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양심은 없어도 안목은 있다
2016-03-28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종횡사해> 등으로 본 그림 도둑의 도(道)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99)

제법 비싼 하드커버 책 한권을 두고 친구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읽던 친구는 갑자기 삐삐가 요란하게 울려서(슬프다, 이게 웬 시대극) 조용한 서점에 폐를 끼칠까 급하게 뛰어나와 공중전화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손에 책이 있었다, 15분 전에 들고 있던 서점 책이. 야, 민폐 끼치기 싫었다며, 요새 그 서점 책이 안 팔려서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던데. (그러니까 책이란 새삼스럽게 안 팔리는 물건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책을 훔쳤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책을 돌려줄 것인가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까? 그러다 잡혀가면, 너 지난해에 데모하다가 유치장 갔잖아. 착하게 살고 싶었지만 세상의 편견이 두려웠던 전과자는 그렇게 갱생하지 못한 채 훔친 책을 팔아 죄책감이 섞였기에 한점 한점 더욱 소중했던 고기를 먹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 애는 어쩌다 도둑이 되긴 했지만 장물을 돌려줄 방법을 고민하는 건 아마추어 도둑만이 아니다. 미술품 절도에 관한 논픽션 <사라진 그림들의 인터뷰>의 작가 조슈아 넬먼이 처음 인터뷰한 도둑은 그에게 이런 걸 요구했다, 나 대신 이 장물을 갤러리에 가져다두어라.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라진 그림들은 우편함이나 세탁실, 사물함 등에서 종종 발견되곤 한다.

<종횡사해>(1991)

도둑들은 왜 어렵게 훔친 그림을 돌려주려는 걸까, 도둑맞았다는 소문이 퍼지거나 너무 유명한 그림은 팔리지 않는데 가지고 있자니 들킬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냥 돈 주고 사도 될 것을 구태여 훔치려고 동유럽에서 데려온 도둑들 인건비에 장비값하고 헬기 띄우는 비용만 쳐도 그림값 절반은 썼을 것 같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의 비뚤어진 갑부 도둑 토마스 크라운(피어스 브로스넌)도 그림을 훔치자마자 제자리에 돌려놓아 가택 수색을 당하고도 체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없애버려도 될 텐데, 어째서 굳이 돌려준단 말인가.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넬먼이 만난 도둑은 갤러리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들만 골라서 훔쳤고, 피해자인 딜러는 자신의 안목을 인정받은 것 같아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칭찬이 고팠던 우리 딜러.

알아야 면장을 해먹는다고 그림을 훔치려면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어릴 적엔 분명 소매치기로 훈련받았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어째서인지 미술품 전문 도둑이 되어 있는 <종횡사해>의 절도 영재들을 보자. 전문가들도 감정하려면 며칠이 걸린다는데 그림을 훔친 그 자리에서 전구 달린 안경으로 한번 보고 진품이라면서 가져간다. 근데 이왕 공중 곡예까지 하면서 들어간 거 빈손보단 가짜라도 가져오는 게 낫지 않을까, 명품 짝퉁도 A급은 몇 십만원이라고.

그렇다면 훔치는 자에게만 안목이 필요한가, 잡는 자에게도 안목은 필요하다. 국보급 향로를 누가 훔쳤는지 대번에 감을 잡고 뽀빠이(이정재)한테 쳐들어간 형사 반장(주진모)은 향로를 보고도 이 재떨이가 그 향로인지 몰라 담뱃재와 가래와 협박만 남기고는 표표히 떠나가지. FBI는 공금으로 대학원 미술사 수업도 듣고 그런다던데, 그래서 퇴직한 다음엔 갤러리 사업도 하고. 대한민국 직장인도 공금으로 노후 보장받았으면.

<종횡사해>(1991)

하지만 그림을 훔치는 데 정교한 안목만큼이나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다. 밀레니엄 보름 전, 그러니까 휴대폰으로는 진짜 전화만 걸던 무려 16년 전, <엔트랩먼트>의 도둑은 알아서 정확한 높이에 내려주고 알아서 유리창 떼주고 알아서 암호도 풀어주는 친절한 첨단 장비를 들고 그림을 훔치니, 이는 내 친구가 책을 훔친, 아니 실수로 들고 나온 정도의 신속함만 있어도 4천만달러짜리 그림을 훔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는 더욱 허술하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은 그 그림을 네개의 못으로 고정한 이탈리아 노동자였다. 그림 떼는 방법을 아는 전문가니까 그걸 훔칠 수 있었던 거라면서, 이거 보라고, 경찰이 그림을 떼려면 이렇게 오래 걸린다고 들이민 시간이 5분, 참 오래도 걸린다. 그때 박물관 직원들은 누가 볼일이 있어서 잠깐 <모나리자> 데리고갔나 보다. 종일 놀고 있다가 빈 액자가 발견된 다음에야 경찰에 신고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스케일은 커졌으되 디테일은 퇴보했다. 누군가 나서서 대표로 대사 치면 찍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다 같이 편할 텐데 분량 싸움이라도 났는지, 방문 목적을 한 사람이 한 문장씩 나눠 말하느라 정신 사나운 <인사동 스캔들>의 도둑 패거리는 이전 몇 십분 드라마가 무색하게도 그냥 폭탄으로 절도를 마무리한다. 그걸 보고 형사가 하는 말이, 이거 아메리칸 스타일인데.

알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라진 그림들의 인터뷰>라는 책에는 진짜 이런 말이 나온다. “근사한 할리우드영화의 줄거리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죠.” 보안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도둑들은 그에 걸맞게 진화된 기술로 그림을 몰래 훔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완력으로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1975년부터 2000년 사이 1년에 한번 정도 나타났던 미술관 무장 강도는 이제 훨씬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지키려는 자가 스스로 갈고닦아 정교하고 세련되어진다고 하여 빼앗으려는 자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최첨단 보안 기술로 미술관을 무장하니 도둑들은 시대를 거슬러 총을 들고 강도로 돌변했다. 시대와 인간이 함께 진화하리라는, 지키는 자의 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그걸 <사라진 그림들의 인터뷰>는 “우아함에서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일컫는다. 우아함이 사라진 폭력의 시대, 총을 들고 그림을 지킨다면 관람객의 원성이 자자할 것이고 총을 놓으면 그림을 잃을 것이니, 강도가 총을 놓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딜레마다.

쿨한 손버릇

폼나는 그림 도둑이 되기 위해 간직하면 좋을 두세 가지 스피릿

<빈>(1997)

맥가이버 스피릿

한때는 미술관 보안 직원, 한순간은 미술관 터는 도둑인 <빈>의 미스터 빈(르완 앳킨슨)은 마땅한 장비가 없어 먼저 주방을 턴다. 피자 커터로 그림을 자르고 껌으로 위작을 액자에 고정하고 계란으로 유화의 질감을 위조하는 미스터 빈, 직업을 잘못 골랐어, 미술관 지킬 때는 그렇게 민폐덩어리더니. 그중에서도 껌은 많은 미술품 도둑이 애용하는 장비로서, <엔트랩먼트>의 버지니아(캐서린 제타 존스)와 <도둑들>의 씹던껌(김해숙)은 씹던 껌으로 보안 장치를 못 쓰게 만들고, <종횡사해>의 아해(주윤발)도 계속 껌을 씹고 다닌다(이건 그냥 껌이 좋아서). 무릇 미술관 보안 직원이라면 껌 씹는 자를 경계해야겠다.

<갬빗>(2012)

액터스 스피릿

모네의 작품을 위조도 하고 바꿔치기도 하는 <갬빗>의 해리(콜린 퍼스)는 그 어떤 속임수보다도 멍청한 척하는 연기가 빛을 발하는, 진정 배우의 영혼을 지닌 도둑이다. <허드슨 호크>의 허드슨 호크(브루스 윌리스)는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뮤지컬 배우의 스피릿이 출몰하는 기묘한(실제로 보면 더욱 기묘하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편을 추천) 내면 세계를 간직한 도둑. 그런데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훔쳐서 팔거나 위조하려면 모네를 택하는 편이 좋다고 한다. 수련과 배와 연못을 그린 작품만 수백점인데 이 수련이 그 수련인지 저 수련인지 누가 알겠느냐고.

<인사동 스캔들>(2009)

금수저 스피릿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의 토마스 크라운이 그림을 훔치는 건 오직 쾌락을 위해서다. 자본으로 밀고 들어오는 갑부의 돈지랄에 놀아나다 지친 형사는 마침내 “돈 많은 이들에게나 중요한 그림이라면 나는 상관하지 않겠어”라며 아동학대 사건을 수사하러 떠나니, 이것이 금수저 미술품 도둑의 순기능이라면 순기능… 일 리가, 그래도 도둑은 잡아야 하는 거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경찰이 미술품 도난 사건을 부자들 일이라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애국심에 불타는 <인사동 스캔들>의 사명감 넘치는 도둑 이강준(김래원)이 들으면 서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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