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세포만 놓고 보면 단순한 형태인데 어째서 이것들이 모이면 정신(精神)이라는 복잡한 것이 생길까. 흔히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선택을 이어가는 걸까. 정재승 박사는 지난 10여년간 이 질문의 답을 찾아왔다. 이른바 뇌과학, 그중에서도 의사결정 신경과학 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의사결정을 하기까지 인간의 뇌 속에서 벌어질 일들을 분석하는 데 있다. 이 연구를 통해서라면 어떠한 요소들이 인간의 기억을 형성해가는 데 영향을 주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또 자살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는 우울증이 감기처럼 지나갈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때 각각의 뇌의 차이를 살펴 의학적 진단이 가능해진다. 한편 이때의 자살은 개인적인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뇌가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고 판단해 내린 결과로서 인간의 합리적 사고 과정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뇌과학에 뿌리를 둔 그의 이러한 연구는 미학, 정치학, 건축학, 마케팅 분야 등과 통섭(統攝)한다. 정재승 박사는 연구자로서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가 좀더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데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에 관한 내 연구가 기여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국의 자살률을 낮추는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 사회는 누군가의 자살을 무덤덤히 받아들이게 됐다. 가슴이 아프다.” 정치•사회적 현상을 이해하고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는 과학, 인간을 선한 선택으로 이끄는 과학의 가능성. 그 실마리를 찾으려는 정재승 박사를 만났다.
-뇌과학(신경과학) 연구를 하면서 우울증, 자살, 불안장애 등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자살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인간이 충동적으로 자살을 한다고 본다. 내 연구에서는 인간이 나름 합리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한다고 본다면 자살은 살아가야 할 합리적인 근거가 부족할 때 발생한다고 본다. 자살을 일종의 의사결정장애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의 의사결정 과정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익을 따질 때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판, 타인의 신뢰 등이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어떻게 다른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그 차이를 발견해보려 한다. 학자로서 지금의 내 화두는 자살을 시도하려는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이다.
-의사결정 신경과학은 타 학문 영역과의 통섭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의학, 심리학, 마케팅학뿐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분석도 가능하지 싶은데. 실제로 정치현상 분석 의뢰를 받은 적도 있나.
=8년 전 대선 때 처음 의뢰를 받았다. 각 당 대통령 후보자의 지지자들에게 지지 후보의 공약을 보여주고 뇌의 활동을 기록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공약이라고 하면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사실은 다른 후보자의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뇌의 영역은 합리적 판단이 아닌 종교적 체험을 할 때의 뇌활동과 유사하다. 3년 전 대선 때는 부동층을 연구했다. 피험자들에게 ‘좋다’는 단어가 나오면 왼쪽 버튼을, ‘싫다’는 단어가 나오면 오른쪽 버튼을 누르게 했다. 이때 버튼에 대선 후보 사진을 뒀더니, 피험자들이 버튼을 누를 때 멈칫하더라. 그 시간차를 분석해 어떤 후보를 좀더 선호하는지를 알아냈다. 피험자들이 실제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와 비교했더니 80% 가까이 맞아떨어졌다. 겉으로는 부동층이라고 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뽑고 싶은 사람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내재적 선호를 측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는 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선택을 할 때 내게 이득이 되는 게 뭘까를 고려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뇌의 일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과거의 경험,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평판, 때론 상대방의 외모나 성적 매력 등이 고려된다. 도무지 이 맥락에서는 고려될 필요가 없는 것들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득이라는 단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때론 누군가와 협력하고 선의의 기부도 하며 심지어 목숨을 바쳐 타인을 구하기도 하는 게 아닐까. 왜 필요한지 모르면서도 친구의 부탁이라 보험에 들기도 하잖나. (웃음) 복잡한 존재라는 게 인간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복잡한 인간을 선의의 결정으로 이끌 수 있게 하는 방편은 무엇이라고 보나.
=가장 중요한 건 자기 객관화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의 방식이다. 자신의 관점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이 어떨지를 생각하고 상대에게 공감한다. 나아가서는 자신과 상대 모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를 하면 연애하며 싸우더라도 개선의 여지가 있다.
-아름다움(美)이라는 것 역시도 측정 가능하고 보편적인 원리로서 설명해보려는 신경미학(Neuroaesthetics)에의 관심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그림을 워낙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그림을 보는 과정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을 해보고 싶어졌다. 특히 눈이 어떻게 예술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말이다. 어떤 정보도 없이 예술작품을 봤을 때와 작가의 말이나 평론가들의 평가처럼 작품을 둘러싼 각종 정보를 알고 다시 그림을 봤을 때 사람의 미적 경험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와 같은 거다.
-5년 전, 2001년 발간한 <과학 콘서트>의 개정증보판을 내면서 서문에 ‘더 깊이 있는 과학, 더 성숙한 통찰력으로 2021년의 너(과학 콘서트)를 기다리마’라고 끝맺었다. 5년 후 과학의 미래, 혹은 자신의 연구의 방향을 가늠해보자면.
=<과학 콘서트>를 처음 출간했을 때만 해도 물리학의 관점에서 복잡한 사회현상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접근이었다. 이후 이런 접근의 책들이 많아졌다. 또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처럼 영화 속 과학 이야기로 책을 낼 때만 해도 새로운 시도로 읽혔다. 과학이 아닌 듯 보이는 분야에서 과학을 찾는 작업이 흥미롭다.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판을 낸 지 10년쯤 되는 해에는 <과학 콘서트2>를 내볼 마음도 있다. 여러 학문들이, 또 각 학문이 관심두는 여러 현상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단순히 새로운 관점으로 현상을 들여다본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파편화된 인간의 지성사를 한데로 모아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즐겨찾기
평소에 인문, 사회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의 촉수를 뻗치는 정재승 박사는 최근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은 10만년의 인류 역사를 인지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특히 뇌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통찰을 제공한다. 진화사회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최신작 <멸종하거나, 진화하거나: 로빈 던바가 들려주는 인간 진화 오디세이>도 흥미롭다. 사회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동류의식, 언어, 문화는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한다. 과학과 이야기의 행복한 결합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미드 <프린지> <하우스> <넘버스>를 보시라고 권한다. 또 MIT가 만든 ‘OpenCourseWare’(ocw.mit.edu/), 스탠퍼드가 제공하는 ‘Onlinecourses’(http://online.stanford.edu/courses)에 들어가 건축, 인류학, 경제학, 미학 수업을 찾아듣기도 한다. 내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도 하고 그곳 교수들의 교육법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Fiction vs Fact
<이터널 선샤인> 속 기억 삭제
Fiction
지난해 재개봉해 다시금 주목받은 작품 <이터널 선샤인>(2004)은 기억 삭제라는 장치를 통해 사랑의 불가해성을 묻는 영화다. 조엘(짐 캐리)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은 이별을 앞두고 서로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시술을 받는다. 시술 도중 의식의 한 부분이 깨어난 조엘은 자신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후회하다 행복한 기억만이라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우리의 뇌 속에서 기억은 어떻게 존재하고 또 사라지는 것일까.
Fact
“<이터널 선샤인>은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내 첫 번째 지도학생에게 추천한 영화다. 영화처럼 기억이 사라질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함께 실험을 했다. 실험 쥐에게 트라우마를 주고 그걸 지울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서 트라우마를 없애는 실험인데 성공이었다. 실제로 우리의 뇌에는 기억을 지우는 중추가 있다. 감당하기 힘든 기억들은 머릿속에 두고 있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그 기억을 지우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데 그걸 잘 자극해주면 트라우마도 지울 수 있고 정상적인 생활도 가능해진다.”
이세돌 기사 vs. 알파고
인간 vs. 컴퓨터의 대결의 승자는? 3월9일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의 바둑 대결에 대한 정재승 박사의 의견이 궁금했다. 아직까지는 이세돌 기사가 우세할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네이처>에 알파고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하는지가 나와 있다. 단기 전략으로 최근 이세돌 9단이 둔 수의 기록을 학습하는 식이다. 이번 경기의 의미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이세돌 기사의 과거 경기와 그가 놓은 수라는) 과거의 경험을 알파고가 학습하고 딥 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추론의 과정을 거치는 접근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인간처럼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과거를 통해 추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도전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알파고에게 경험을 더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시간은 알파고의 편이다. 이번 대결의 결과와 상관없이 알파고로서는 이세돌 9단과의 대국이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될 테고 훗날 이세돌 9단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Fiction vs Fact
<그녀>처럼 OS와 사랑을?
Fiction
<그녀>(2013)는 모든 게 음성인식으로 움직이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대필작가로 사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운영체제(OS)를 만난다. 사만다는 목소리만으로 테오도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사만다는 자신에게 결여된 육체성에 혼란스러워하다 어느 순간 그 생각을 역전시켜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사랑할 때 느끼는 인간적 결여를 인공지능이라는 매개를 통해 통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Fact
물리학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던 시기의 정재승 박사는 SF물 속 장면들을 보고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를 따져보는 질문 던지기를 많이 했다고 말한다. 스스로 뇌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졌다는 현재 그는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저 인물이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지적 능력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들과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 등의 문제에 관심이 더 간다. 이런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들이 흥미로운데 그중 <그녀>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굉장히 발달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나 지금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도 그렇고, 인공지능이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본질적으로는 사랑의 속성을 묻는 영화이고. SF적이지 않으면서도 SF적인 방식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한 정재승 박사의 생각은 어떨까. “빅테이터 시대가 됐다는 것 말고는 인공지능에 대한 새로운 알고리즘을 알게 된 건 아니다. 여전히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처럼 사고하지 못하며 인간을 흉내낼 뿐이다. (인간을 위협한다는 데 대해) 우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할 수는 있으니 대비해야겠다.”
혐오 감정도 뇌과학에서 다루나?
최근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여성을 향해 극단적인 혐오의 감정을 보인다. 뇌과학 분야에서도 혐오 감정에 대한 연구가 이뤄질까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인종, 성별이 다른 상대에게 보이는 혐오라는 극단적인 감정을 갖게 될 때 어떤 요소들이 작용할까를 연구하는 것이다. 뇌에는 뇌섬이라고 혐오를 담당하는 곳이 있다. 더럽고, 역겨운 것을 보면 피하도록 해 인간을 보호하는 기제다. 우리 사회가 보이는 최근의 혐오 감정은 존재의 불안의 근본 원인을 다른 곳으로 투사하려는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자신보다 더 대우받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사회적 약자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대우밖에 못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데서 오는 감정이 아닐까. 나와 다른 상대를 차별하고 따돌리며 자신과 구분 지음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육적 가르침이 필요하다. 편견은 자연스레 없어지는 게 아니다. 편견이 있는 게 디폴트(기본값) 모드다.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편견을 없앨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다문화에 대한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