장 컸다면, 이번 작품은 관찰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촬영 내내 네 사람이 모이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찬찬히 관찰했다.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도 이어폰을 계속 끼고 있어서 도청 아닌 도청이 되어버렸다. (웃음) 계속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메이크업 이야기, 쇼핑 이야기가 상당히 많더라. 여자들끼리 하는 그런 이야기를 각본과 연출에 반영했다. 배우들끼리의 현장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리허설하는 날, 시간이 있어 배우들과 꽃놀이를 갔다. 네 자매가 대본이 있는 장면과 없는 장면을 번갈아 리허설하는 날이었는데, 함께 사진도 찍고 하더니 다음부터는 나 없이도 잘 놀더라. 그날 나가사와 마사미가 먼저 다른 배우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데, 이제는 맡겨놔도 되겠다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곧 이 영화의 시작이 된다. 세 자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과거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상기하게 되고, 현재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린 이복동생 스즈는 그 과거를 묻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자매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고 있지만 이번에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TV드라마 <고잉 마이 홈> 등 감독의 작품에서 늘 숙제로 남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

=이 영화가 네 자매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 관계도 흥미로웠지만, 사실 난 그 부분보다 다른 지점에 더 많이 끌렸다. 영화를 보면 영화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버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아버지의 존재는 큰딸 사치 안에 항상 있으며, 셋째 치카는 (아버지가 즐기던) 낚시를 좋아한다. 이처럼 아버지는 네 자매 속에 항상 살아 있다. 영화에 보면 이렇게 등장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가령 돌아가신 할머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실나무를 둘러싸고 존재하고 있다. 이런 지점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게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흥미롭고 재밌었다. 결국 이번 작품에서 부재하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작업이 가장 큰 도전이었고 끌렸다고 생각한다.

-세 자매가 평생을 산 곳, 이복동생 스즈를 맞이하는 가마쿠라의 낡은 집은, 아버지가 부재한 15년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간직한 공간이자 그간의 간극을 메워주는 공간이다. 이 집의 역사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하나의 캐릭터로 작용한다.

=어려운 질문이다. 이 부분은 가마쿠라라는 장소와 도쿄의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데, 시간의 축적이나 역사가 가마쿠라에서는 아직 보인다는 것이다. 도쿄는 그것을 배척하면서 현재의 시간을 끊임없이 제시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비해 가마쿠라는 시간의 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걸 느낄 수 있는 동네와 집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원작과 영화의 배경이 그곳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집과 마찬가지로 자매들의 관계를 이어주는 화해의 도구로서 음식이 중요하게 사용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서 가고시마의 명물 가루칸(산마, 설탕, 쌀가루로 만든 가고시마 전통 과자)같이 그 지역의 음식이 중요하게 사용된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물량으로도 압도적인 분량이다. 스즈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잔멸치덮밥, 세 자매와 이복동생, 죽은 할머니를 이어주는 매실주를 비롯해 엄마가 만든 카레 등 이 영화의 모든 장면, 에피소드에서 음식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기억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다.

=원작에서 음식이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되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음식이 사람의 기억과 등장, 과거로의 인도 역할을 한다. 더불어 가마쿠라라는 지역이 식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가마쿠라는 도시생활에서는 이제 많이 잃어버린 산지에서 잡히는 바다 생물이나 야채를 먹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이다. 먹을 것과 그 고장 사람들을 이어주는 부분이 중요하게 표현되었고, 나 역시 그 부분을 영화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뒤바뀐 아버지의 딜레마를 그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이어 이번 작품도 혈연에 대해 성찰하게 해준 작품이다. 이복동생 스즈는 세 자매와 인연을 맺지 않고 영영 헤어진 채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 가장 밀접한 관계를 나누는 ‘가족’이 되어간다. 특히 세 자매가 새로운 구성원인 스즈를 포용하고, 스즈가 이 집에 적응하고 성장해나가며 어우러지는 것. 아버지와 마을 사람의 죽음 안에서 펼쳐지는 자매들의 다이어리가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순환’의 의미와 맞물려 있다.

=이건 좀 관념적일 수 있는데, 왜 바닷가인가 생각해보았다. 요시다 아카미의 이전 작품 <벚꽃 동산>은 강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강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한다.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시간에 대한 잔혹한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반해 작품의 무대를 바닷가로 옮긴 것은 작가에게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바다는 밀물, 썰물을 통해 왔다 갔다 하며 직선적인 강의 흐름과 달리 순환하는 장소다. 바다를 아이들이 자라는 장소로 선택했다는 건 시간의 순환을 보여주는 가장 적극적인 장치다.

-그 순환을 통해 네 자매가 만났는데, 마치 <아무도 모른다>(2004)의 아이들이 성장한 것 같은, 당신의 작품 속 어른스러움을 강요받은 아이들이 함께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제목이 ‘가마쿠라의 네 자매’가 아니라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되었을 때는 거기에 담긴 뜻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영화의 주인공이 네 자매가 아니라 아까 말한 집이라든지, 마을에서 쌓아온 시간이 아닐까. 지금까지도 축적되어왔고 앞으로도 100년, 200년 축적되어갈 시간에 그녀들이라는 일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에 보면 작품을 지지해준 프로듀서 야스다 마사히로나 함께해온 배우들의 죽음 등 감독의 일상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소회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연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맞닥뜨리는 죽음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져간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느꼈던 죽음에 대한 시선과 지금의 나이를 지나며 받아들이는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원작에서도 스즈와 사치가 기둥이 되는데 난 원작보다는 사치를 좀더 비중 있게 그리려 했다. 사치 안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있는데 스즈를 맡아 키우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치가 아버지의 죽음 후 스즈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하고 변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떠난 이후에, 죽고 난 이후에 그 사람을 다시 기억하고 돌이켜봤을 때 뭔가 생각이 달라지는 그런 변화를 그리고자 했다. 나의 경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각이 변해가는 경험을 했고, 내가 아버지가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는 경험을 했다. 이번 작품 역시 이 변화들을 다시 한번 영화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고, 나한테는 굉장히 리얼리티가 있는 작품이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잔잔한 관찰이 주를 이루지만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한 파경이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있다. <아무도 모른다>의 ‘스기노 아이 유기 사건’이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6년간 키운 아이가 알고 보니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유독 독한 설정들에 이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내 작품에서 센 설정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유독 몇편이 그렇게 보인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글로 비유하자면 나는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는, 일상의 말들을 나열했더니 그것이 시가 되는 것 같은, 그런 글들을 좋아한다. 이것들은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부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파란이 있다. 내가 그런 이야기에 상당히 끌리는 것 같다.

-차기작 계획도 궁금하다.

=곧 완성될 예정인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연립주택 단지에서 살고 있는 나이 든 어머니와 아내에게 이혼장을 건네받고 이혼을 당하게 되는 소심한 아들 그리고 헤어진 며느리, 이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 내가 20년 가까이 살았던 연립주택 단지와 비슷한 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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