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복수는 나의 것> [1]
2002-03-22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박찬욱의 복수 “<...JSA>는 잊어라”

반골 감독, 파괴된 인간들을 메마르게 그려내다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라는 연기파 배우 3인방이 출연하며 <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감독 박찬욱이 연출하는 신작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영화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복수는 나의 것>이 3월15일 첫시사회를 가졌다. 전작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만들었다는 <복수는 나의 것>은 과연 어떤 영화로 태어났을까? 영화의 면면을 뜯어보고 감독의 말을 들어본다. <복수는 나의 것>은 3월29일 개봉한다.


“전 착한 사람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복수는 나의 것>은 말 못하는 청년(신하균)의 대사로 시작한다. 누나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유괴를 결심한다.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납치된 딸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자 아버지(송강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착한 두 사내가 소용돌이치는 불운에 휩쓸려 버둥거리는 이야기이다.

“그 새끼들 찾으면 어쩔 생각이니?” 청년의 애인(배두나)이 묻자 죽은 딸의 아비가 답한다. “…죽여야죠.” <복수는 나의 것>은 괴물과 싸우다 괴물로 변하는 인간을 그린 영화다. 딸의 시신을 해부할 때 차마 두눈 뜨고 지켜보지 못하던 아버지는 자살한 청년의 누나가 부검실 테이블에 올라 절개되는 순간, 따분한 듯 하품을 한다. 폭력은 야금야금 인간의 혼을 갉아먹는다. 청년은 야구 방망이로 사람의 머리를 박살내고, 아버지는 유괴범에게 전기고문을 가한다. 운명의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하면서 그들의 심성은 망가진다. <복수는 나의 것>의 처음 제목은 ‘파괴된 사나이’였다.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그린 영화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면서 웃다 울며 극장문을 나섰던 기억을 돌이켜볼 때 이 영화는 분명 낯선 느낌을 줄 것이다.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반대로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며 느끼는 슬픈 정서는 화면 안에서 폭발하지 않는다. 지반이 허물어지면서 자꾸 발을 헛디디는 듯한 불안감만 영화가 끝나도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누른다. <복수는 나의 것>은 그런 점에서 박찬욱의 전작보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을 닮았다. 두편 다 추락하는 리듬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아득한 느낌을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하드보일드”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필름누아르의 구도와 조명을 택하지 않으면서 전개되는 이 영화의 어법은 애잔한 음악이 개입할 자리조차 내주지 않는다. 슬픈 선율 대신 웅웅거리는 공장의 기계음, 뼈가 부서지는 소리, 여자의 신음소리, 비명소리가 쩡쩡 울려퍼진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감동을 위한 영화적 수단을 총동원해 만들어진 영화라면 <복수는 나의 것>은 거꾸로 과연 가장 적은 영화적 수단을 써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실험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첫시사회의 무대인사에서 박찬욱 감독은 “지금까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내 취향에 맞는 영화”라고 밝혔다. 그 말은 시사회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선 기자, 평론가, 영화인들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한 표정을 예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박찬욱은 유머와 감동이 넘치는 또 한편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기대한 이들을 보기좋게 배신했다.

나의 테마는 폭력

박찬욱은 언젠가 “본의 아니게 되풀이하는 나의 테마는 죄짓는 행위로서의 폭력과 구원받으려고 발버둥치다 저지르는 폭력”이라고 말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폭력’은 하나의 키워드이다. 그것은 배를 갈라 신장을 꺼내는 것처럼 누구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가난’이나 ‘유괴’처럼 보이지 않는 종류도 있다. “저 새끼야, 너 짜른 게? 씨발놈… 저 차 한대면, 월급 삼년은 주겠다. 하여튼 이래서 빨리 혁명이 일어나야 된대니까!” 청년의 애인은 이렇게 말하며 유괴를 권한다. 부잣집에서 남아도는 돈으로 병든 가난뱅이를 고친다면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냐는 그녀의 논리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시킨다. 전당포의 돈많은 노파를 해충이라 여기는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벌레죽이는 것으로 착각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피가 흐르는 여자는 세상엔 “착한 유괴가 있다”며 수술비가 절박한 청년을 꼬드긴다. 그것은 행동에 옮겨지기 전까지는 작은 착오에 불과했지만 일단 일이 벌어지면서 차츰 수습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

여기서 박찬욱은 모든 길이 늪으로 나 있는 운명을 축조한다. 청년이 장기밀매단의 꼬임에 빠지지 않았다면 유괴는 필요치 않았다. 청년의 병든 누나가 동생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괴된 딸이 조금만 일찍 수영을 배웠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벼랑쪽으로 걸음을 뗀다. 조금씩 엇나가는 행보가 치명적으로 나쁜 선택을 낳고 나쁜 선택이 더 나쁜 선택을 잉태한다. 한발이 수렁에 빠졌을 때 영화 속 인물들은 복수를 결심한다. ‘복수’가 최악의 선택임을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깨닫지 못한다. 성경구절대로 “복수는 나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통쾌한 복수’의 관습을 공격하다

숱한 서부극, 액션영화, 무협영화가 다뤄온 ‘통쾌한 복수극’을 이런 불행한 결말로 바꿔놓은 것은 그야말로 박찬욱의 반골기질이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등 장편 4편에 단편영화 <심판>까지 5편의 필모그래피에서 박찬욱은 눈에 두드러지는 주제나 스타일의 공통점을 보여주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기존의 것을 뒤집어보거나 명백해보이는 사태의 이면을 보려 한다는 점이다.

92년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은 홍콩누아르에서 숱하게 봤던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보스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 깡패이야기를 그는 관찰자의 내레이션에 의존해 풀어갔다. 장르영화의 관습을 거슬러보겠다는 의도에 걸맞은 작품이 되지 못했지만 박찬욱은 데뷔할 때부터 주류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97년작 <삼인조>는 70년대 칼빈총 강도로 유명했던 이종대, 문도석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박찬욱은 모두가 무시무시한 악인이라 여겼던 무장강도를 자살광과 저능아라는 웃기는 커플로 바꿔버렸다(그가 <삼인조>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

엄청난 흥행성공 때문에 <공동경비구역 JSA>의 연출을 승낙할 당시 환경이 잊혀져서 그렇지 이 영화 역시 주류의 시각에 기댄 작품이 아니다. 그는 판문점을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라 여겼고 휴전선 북쪽 초소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형제처럼 지냈다는 불온한(?) 상상을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단편영화 <심판>도 만만치 않게 불순하다. <심판>은 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의 보상금을 타려고 유가족 행세를 하는 파렴치한 부부를 그리고 있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참사에서 이런 상상을 하는 감독이 흔할 것 같지는 않다.

박찬욱은 흔히 ‘영화광’ 감독으로 불린다.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던 과거 때문에 조장되는 ‘영화광’이라는 서명은 그러나 정작 그의 영화세계를 논하는 데는 별 쓸모가 없어보인다. 지금까지 내놓은 5편의 영화를 박찬욱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봤을 때 영화광의 영화라고 단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유머감각만 떼놓고 보면 또 다른 소문난 영화광 김지운 감독과 비슷한 면이 있다. 한마디로 ‘쿨’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지뢰밟은 이병헌이 울먹이자 송강호가 “니가 가라 그러지 않았어” 하는 대목과 <조용한 가족>에서 송강호가 자살하러온 사내의 질문에 “나 학생 아니라고 그랬지 뭐” 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라. 심각한 사태를 뒤집는, 허를 찌르는 블랙유머의 정수가 들어 있다. 묘한 것은 그런데 두 감독이 내리는 영화적 결론이 완전히 반대라는 사실이다. 김지운이 판타지로, 희극적 결론으로 끌리는 동안 박찬욱은 점점 더 사실적인 묘사에, 비극적 결말에 가까워진다. 박찬욱의 영화 다섯편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은 몇 안 되며 뒤로 갈수록 생존확률은 떨어진다. 그가 김지운보다 비관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찬욱이 영화적 유희에 매달리는 감독이라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일까?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 <공동경비구역 JSA> 스타일의 웰메이드 대중영화에 대한 기대를 배반했듯 박찬욱의 다음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과 꽤나 다른 스타일일 것 같다. 그는 이런 점에서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허진호처럼 일찍 자기 색채를 드러낸 감독들과 계보가 다르다. 그는 하루아침에 대가로 대접받은 천재 감독이 아니며 히치콕이나 오즈처럼 똑같은 주제나 스타일을 변주하는 작가도 아니다. 어떤 장르에서도 걸작을 만들어내는 하워드 혹스나 스티븐 소더버그가 그가 걸어갈 길에 서 있는 인물들일까? <복수는 나의 것>은 걸작으로 추어올리긴 쉽지 않아도 “내 방식”을 고집하는 박찬욱의 미래를 낙관하기엔 충분한 영화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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