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운명을 거슬러 살아남아라
2016-01-18
글 : 정지혜 (객원기자)
한 인간의 지독하고 처절한 생존 실화를 그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거대한 모험극이다. 전작 <버드맨>(2014)으로 쇠락한 예술가의 내적 갈등과 그 각성을 집요하게 들이팠다면 이번에는 보다 광대한 자연 앞에 인간을 던져놓고 지켜본다. 영화는 대자연, 그것도 19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에 내동댕이쳐지듯 던져진 한 남자의 생존 투쟁을 그린다. 극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이기도 한 휴 글래스는 곰의 습격을 받고 유일한 가족인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동료들의 배신을 지켜보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온다. 마치 ‘나비 효과’처럼 예기치 못한 하나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 한 개인을,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일원을 뒤흔들고 바꾸어놓는지를 묻는 것 같다. 이 질문이 생존이라는 극한의 목표와 만났을 때, 자연이라는 거대한 품 안에서 펼쳐질 때 어떤 모습으로 뻗어나갈지 궁금하다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그 하나의 대답이 돼줄 것이다. 할리우드와 타협보다는 긴장관계를 즐기는 듯한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지극히 미국적인 서사극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만남이기도 하다. 올해 아카데미는 일찌감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후보에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올려뒀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 대한 짧은 영화 읽기를 통해서는 영화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영화가 인물을 찍는 방식에 대한 궁금증을 던져봤다. 이어서 지난해 10월 뉴욕에서 진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의 인터뷰를 지면에 옮긴다.

이렇게 말해보자.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이하 <레버넌트>)는 ‘숨에 관한 영화’라고 말이다. 화면에 영상이 채 펼쳐지기도 전에 관객은 영화 속에서 들여오는 누군가의 숨소리부터 듣게 된다. 이어서 평온하게 잠든 한 가족이 보이고 뒤이어 외부의 침략으로 파괴된 공동체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보인다. 보이스 오버 레코드로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꼭 지켜줄게. 포기하면 안 돼.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야 해.’ 죽음의 문턱에 있더라도 숨을 쉬고 있다면 끝내 싸워서 살아남으라는 말이다. 영화를 끝까지 본다면, <레버넌트>가 이 말에 끝까지 응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레버넌트>에서 인간의 숨은 때론 아주 미세한 온기로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존 신호이고, 때론 거칠고 격정적인 분노의 감정을 담은 채 결코 죽을 수 없음을 피력하는 무언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사력을 다해 숨 쉬려는 자 누구인가. 그가 바로 주인공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모험가이자 개척자로 알려진 실존 인물 휴 글래스가 영화의 모티브다. 실제로 1823년에 모피 사냥을 하던 휴 글래스는 야생 회색곰의 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는다. 동료들이 다친 자신을 두고 떠나자 그들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살아남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영화는 이른바 서부 개척 시대라고 불리기 직전의 아메리카 대륙의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은 휴 글래스에 주목한다. 여기에 영화는 실제 휴 글래스의 이야기에는 없던 새로운 관계들을 집어넣었다(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마이클 푼케의 원작 소설 <레버넌트>(The Revenant: A Novel of Revenge, 2002)에 기댄 바가 크다.-편집자). 휴 글래스의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호크는 백인 아버지 휴 글래스와 인디언 포니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다. 휴 글래스의 동료 사냥꾼인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는 이들 부자, 특히 호크에 대한 혐오감을 “잡종”, “야만은 야만이다”라는 말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피츠제럴드에게 휴 글래스는 대들기보다는 “유령처럼 살라”며 아들을 단속한다. 야만 대 문명이라는 구분짓기하에서 백인 우월주의가 싹트던 시절이었다. (보통 인디언이라 불리던) 아메리칸 원주민 사회와 정을 나눈 휴 글래스와 그 피가 섞인 그의 아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백인 ‘마초’ 남성들에게는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휴 글래스는 전형적인 백인 남성 무리와는 다르다. 휴 글래스와 호크는 미국인도 아메리칸 원주민도 아닌 경계 밖의 사람들이다.

1800년대 초반 미지의 땅 아메리카는 ‘황량한 서부’(wild west)라고 불리며 개발과는 거리가 먼 원시 그대로의 상태였다. 휴 글래스와 같은 모피 사냥꾼들과 이들을 관리하는 회사의 등장은 계약하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자본이 축적되는 경제 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생활해온 토착 원시 부족들의 삶의 터전은 미국 각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드는 사냥꾼들과 유럽인들의 사냥터로 점차 바뀌기 시작한다. 사냥꾼과 원시 부족간의 대립, 아메리카인들과 아메리카 대륙 밖 개척자들간의 경쟁에 불이 붙는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시대를 영화로 옮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금광도 석유도 발견되기 이전의 시기이지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은 거대한 용광로였다. 미국, 캐나다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사람들이 모피 사냥을 위해 미국으로 유입됐다. 사냥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등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했다. 야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런 곳에서 불행하게도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시작이 아닌가.” 이냐리투는 <아모레스 페로스>(2000), <21그램>(2003), <바벨>(2006), <비우티풀>(2010) 등을 통해 외부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이 개인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해왔다. <레버넌트> 역시 휴 글래스가 맞닥뜨린 불행이 어떻게 그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자신이 천착해온 영화적 질문을 가지고 19세기 초라는 과거로 거슬러간 셈이다.

카메라의 존재가 불러오는 기묘한 현장감

휴 글래스가 거대한 야생 곰의 습격을 받으면서 그의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장면이 포착된다. 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휴 글래스를 찍던 카메라에 이상한 것이 맺힌다. 성에다. 곰의 거친 숨과 휴 글래스의 거친 날숨이 그대로 렌즈에 닿아 생긴 것이다. 카메라의 중앙부가 희뿌옇게 흐려진다. 이 순간 관객은 이 현장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카메라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너무도 극단적으로 사실적인 화면이라 연극적으로까지 비칠 정도다. 이때뿐이 아니다. 죽은 아들 곁에서 깊은 숨을 내쉬는 휴 글래스의 숨을 비롯해 인물들의 숨이 그대로 카메라에 닿는 클로즈업숏을 곳곳에서 목격할 것이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대체로 3인칭으로 움직인다. 이따금 클로즈업으로 2인칭의 역할을 하지만 그때의 의도는 분명하다. 극중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해 극중 인물과 관객이 감정적으로 교감하고 동일시되길 원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성에가 끼는 <레버넌트>의 클로즈업숏에는 쉽사리 교감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다. 카메라는 죽음 직전에 놓인 인간이 느끼는 극도의 고통, 겨우 살아서 내뿜는 인간의 숨을 관객이 그대로 직시하도록 들이민다. 이때 렌즈에 낀 성에는 인물과 관객 사이에 카메라(의 렌즈)라는 막이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한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휴 글래스가 지금 던져져 있는 야생과 관객이 앉아 있는 영화관은 스크린이라는 안전막으로 완벽히 분리돼 있다. 만약 <레버넌트>로부터 감정적인 끌림이나 울림을 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이 분리가 관객이 인물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반면 영화는 누군가의 고통을 목격하는 자로서의 관객의 위치를 아주 명확하게 강화한다.

<레버넌트>의 카메라는 영화 내내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 <버드맨>에 이어 이냐리투 감독은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버드맨>을 통해 두 사람은 유려하게 흘러가는 이음새 없는 카메라워킹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에도 카메라는 360도로 회전하며 유연하게 움직인다. <레버넌트>라는 타이틀이 뜬 이후부터 카메라는 도드라져 보인다. 극 초반에 벌어진 휴 글래스 무리와 인디언의 충돌 신만 해도 그렇다. 카메라는 마치 의식을 가진 제3자처럼 화살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소요의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훑는다. 특정 인물의 시점숏은 일절 없다. 인물들을 뒤에서 쫓아가는 3인칭 시점 역시 아니다. 카메라는 이 순간 아주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누군가를 따라가는가 싶더니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의 동작을 따라가는 식이다. 멀찍이 떨어져 출발해 인물에게 근접해가거나 그 반대로 클로즈업에서 시작해 뒤로 미끄러지듯 인물에게서 물러선다(만약 <레버넌트>를 에로틱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면 단연 카메라 무빙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휴 글래스가 곰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성적 학대의 순간처럼 그려졌다). 사냥꾼과 인디언이 말을 타고 달려나갈 때 카메라에 물방울들이 튄다. 그러다 어느새 (아마도 컷을 바꾸면서) 카메라에 묻어 있던 물방울은 사라졌다. 휴 글래스가 존 피츠제럴드와 피 튀기는 몸싸움을 할 때도 렌즈에 떨어져 있던 혈흔은 뒤이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냐리투의 야심찬 의도를 되새겨본다면,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실적이면서도 비사실적이라 의도에 부합하는지 쉽게 말할 수 없다. 영화의 대부분을 로케이션으로 촬영했고 자연광을 그대로 쓰기 위해 하루 2시간 정도의 빠듯한 촬영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이룬 영상미는 실로 놀랍다. 그럼에도 관객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는 카메라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그 평가가 엇갈릴 것이다.

장대함을 더하는 영화적 요소들

살아남기 위한 휴 글래스의 사투는 대자연과의 사투이기도 하다. 이냐리투 감독이 <버드맨>보다 먼저 준비에 들어갔던 <레버넌트>는 무려 5년여에 걸친 준비 끝에 완성됐다. 촬영을 끝낸 이냐리투 감독이 웃으며 “살아서 돌아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영하 33℃까지 내려가는 캐나다 앨버타 지역의 칼바람을 이겨내야 했고 느닷없는 고온 현상으로 눈이 다 녹아버려 난감한 적도 있었다. 결국 남아메리카 남단 티에라델푸에고로 가서 2주간 겨울 신 촬영을 마쳐야 했다. 곰이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CG가 아닌 실제 촬영으로 완성됐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 석달 전부터 배우들과 함께 촬영장소로 가서 사전 리허설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완성된 극한의 상황 속에서 휴 글래스는 묵묵히 전진해간다. 이때의 ‘묵묵히’라는 건 단지 형용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이 없다. 그의 거친 숨소리나 토해내는 듯한 끙끙거림, 눈빛 등으로 자신의 상태와 감정을 전한다. “진짜로 영화적인 순간들은 이미지로 말하려 했다. ‘휴 글래스는 누구인가.’ 그건 그의 꿈, 기억,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냐리투 감독의 이 말에서 영화의 지향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는 휴 글래스의 꿈과 기억이 중요한 장면으로 계속해 등장한다. 고난 속에서 휴 글래스가 정신을 까무룩 잃을 때마다 그의 꿈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의 환영이 등장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우라, 그러니 숨을 쉬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러한 장면들이 <레버넌트>를 설명적이기보다는 시적이며 영적인 기운의 영화로 만든다. 이러한 분위기를 돋우는 것으로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도 한몫했다. 자연 앞에 단독자가 돼 있는 휴 글래스를 따라 흐르는 현악 선율은 과함이 없다. 반면 휴 글래스와 존 피츠제럴드가 주거니받거니 서로에게 일격을 가할 때 나오는 음악은 인물의 동작과 맞물려 의외의 유머까지 만들어낸다. 이냐리투 감독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에 쓰인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을 듣고 그의 팬이 됐다고 한다. 특히 <바벨> 촬영차 일본에 머물면서 그의 곡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며 그와의 이번 작업에 상당히 만족해했다. 또한 이냐리투는 지금은 사라졌거나 파괴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적인 삶과 문화를 최대한 영화 안팎으로 가져오려 했다. 인디언 부족 출신 역사학자와의 교감은 물론, 극에서 사냥꾼 무리를 공격하는 아리카라족의 수장이나 대자연 속에서 유일하게 휴 글래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원시 부족 출신의 히쿠크 역에 실제 원주민 출신 배우를 섭외했다. 1500여명에 이르는 아메리카, 캐나다 원주민을 영화에 출연시켜 협업을 진행했다.

고난 속에서 휴 글래스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물론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다. 그러나 영화는 휴 글래스를 복수만을 목표로 하는 인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거대한 자연이 주는 기운과 휴 글래스의 꿈속 영적인 메시지를 통해 인간이란 한없이 미약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조금이나마 강인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휴 글래스가 딱 한번 카메라를 정확히 응시할 때가 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린다.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휴 글래스가 살아 있음을 똑똑히 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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