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조물주 신드롬
2016-01-28
글 : 김혜리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캐롤>

<캐롤>의 테레즈(루니 마라)는 사물과 풍경의 사진을 즐겨 찍지만 사람 앞에서는 머뭇거린다. “프라이버시 침해처럼 느껴져서”다. 토드 헤인즈 감독도 테레즈와 같은 생각이다. 본다는 행위는 한없이 내밀해질 수 있다. <캐롤>은 테레즈와 캐롤(케이트 블란쳇)의 첫 만남부터 마지막 숏까지, 응시의 연쇄로 사랑의 내러티브를 한줄 한줄 써내려간다. 두 여자는 군중 틈에서, 눈발 너머에서, 성에 낀 유리창 건너 기어코 상대를 찾아내고 시야에 담는다. 테레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고르는 캐롤을 향해 처음 셔터를 누른다. 캐롤은 테레즈가 자신을 보았으며 보았다는 사실을 필름에 새겼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나도 봤다”고 신호를 타전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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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시나리오작가 에런 소킨(<어 퓨 굿 맨> <웨스트 윙> <소셜 네트워크>)은 지난해 가을 <BBC>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본래 연극작가다. TV나 영화 작업을 할 때는 위장 취업하고 있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는데 오늘 영화의 실체를 보고나니 소킨의 표현은 작가로서 뿌리를 확인하는 멘트 이상이었다. <스티브 잡스> 속 공간은 정말 극장 세 군데다. 3막 구조를 취한 영화는 스티브 잡스(마이클 파스빈더)가 1984년, 1988년 그리고 1998년에 가졌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 개막 직전 40분을 차례대로 다룬다. 막이 오르기 직전까지 잡스가 발표장 무대 뒤를 서성이며 여섯명의 인물과 다투고 협상하는 모습이 리얼타임에 가깝게 연출된다. <스티브 잡스>는 진심으로 ‘전기영화’를 쓰기 싫었던 작가의 예술적 묘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따라가는 일대기 형식은 유행이 지난 지 오래니까 논외로 쳐도, 인물의 말년에 집중하거나 주요 업적을 중심으로 재현하는 표준적인 접근법도 에런 소킨은 배제했다. <스티브 잡스>는 가장 소극적 의미의 전기영화다. 잡스가 공인한 전기를 토대로 삼았지만, 소킨은 책에 기록된 사실 가운데 극적으로 흥미로운 일부를 취사선택해 잡스라는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목적에 봉사하도록 주변 인물을 뜻대로 배치해 세개의 시추에이션을 구성했다. 이 영화를 보고, 실제로 잡스의 세 차례 론칭 행사 40분 전에 동일 인물들이 꼬박꼬박 모여 15년에 걸쳐 연속성 있는 논쟁을 이어갔으리라고 믿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티브 잡스>가 재현하는 대상은 자연인 스티브 잡스의 초상이 아니라, 탁월한 크리에이터이자 시대의 감식자인 인물이 지녔던 교만과 독단이다. 이 부덕들은 뛰어난 인물의 비전과 동력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재능은 미덕과 양립할 수 없는가? <위플래쉬>의 플레처 선생이라면 답이 명확하겠으나 <스티브 잡스>의 대사들은 좀더 팽팽한 논쟁을 이어간다. 소킨은 같은 IT 산업의 개척자 마크 저커버그를 다룬 전작 <소셜 네트워크>보다 전기적 사실로부터 훨씬 대범하게 거리를 두고 시적 자유를 한껏 활용한다. 어찌 보면 소킨은 대선배 셰익스피어가 실존 군주 리처드 3세나 헨리 5세에 관해 했던 작업을 동시대의 위인 잡스를 통해 시도하고 있다. 타계한 지 5년도 안 된 인물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의식한 듯, 소킨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캐릭터와 실존하는 인간의 차이는, 건물을 그린 드로잉과 실제 건물의 차이다. 실제 건물은 주거를 위해 기능해야 하지만, 건물 그림은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가 나올 필요가 없다. 아름다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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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런 소킨은 스티브 잡스의 전기만큼이나 잡스가 세상에 내놓은 애플 제품의 속성에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대중이 잡스를 애도하고 일부는 숭배까지 하는 이유가 개인의 인간적 위대함보다 잡스가 만든 물건, 나아가 라이프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타당한 착안점이다. 애플 제품은 호환성이 낮고 자기완결적이다. 잡스의 스마트폰은 하나의 조약돌처럼 접합면 없이 매끈하며 처음부터 완전한 사물로 보인다. 동료들은 메모리와 속도를 늘릴 수 없는 고가 제품에 승산이 없다고 반대했지만 잡스는 결국 옳았다. 뜻밖에도 세상에는 제품을 뜯어보고 응용하고 싶어 하는 능동적 유저 이상으로, 작동 메커니즘 따위 모른 채 물신화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물건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잡스는 이를테면 조물주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도도한 디자이너였다. 닫힌 시스템을 고집했고 소스를 공개해 집단지성으로 개선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에런 소킨의 잡스는 스스로를 감히 신과 나란히 놓는 대사를 서슴지 않는다. “신도 나쁜 아버지였어. 아들을 세상에 보내 자살하게 만들었잖아? 그래도 사람들은 세계를 창조했다는 이유로 신을 좋아하지” 같은 동전의 이면으로서, 잡스는 본인이 선택하고 설계하지 않은, 삶에서 주어진 것들을 놀랄 만큼 하찮게 여겼다. 길러준 양부모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고 혈연의 중요성을 누군가 설교하면 코웃음쳤다. 얼굴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자선에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가족이나 지인의 요구에는 냉담했다. 대니 보일 감독은 소킨의 드라이한 각본이 지루함을 줄까 염려해서인지 많은 기교를 구사했다. 영화의 세 챕터를 각기 다른 포맷(16mm, 35mm, 디지털)으로 찍었고, 커다란 자막과 이미지 인서트를 넣는가 하면 벽면을 스크린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결과는 의도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미니멀한 아름다움을 의도한 단색 정육면체 조각에 베르사체풍 금박을 그려 넣은 인상이다. 결정적으로 잡스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센티멘털리즘에 양보한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앞의 110분이 보여준 도발성을 도발에 그치게 만든다. <스티브 잡스>의 이 대목만큼은 애플 제품보다 애플 제품의 CF를 닮았다.

01/15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를 보고 떠오른 질문들을 적어봤다. 주로 플롯에 관한 단편적 의문들이고 영화의 완성도와는 결정적 관련이 없는 트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의문의 목록이 매우 길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왜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곰에게 참혹하게 몸이 찢기고 다시 찢기고 한번 더 패대기쳐지는 광경을 길고 최대한 생생하게 보아야 하는가? 모피 사냥부대를 이끄는 대위(돔놀 글리슨)는 왜 하필 의사 집안 출신인가? 휴와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외모는 왜 완전한 인디언에 가까운가? 탈주한 악당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를 추격하는 고비에 대위는 부대를 두고 왜 만신창이가 된 휴와 달랑 둘이 나서는가? <레버넌트> 안의 인물과 자연, 영화적 연출은 휴의 극단적 시련과 승화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조율돼 있다. 질문을 이어가보자. 인디언에게 머리 가죽을 벗긴 트라우마로 인해 칼 가는 소리도 질색하고, ‘야만인’과의 어떤 연결도 혐오하던 인물이 급박한 상황에서 굳이 똑같은 행위를 수고롭게 본뜨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가 가정한 심오한 고리를 완성하는 것 이외의 목적이 있는가? 복수를 위해 이 악물고 기어온 휴가 적을 “자연의 손에 맡기자”고 돌연 결심하는 순간 인디언 일행은 왜 하필 지척에 도착하는가? 이 답은 짐작할 수 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에게 ‘인디언=성스런 자연’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레버넌트>의 원주민들은 아포리즘을 읊고, 환상 속 인디언 아내는 공중부양하며 오로지 휴의 생존 투지를 지속하기 위해 존재한다. 휴의 꿈 장면은 ‘문명의 야만’을 주제로 한 조각공원을 방불케 한다. 모피 사냥꾼을 안내하는 휴가 덜 나쁜 백인인 이유는 한때 인디언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휴가 죽은 말의 뱃속에서 추위를 피하는 장면은 자연의 힘으로 거듭남을 표상하고 시체로 위장한 주인공의 마지막 총격도 테마를 반복 강조한다. 초반 롱테이크 전투 장면은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이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시점의 유희를 경이롭게 재연한다. 그러나 초점을 맞춘 인물이 죽어나가면 다음에 도륙될 인물로 카메라가 정확히 이동하며 꼬리를 무는 이 ‘죽음의 트래블링’은 숏의 내용보다 설계가 훨씬 잔혹하다. 광활한 자연과, 무덤 같은 상황에 갇힌 주인공의 주관적 감각을 동시에 표현하는 <레버넌트>의 기술은 확실히 최상급이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의 대립은 <플래툰>에서, 이미지는 <뉴 월드>에서, 휴의 배경은 <늑대와 춤을>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레버넌트>에서 디카프리오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마약 장면에서처럼 무릎과 배로 힘겹게 움직인다. 목소리도 겨우 끄집어낸다.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음은 확실하지만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어려운 연기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이 인물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됐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때가 무르익어 오스카상을 받겠지만, 이왕이면 <에비에이터>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지극히 디카프리오스러운 호연이 인정받았다면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더욱 기꺼웠을 것이다.

<빅 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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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의 투덜이

<빅 쇼트>의 주인공은 2008년 미국 금융 위기를 예측한 투자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비관론자도 아니었고 예지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다. 다만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분석해 이윤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런데 실상을 외면하고 부조리하게 돌아가는 시장과 정책이 그들을 뜻하지 않은 반항아로 만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플레이어 가운데 가장 비사교적인 마크 바움이, 관객이 느낄 분노와 허탈함을 대변한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크는 모든 불합리를 지적해야 속이 시원한 불평꾼이며 그의 프로페셔널리즘은 힘 있고 돈 많은 상대 앞에서도 누그러지지 않는다. 스티브 카렐이 연기하는 마크의 주장은 반복적이고 시끄럽지만 <빅 쇼트>를 제작하게 만든 분노와 에너지를 뭉뚱그리고 있다. 그는 금융 위기를 초래한 사회에 대해 한탄을 넘어 깊은 비탄을 느끼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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