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복수는 나의 것> [2] - 박찬욱 감독 인터뷰
2002-03-22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숨막힌다고? 섣불리 희망을 말할 순 없다”

-이 영화에 대해 ‘누아르’라고 안 하고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한국에서는 필름누아르라는 말이 오용되고 있다. 롱코트를 휘날리면서 쌍권총을 쏘고, 느린 화면으로 멋을 부리는 걸 떠올린다. 실제 누아르영화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스타일을 강조한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누아르의 근원을 찾아간다는 뜻에서도 하드보일드라는 말을 썼다. 스타일보다 리얼리즘을 강조하고, 건조하면서 비장한 분위기라고 할까. 하지만 장르를 정하고 그 개념에 맞춰 만든 건 아니다. 우리끼리는 ‘코믹에로, 액션호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믹한 요소가 있더라도 쉽게 웃기가 힘들다. 영화의 흐름도 관객을 풀어주는 대목 없이 계속 긴장하게 만든다.

=해고된 노동자가 칼로 자기 배를 그으며 자해할 때, 피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란다. 이런 거. 난폭함, 심각함이 조크와 만났을 때 자아내는 웃음. 내가 좋아하는 부조리한 유머이지만 실제로 관객이 그렇게 웃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웃을 분위기를 마련해주고 웃기는 대목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쉬어가는 장면 없이 끌고가고 싶었다. 영화가 가진 감정의 격렬함에 비해 외양은 평온하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계속 긴장하고 그러다가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몸서리를 치게 만들고 싶었다. 또 인물들이 감정표현을 안 하니까 관객이 폭발 직전의 상태로 내몰리는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면 세게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더 편안하게 보면 웃을 것 같고, 실제 주변 사람 중에도 두번째 보면서 낄낄 대는 이가 있었다.

-류(신하균)나 동진(송강호) 모두 순한 사람인 것 같은데 둘 다 복수하는 방식이 무척 잔인하다. 이 영화 촬영하기 전에 분위기가 코언 형제 영화 같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잔인함이 류나 동진이 겪은 아픔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파고>처럼 어떤 목적이나 감정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희화적인 면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있었는가.

=평소 참고 억누르고만 살던 사람의 증오심이 갑자기 폭발하면 더 난폭하고 잔인해진다. 그게 류의 경우다. 동진은 류를 찾아다닐 때 그가 어디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을 거다. 잡으면 어떻게 죽일지를 생각했을 것이고, 딸이 받은 고통을 그대로 혹은 배가시켜 전할 시나리오를 짜놓지 않았겠는가. 이들은 자기 실수로 다른 사람이 죽거나,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죽인 뒤에 더 잔인해진다. 이들 안에 있는 죄의식이 이들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런 아이러니가 있지 않은가. 그건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상하게도 내 영화에는 꼭 죄의식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하는 것 같다. 코언 형제는 내가 어떤 맥락에서 언급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비슷하지 않은 것 같다. 굳이 견준다면 코언보다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그것도 난폭해진 카우리스마키라고 할까. 나는 코언 형제의 너무 정교하고 계산적인 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한 이들이 계속 잔혹해지는 이야기를 끌고가기가 힘들지 않았는가.

=마음이 무거웠다. 이상하게 내 사생활이 신경쓰이는 거였다. 내 딸이 실제로 동진의 딸과 동갑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중간중간에 촬영한 걸 볼 때 내가 하는 얘기가 이렇게 무거운 건가 새삼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섣불리 희망이나 행복을 말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행복은 항상 순간인 것 같다. 전체로는 괴로울 때가 많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노래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영화에 의하면 복수만이 나의 것이고.

-이 영화를 구상한 계기는.

=유괴는, 범행 당사자는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주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에서 가장 비난하는 범죄다. 이런 유괴라는 범죄의 특성에 더해, 계급문제에 집착하는 이라면 자본가의 돈을 뜯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는 기업해서 번 돈이지 남을 착취한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괴리에 착안했다. 동진은 끝까지 자기가 왜 범행의 대상이 돼야 했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자신이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취향에 맞는다고 말했는데, 어떤 취향인가.

=강하고 센 것. 잔재주 부리지 않고 건조하지만 그게 더 충격이 큰 것. 부조리한 분위기와 유머가 많은 것…. (앞으로도 그 취향대로 찍을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건조하지 않다. 89년 의문사한 이내창 사건을 영화로 만들려 하는데, 그것도 건조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별로 개입될 여지가 없는, 사회권력에 의한 비극을 찍을 때는 감정을 실어서 묘사하고 이번 영화처럼 신파가 되려면 끝도 없이 신파가 될 영화는 건조하게 찍자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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