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자신의 8번째 장편 연출작 <헤이트풀8>를 들고 돌아왔다. 영화광으로서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장르 요소를 차용해 독특한 무국적 취향의 영화로 재창조해내는 타란티노 감독의 연출 세계는 이번에도 특유의 빛을 뿜어낸다. 이번에는 특히 미국의 역사를 신화적으로 다룬 서부극 장르를 빗대어 현재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 예를 들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촉발된 폭력 문제 등을 매섭게 비판한다. 물론 <헤이트풀8>는 설명만 듣다가도 지쳐버릴 묵직한 주제로 일관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야말로 타란티노 감독 아니던가. <헤이트풀8>는 유머와 서스펜스와 호러와 스릴러가 뒤섞여 결말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리고 유혈이 사방으로 튀다 못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잔인한 장르영화다. 그리고 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재미를 볼모 삼아 유려한 빛의 세계를 필름의 질감으로 담아내는 영화적 체험의 장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1992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이 공개됐을 당시 언론에서는 “미국 독립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데뷔작”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한편, 온통 백인 남자만 등장해서 총질을 해대는 (인종차별적인) 영화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다수 있었다. 보석상을 털기 위해 모인 8명의 건달 주인공을 백인들로만 설정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런 지적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유색 인종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유색 인종도 죽지 않는 영화란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 에이미 타우빈은 <저수지의 개들>을 두고 “백인 대 백인의 폭력에 관한 영화”, 즉 “백인을 죽일 특권을 백인만 소유하는 영화”라면서 타란티노 감독을 에미넴과 같은 백인 래퍼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흑인 문화를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밝혀왔던 타란티노 감독은 이같은 초창기 인종차별 논란을 비웃기라도 하듯 <재키 브라운>(1997), <데쓰 프루프>(2007),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 등 당대 흑인 대중문화와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둔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얕은 대중문화 관련 농담거리만 넘쳐날 뿐 진지한 역사성은 결여된 영화들을 만든다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과 <장고: 분노의 추적자> 를 일종의 대답처럼 선보이기도 했다. 이 두 영화는 홀로코스트와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할리우드 으뜸 영화광인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하워드 혹스, 세르지오 레오네 등의 감독들이 일궈온 서부극 장르의 방대한 역사와 전통을 뒤죽박죽 섞어 만든 통쾌한 잔혹 복수극이었다.
미국에서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개봉(국내 개봉 1월7일)한 그의 8번째 영화 <헤이트풀8>는 미국 내 흑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타란티노 감독이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이어 일종의 현대 서부극 계보 잇기를 시도하는 영화다. 물론 이번에도 그는 비범하고 독특한 장르영화의 재미를 빼놓지 않는다. 와이오밍 설원 위를 질주하는 역마차와 알 수 없는 증오심에 휩싸인 8명의 무법자들, 거기에 마치 호러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산한 음악과 서스펜스가 소용돌이치는 미스터리한 전개, 원색적인 필름의 질감 등 그러니까 영화광 타란티노 감독이 사랑해 마지않는 장르 속성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정체불명의 서부극이 탄생한 것이다.
<저수지의 개들>과 판박이처럼 닮은 구성
<헤이트풀8>는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때는 남북전쟁 종전 수년 후,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미국의 국가 정체성과 기틀을 다져갔던 시대. 링컨과 사적인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친분을 자랑하는 현상금 사냥꾼 마커스 워렌(새뮤얼 L. 잭슨)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에서 수배자 시체를 끌고 현상금을 받기 위해 레드락으로 향하던 도중에 교수형 집행인 존 루스(커트 러셀)와 그에게 붙잡힌 범죄자 데이지 도머그(제니퍼 제이슨 리)가 탄 역마차를 만난다. 다짜고짜 합승을 요구한 워렌은 곧이어 레드락의 새로운 보안관이라 주장하는 낯선 사내 크리스 매닉스(월턴 고긴스)를 만나고, 그들은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미니의 잡화점’에서 며칠 동안 머물기로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다시 수상한 네 남자, 오스왈도 모브레이(팀 로스), 샌포드 스미더스(브루스 던), 멕시코인 밥(데미안 비치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와 마주친다. 이로써 정체를 알 수 없는 8명의 무법자들이 한곳에 모이는데, 이는 보석상을 털기 위해 모였던 <저수지의 개들>의 이름 없는 8명의 건달들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인물 구성이다. 영화는 이들이 어떤 사연을 지닌 캐릭터인지 거두절미하고 오직 수다스러운 대사로만 각자의 성격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이 또한 <저수지의 개들>에서 타란티노 감독이 선보였던 캐릭터 소개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연극 세트 같은 밀실 공간에서 인물의 갈등 관계가 진행되는 점이나 시공간을 뒤섞으면서도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비선형 전개, 특정 장면을 의도적으로 12프레임으로 촬영해서 2배속으로 돌려 얻어내는 느린 화면 효과나 필름 특유의 색감 구현 등의 연출방식도 <저수지의 개들>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사실 그 무엇보다 닮은 점은 <저수지의 개들>의 주인공이었던 미스터 오렌지 역의 팀 로스와 미스터 브론드 역의 마이클 매드슨, 그리고 타란티노 감독과 무려 다섯편이나 함께한 새뮤얼 L. 잭슨, <데쓰 프루프>에 출연했던 커트 러셀 등의 배우들이 피칠갑으로 뒤덮인 역마차로 대표되는 타란티노식 영화 세계 안에서 다시 모였다는 점일 것이다.
타란티노 감독의 최근작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그의 전작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과도한 폭력 묘사에 관한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실재했던 역사적 배경을 끌어옴으로써 한층 성숙한 연출 세계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관객이 그의 영화 속 잔혹한 폭력 묘사를 농담처럼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실재 역사에서 벌어졌던 폭력의 문제를 곱씹게 되는 역설적 재미를 안겨준 것이었다. <헤이트풀8> 역시 마찬가지다. 타란티노 감독은 그의 전작인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서부극 장르의 한 계파라고도 할 수 있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중심으로 여러 다양한 장르 요소를 뒤섞는 시도를 보여줬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또 한번 타란티노식 변종 서부극을 시도한다. 이미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통해 서부극 장르 뒤섞기에 충분히 적응했던 관객도 타란티노 감독이 존 포드 감독의 역작 <역마차>(1939)의 세계를 마치 장기 적출하듯 마셰티로 난도질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잖이 당황할 것 같다. 적의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총알과 함께 스크린 가득 피칠갑 범벅이 되는 타란티노의 영화 세계 안으로 관객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끌어들이는 과감함에 심장이 약한 관객은 각오를 다져야 할지도 모르지만 타란티노 영화 세계에 익숙한 팬들은 미친 듯이 열광할 것이다.
백색 지옥에 외롭게 내던져진 한 흑인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는 마을에서 쫓겨난 술주정뱅이 의사와 창녀, 가족의 복수를 꿈꾸다가 범법자 신세가 된 사내, 상인과 귀족, 도박사 등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역마차’라는 공간에 모여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긍정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다인종 사회와 자본주의 혹은 민주주의 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이란 나라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의 묘미다. 그런데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의 기본 배경 설정과 캐릭터만을 차용한 뒤, 폭력으로 얼룩진 희망의 나라에 내던져진 어느 흑인 장교의 삶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하얀 설원 위에 흩뿌려지는 새빨간 선혈의 이미지, 그러니까 현상금 사냥꾼과 보안관, 교수형 집행인과 범죄자들이 뒤섞인 역마차 안이야말로 타란티노 감독이 마련한 변종 서부극의 맨 얼굴이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챕터는 각각 부제가 달려 있는데 마지막 장의 부제가 ‘흑인 사내, 백색 지옥’(Black Man, White Hell)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흑인 노예제도의 잔혹한 역사가 직접적으로 떠오르는 영화 속 현실은, 2015년 현재 타란티노 감독이 의식하고 있는 현실의 폭력 문제를 거울처럼 비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채 알 수 없는 분노에 찬 여덟명의 무법자들이 한데 모인 공간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바로 죽고 마는 세계에서 흑인 장교 마커스 워렌은 차분하게 어떤 사건의 범인을 색출하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짠다. 유일하게 공권력을 지닌 보안관과 어떻게 결탁할지에 대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밀실 스릴러’라는 또 하나의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는데,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대사와 표정만으로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나간다. <저수지의 개들>의 창고 장면 설정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면들도 이때 등장한다. <저수지의 개들>이 누아르 세계 안에서 건달들이 어떻게 서로의 결속을 다져나가는지, 흔히 말하는 믿음과 의리를 확인하게 해주는 감각적인 결말을 제시했다면, <헤이트풀8>는 백색 지옥에 외롭게 내던져진 한 흑인 사내의 손에 들린 쌍권총, 그것도 하필 색깔이 은빛과 흙빛인 권총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총을 어떻게 쏠 것인지를 지독하게 따져 묻는 타란티노 감독의 날카로운 폭력 미학은 <헤이트풀8>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쟁점이다. 그런데 그 문제를 지켜봐야 하는 타란티노 영화의 관객은 지루하거나 혹은 불편하고 답답해하지 않는다. 영화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되새기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는 것. <헤이트풀8>는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는 근본적인 재미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멋지게 증명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