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따거’의 인생
2016-03-03
글 : 이주현
자서전 <성룡: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를 통해 본 인간 성룡

“친구여, 평범하지 않은 일을 평범하게 해내고, 쉬운 일을 쉽지 않게 해냈군요.” 동료 배우 유덕화의 말이 정확하게 성룡이 걸어온 길을 설명한다. 성룡은 반백년 가까이 온몸을 던져 액션영화의 지평을 넓혀왔다. 새로운 길을 닦는 과정이 쉬웠을 리 없다. 다만 성룡은 겁이 없었고 꿈이 많았다. 이제 막 출간된 성룡의 자서전 <성룡: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에는 그 겁 없는 도전과 실패의 반복된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거기에 천둥벌거숭이처럼 활개쳤던 어린 시절과 할리우드에 진출해 맛본 쓴맛과 단맛의 경험, 유명인들과의 일화와 연애담까지 담겨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루룩 넘겨 읽게 된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성룡의 인간적 모습에서 깨닫게 되는 바가 많다. <성룡: 철들기도 전에 늙었노라>에 실린 귀한 사진들과 함께 인상적인 이야기를 추렸다. 현재 그는 영국 런던에서 피어스 브로스넌 등과 함께 <더 포리너>를 맹촬영 중이다. 홍콩, 중국, 할리우드, 유럽, 그렇게 성룡은 지금도 지치지 않고 달린다!

<프로젝트 A> 1983

<프로젝트 A>에서 성룡이 길에서 추격전을 벌이다 깃대를 타고 올라가 시계탑 꼭대기로 뛰어올라간 다음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유명한 ‘시계탑 장면’의 탄생 비화가 흥미롭다. “스탭들이 먼저 내 몸무게와 같은 무게의 모래주머니를 시계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렸다. 모래주머니가 차양지붕 두개를 뚫고 수직 낙하하더니 바닥에 닿는 순간 퍽 터져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날마다 시계탑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뛰어내리면 머리가 깨지고 조금만 더 뒤로 뛰면 다리가 부러질 판이었다. 어떻게 하지? 매번 속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고 찍어보자고 다짐했지만, 시계탑 끝에 설 때마다 모래주머니가 터지던 장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곤 했다.” 더 이상 촬영을 미룰 수 없었던 성룡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시계탑 끝에 매달렸다. 비록 몸은 무쇠가 아닐지언정 무쇠 같은 심지로 덤벼 완성한 <프로젝트 A>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1983년의 그 영화가 내게 특별한 가장 큰 이유는 영화인으로서의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트레이드마크, 즉 고난도 스턴트 신을 대역 없이 직접 찍는 배우라는 이미지를 얻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배틀 크리크> 1980

<사형도수>(1978), <취권>(1978), <소권괴초>(1979) 등이 연이어 흥행하면서 성룡은 당시 몸담고 있던 영화사 골든하베스트의 계획에 따라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할리우드에서 찍은 그의 첫 영화는 로버트 클루즈 감독의 <배틀 크리크>다. “영화 촬영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홍콩의 촬영 방식에 길들여진 나는 뭐든 원리 원칙대로 하는 미국식 촬영 방식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복잡하고 현란한 동작을 짜서 연기하는 데 익숙했지만 감독은 스토리보드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동작을 요구하며 내가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했다. 나는 화가 나서 ‘성룡이 어슬렁거리는 걸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라고 감독에게 항의했다.” 결과는 성룡의 예상대로였다. “영화가 개봉된 뒤 몰래 혼자 극장에 가보았는데 관객도 몇 사람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이미 최고 스타인 나였지만 미국에서는 아무도 내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프로텍터> 1985

“할리우드에서 돌아온 뒤 3년쯤 흘렀을 때 동료들이 다시 한번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려보자고 나를 설득했다. ‘미국 관객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터프가이에 열광하고 있어. 터프가이 하면 성룡을 따라올 사람이 어디 있어?’ 그때 그들은, 아니 나조차도 나에 대해 잘 몰랐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차가운 킬러의 이미지였지만, 나는 평범해 보이지만 아무리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남자로 관객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내가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는 터프가이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역할로 성공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찍게 된 영화가 <프로텍터>다. 제작진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터프가이 이미지로 나를 중무장시켰다.” 실패가 반복되자 성룡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미국판과 다른 아시아판을 직접 찍었고, 영화는 홍콩과 일본에서 호평받았다. “만약 또다시 할리우드에 진출해야 한다 해도 최소한 누군가 이미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소룡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모두 훌륭한 배우지만 그들은 내가 모방하거나 뛰어넘어야 할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성룡이니까.” 그렇게 성룡이라는 신화에 날개가 돋치기 시작했다.

칠소복

성룡은 소학교 1학년에 장난을 많이 친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프랑스 영사관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그 무렵 호주 주재 미국 영사의 주방장으로 가게 되었고, “사부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면 장난기도 수그러들 것이고 또 한 가지 재주를 배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부모의 판단으로 7살에 우점원의 중국희극학원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사부의 이름 한 글자를 딴 예명을 사용했다. 희극학원에서 성룡은 원루로 불렸다. “어느 날 사부님이 우리가 첫 공연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가슴이 설렜다. 게다가 학생들 중 제일 우수한 몇명을 뽑아 주인공을 시키겠다는 사부님의 말씀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드디어 사부님이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원룡(홍금보), 원태, 원화, 원무, 원규, 원표….’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나고 마지막 한명만 남았다. 누굴까? 나일까? 사부님의 헛기침 두번에 아이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지막 한명은 원루!’ 나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공중제비를 훌쩍 넘으며 앞에 나가서 대열에 함께 섰다. 훗날 영화계를 주름잡은 ‘칠소복’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다.” 각자 주특기를 가지고 있던 칠소복. 성룡의 특기는 달리기였다. “나의 달리기는 대사형(원룡)에게 맞으며 단련된 것이다. 맞아도 되받아칠 수 없으니 도망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진에서 제일 왼쪽이 성룡이다.

<데몰리션 맨> 1993

성룡과 실베스터 스탤론의 첫 만남은 스탤론의 <데몰리션 맨> 촬영장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날 홍콩에 있는데 회사 직원이 와서 실베스터 스탤론이 미국에서 열리는 자기 영화의 시사회에 나를 초청했다고 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인 그가, 나의 우상인 그가, 나를 자신의 시사회에 초청했다니!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동안 실베스터 스탤론이 왜 나를 초청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짐작가는 데가 없었다.” 미국에 도착한 성룡은 스탤론의 집을 구경하고 <데몰리션 맨> 촬영장에 들어섰다. “그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덥석 끌어안았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대스타 웨슬리 스나입스도 나를 보고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를 잡아당겨 스나입스에게서 떼어냈다. 마치 ‘내 친구니까 나만 안을 수 있어’라고 투정을 부리듯 말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말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당신 영화를 봐요. 당신의 액션을 보고 배우죠. 당신 정말 대단해요. 여기까지 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미국의 모든 스턴트팀이 나의 영화를 교재로 삼고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제일 자랑스러웠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차이니즈 조디악> 2012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제작비를 아끼지 않는다. ‘성룡의 영화를 찍을 때는 개런티를 일시불로 받지 말고 월급제로 받아야 한다. 월급으로 받으면 아마 그 돈으로 집도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 영화가 오래 찍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전세계 경매장에서 고액으로 거래되는 12지신 청동상의 행방을 추적하는 보물 사냥꾼의 이야기 <차이니즈 조디악>에도 막대한 제작비가 들었다. 촬영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됐고, 12지신 청동상을 제작하는 데도 꽤 큰돈이 들었다. 당시 12개의 청동상 가운데 행방이 확실한 것은 7개뿐이었다. “이 영화를 찍는 동안 영화의 힘으로 청동상을 되찾아올 수는 없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2013년 4월 프랑스 피노 가문이 토끼와 쥐 청동상을 중국에 돌려보내겠다고 발표했다. 바로 <차이니즈 조디악>이 개봉하고 몇달 뒤에 말이다.” 별개의 일이지만, 성룡은 중국화의 대가 황영옥 선생에게 부탁해 <차이니즈 조디악>의 제목을 친필로 받기도 했다. 두 사건 모두 충분히 떠들썩하게 회자되기에 충분한 일이었지만 성룡은 그것을 ‘대단한 일’로 포장하지 않았다. 자서전의 공저자인 주묵은 이렇게 썼다. “다른 스타였다면 아마도 나는 몇번의 보도자료를 쓰고 몇번의 인터뷰를 섭외했을 것이다. 하지만 ‘따거’에게 그건 두 가지 기쁜 일일 뿐이다. 그게 전부다.” 이런 순수한 대인배라니.

사진제공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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