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미술관으로 간 영화를 찾아서
2016-01-07
글 :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
영화와 현대미술의 크로스오버, 세 가지 풍경: <스탠리 큐브릭전>,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영화가 스크린을 벗어나 극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영화와 현대미술의 크로스오버는 진즉부터 진행되어왔고 올해 주목받은 작품 중에도 미술에 뿌리를 둔 영화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15년의 끝자락, 공교롭게도 미술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운 세 가지 영화, 전시가 동시에 찾아왔다. 2016년 3월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스탠리 큐브릭전>, 2016년 2월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2016년 3월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 서울관에서 진행되는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이 바로 그것이다. 각기 다른 전시를 관통하는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 영화미디어학자 김지훈 교수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미술관으로 간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남기는가. 이 전시들이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술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간략한 답이 여기에 있다. 회고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필립 가렐 감독의 인터뷰도 덧붙인다. 영화는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의 답을 미술관에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이론과 비평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영화는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수반한다. 영화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셀룰로이드 필름, 카메라, 몽타주, 운동의 환영, 영사 시스템, 실물보다 큰 스펙터클) 영화는 다른 예술(회화, 사진, 건축, 연극) 및 미디어(텔레비전, 비디오)와 어떻게 다른가? 영화의 탄생기와 영화를 ‘제7의 예술’로 인정하고자 했던 20세기 초를 거쳐 정립된 이 질문들은 물론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왔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질문의 단초가 되었다. 우리가 고전적으로 상정했던 영화의 구성요소인 셀룰로이드와 필름카메라 기반의 동영상은 디지털카메라와 프로젝션 시스템, 디지털 시각효과로 발빠르게 대체되어왔다. 물론 이것은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그런데 영화의 구성요소를 넘어서 영화의 ‘경험’이라는 차원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극장을 넘어 IP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은 물론 랩톱과 스마트폰, 태블릿PC와 같은 다양한 작은 스크린들로 영화를 체험한다. 즉 실물보다 큰 단일 스크린과 관람 자세의 부동성, 상영시간 동안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적 경험의 굳건함도 흔들린다. 영화적 이미지, 영화장치, 영화적 경험 모두가 자신의 전통적인 경계와 구성성분을 잃고 인접예술 및 미디어로 흩어진다.

이 글은 “영화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대답으로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화와 현대미술의 크로스오버를 다룬다. 영화가 어떻게 우리가 알던 영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미술관에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그려보자. 당신은 지금 어떤 가상의 전시를 관람할 예정이다. 이 전시는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방에는 영화가 현대미술로 이주하는 세 가지 방식, 또는 현대미술이 영화를 포용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풍경이 전시되어 있다. 각 방은 지금 당신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관람할 수 있는 3개의 전시를 포함한다.

<스탠리 큐브릭전>

3개의 방, 3개의 풍경

첫 번째 방. 당신은 여기서 영화에 대한 전시, 혹은 특정 영화미학이나 영화사의 주요 국면을 조명하는 전시들을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내년 3월13일까지 진행되는 <스탠리 큐브릭전>을 살펴보자. 200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 선보인 이 전시 프로그램은 유럽 주요 도시들과 LA, 상파울루, 토론토를 거쳐 서울에 상륙했다. 국내에는 2012년 말 개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팀 버튼 전>에 이은 두 번째 감독 관련 전시다. 전시공간에는 큐브릭의 전작들에서 발췌한 주요 장면들과 사운드트랙 장면들,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다수의 프로젝터들과 모니터를 통해 재생된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전문 사진작가로부터 출발한 큐브릭의 초기 이력을 만날 수 있고, 출구에는 <나폴레옹> 등 그의 미완성 프로젝트들에 대한 자료들이 작별인사를 건넨다. 이 전시의 관람 포인트는 큐브릭이 수정을 거듭한 대본들, 작품 제작을 위해 수행한 리서치 자료들, 정밀한 스토리보드와 꼼꼼한 작업 스케줄 다이어그램, 지지자들과 검열기관들에 보낸 서신들, 그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한 카메라 렌즈들,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혁신적으로 적용한 특수효과의 신비다.

이 방대한 자료와 정보들이 전시된 약 1천㎡의 공간은 고전적인 영화작가의 이념을 가장 잘 구현한 감독으로 평가받는 큐브릭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탐사선이다. 그러나 이 탐사선에는 영화작가의 명성과 신비를 재확인시키는 것 이상의 기획이 숨어 있다. 이 기획은 20세기 말 이후의 미술관이 큐브릭 같은 영화작가를 고흐나 칸딘스키, 앤디 워홀과 같은 선상에 포용하게 되었음을 전제하는 기획이다. 즉 미술이 전시와 비평을 통해 전통적으로 구축해온 초월적 작가성의 이념과 아우라를 영화작가가 충족시킬 수 있다는 기획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장 뤽 고다르, 앨프리드 히치콕, 마틴 스코시즈, 데이비드 린치, 잉마르 베리만 등에 대한 전시가 바로 이런 기획 아래 진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방. 이 안에서 당신은 우리가 영화제와 시네마데크에서 보았던 감독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크리스 마르케, 하룬 파로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아톰 에고이얀, 아녜스 바르다, 아이작 줄리언, 존 아캄프라,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샹탈 애커먼. 그런데 비디오 모니터와 필름 영사기로 설치된 이 작품들 대부분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장•단편영화들이 아니다. 즉 이 작품들은 이들 감독들이 극장용 영화와는 별도로 갤러리에서의 설치를 위해 제작한 작품들이다. 일부 작품들은 이 감독들이 극장용으로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 또한 극장에서 보던 것들과는 다른 모습들로 구현된다.

<스탠리 큐브릭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11월25일에 오픈한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을 살펴보자. 이 전시는 가렐의 작품 16편을 미술관 자체의 극장에서 회고전으로 상영하면서 함께 마련된 것으로 3편의 영화를 설치작품의 형태로 구현했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1985)는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35mm 영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상영된다. 당신은 여기에서 이 영화 특유의 빛나고도 고독감을 자아내는 흑백 이미지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극장에서 보았을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그러나 극장에서는 의식하지 않게 되는 그 영사 상황과 영사기의 생생한 소리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가렐의 또 다른 흑백 무성영화 <폭로자>(1968)와 <처절한 고독>(1974)은 각각 2채널과 3채널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약 10초간의 간격을 두고 3개의 모니터로 재생되는 <폭로자>의 전체 화면은 비디오를 사용했지만 마치 필름을 펼쳐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고독과 상처로 침잠된 3명의 여인에 대한 초상화인 <처절한 고독>은 동일한 영상을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2개의 모니터에 재생한다. 정지된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는 영화작가로서의 가렐이 현대미술(특히 앤디 워홀의 영화작업)과 맺는 관계를 확인시킨다.

세 번째 방. 두 번째 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방에도 수많은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싱글스크린 또는 멀티스크린 포맷으로 재생된다. 그런데 두 번째 방과는 유사하면서도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영상 설치작품들 사이에 이 작품들을 제작한 작가의 사진과 드로잉, 혼합매체 설치작품들이 종종 포진해 있다.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바로 작가의 이름들이다. 더글러스 고든, 스탠 더글러스, 피에르 위그, 스티브 매퀸, 샘 테일러 존슨,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레스터, 히토 스테옐, 타시타 딘, 매튜 버킹엄, 마크 루이스, 쉬린 네샤트, 아르나우트 믹, 더그 에이트킨, 에이자 리사 아틸라 등. 만약 당신이 예술영화극장과 영화제, 시네마테크에서만 시네필의 경험을 쌓았다면 낯설게 다가올 이름들이다. 1990년대부터 각종 비엔날레와 도큐멘타 등 국내외 주요 전시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온 이 작가들은 영화의 제작방식은 물론 영화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인 화면구성, 촬영기법, 몽타주, 내러티브, 특정 시퀀스, 특정 장르, 특정 영화를 자유롭게 취하고 변형시킨다. 또는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와 매체를 발전시키고 변주하기 위해 영화의 구성요소들과 영화사의 흔적들을 탐구하고 활용한다. 그 결과 이들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영화매체의 구성적 경계를 넘어서고 영화와 비디오아트, 조형예술 사이의 모호한 공간에 혼종적으로 자리한다. 또는 영화의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영화의 역사 및 운명을 성찰하는 성격도 띠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2월1일부터 문을 연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은 바로 이러한 작가들의 경향을 대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켄트리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목탄 드로잉을 여러 예술 및 매체들과 혼합한 작업들을 지속해왔다. 목탄 드로잉의 역동적인 변형을 전개하는 그의 초기 수작업 애니메이션은 얼핏 보기에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탄생이 움직이는 그림의 환영에 대한 실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켄트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장르적으로 구분되기 이전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은 목탄 드로잉을 넘어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촬영한 실사영상, 포토몽타주, 플립북, 책 페이지의 빠른 스크롤을 포함한다. 이 모든 매체들은 영화적 운동의 환영을 다양한 모습으로 환기시킨다. 초기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배우들의 과장된 퍼포먼스, 1920년대 아방가르드영화에 영향을 주었던 포토몽타주의 이미지 병치, 움직임의 인상을 창조하는 원시적 매체인 플립북, 그리고 구조영화에서 실험된 필름스트립의 빠른 스크롤을 연상시키는 책 페이지의 활용. 켄트리지의 방대한 작업은 이처럼 영화사에 다채롭게 존재했지만 지금은 쇠퇴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적 기법들을 인접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탐구한다.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

방을 나가며, 2개의 복잡한 질문에 대한 간략한 답

이 3개의 방을 통과하고 나면 당신은 다음의 두 질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왜 이런 전시들과 작품들이 번성하게 된 것인가. 도대체 당신이 알던 영화적인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이 전시들과 작품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한 답을 요구한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가장 손쉬운 답들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하기로 하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이 다양한 전시와 설치작품들은 20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예술이자 대중문화로서의 영화가 종언을 맞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셀룰로이드의 물질성과 세계를 바라보는 카메라에 근거한 시청각적 이미지로서의 영화, 영화예술을 성숙시킨 작가들이 주도한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실물보다 큰 스크린으로 집단적으로 관람하던 영화가 위기에 빠졌다는 인식이다. 영화가 100살을 맞이하던 그 기념비적 순간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한 세기가 끝났다는 깨달음을 불러왔다. 이는 많은 영화학자들은 물론, 자극적 시각효과와 가벼운 이야기들에 밀려 영화작가와 시네필의 시대가 몰락했다고 선언한 수잔 손택과 같은 비평가들도 공유했던 인식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미술관은 영화예술의 풍부한 역사를 기억하고, 디지털 이미지와 엔터테인먼트에 밀려 점점 낡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영화 이미지와 영화매체를 보존하고 갱신할 수 있는 장소로 부각되었다. 영화학자 D. N. 로도윅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영화적 지속의 경험이 사라질 때, 필름은 갤러리에서 다시 출현하여 새로운 잠재적 삶을 추구한다.”

물론 미술관이 영화를 포용한 역사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당시의 미술이 제도적, 담론적으로 포용했던 영화는 현대예술과 관심사를 공유했던 아방가르드영화들이었다. 반면 90년대 이후의 미술관은 아방가르드영화는 물론, 오랫동안 미술과는 대립된 대중예술로 인증되었던 내러티브영화와 다큐멘터리도 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과거에 예술영화나 아방가르드영화의 제도에 근거했던 감독들도 갤러리로 자신의 영화적 비전과 실험을 연장해왔다. 이런 상황은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영상 설치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은 20세기 영화의 전성기 속에서 예술가적 수업을 받은 시네필들이었다. 이들에게 영화의 요소들은 문화적 기억의 원천이자 전유와 재활용의 대상이며, 영화작가는 여타 예술에서 불가능한 기술적, 물리적, 표현적 수단들의 통제를 가능케 했던 이상적인 예술가상을 제공했다(이를 입증하듯 스티브 매퀸, 샘 테일러 존슨, 쉬린 네샤트 등의 작가들은 극장용 장편영화를 함께 제작해왔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갤러리에서 구현되는 이 영화적 설치작품들은 영화인가 그렇지 않은가? 프랑스 영화학자 레이몽 벨루르가 영화적인 영상 설치작품에 대해 말한 ‘혼돈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답은 이 둘 모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갤러리는 영화가 극장을 떠나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는 장소다. 이 설치작품들에서 당신은 영화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경험한다. 당신은 영화적 촬영방식, 화면구성, 몽타주, 내러티브, 기존 영화 이미지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극장 기반 영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 멀티스크린은 단일 채널 극장 스크린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적 몽타주를 수행하고, 내러티브의 시공간을 극장과는 다른 동시적 시공간으로 구현할 수 있다. 영화적으로 보이는 인물과 배경이 갤러리의 어둠 속에 투영될 때, 그것들은 영화 이미지의 감각적인 풍부함을 유지하면서도 회화나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관람 경험에서 비롯된다. 영화관에서 당신은 상영시간 동안 온전히 스크린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갤러리에서는 개별 관람자가 특정 작품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척도가 없다. 그러기에 영상 설치작품은 관람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산의 상황 속에 전시되는데, 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집중의 관람성과 충돌한다.

이런 모호함과 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예술은 영화매체와 영화예술의 과거를 회복하고 그것들을 미래를 향해 실험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공간에서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들은 극장을 넘어 전개되는 ‘다양한 영화들’이다. 전통적인 영화의 형식들을 차용하고 변형하면서도 그것들에서 얻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형식과 경험을 동시에 전개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들이다. 중요한 점은 이 ‘다양한 영화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전통적인 의미의 ‘유일한 영화’라는 것이다. 탄생 초기부터 인접 예술들과 소통하고 미디어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극장과 단일 스크린을 통해 여러 가지 모습들로 변이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유지해온 그런 영화 말이다. 2007년 ‘도큐멘타 12’의 영화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한 알렉산더 호워드는 “도큐멘타 12에서 영화의 장소는 영화관”이라고 선언하면서 ‘유일한 영화’가 ‘다양한 영화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다. 극장과 갤러리는 서로 수렴하면서 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은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영화는 어디에나 여러 모습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영화는 또한 극장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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