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스릴러 도전.’ 많은 기사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공통적인 제목을 달아 놀랐다. 그만큼 화제가 될 만한 도전인지 의아스럽다는 뜻으로 놀란 건 결코 아니다. 지난 10여년 동안 강예원이 단 한편의 스릴러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았다니… 그게 정말인가. 재난 한가운데에서 가슴 아픈 사랑을 겪는 삼수생(<해운대>(2009)), 의붓아버지를 살해해 감옥에 들어온 음대생(<하모니>(2009)), 빵빵 터지는 폭탄 때문에 괴성을 질러야 했던 아이돌 가수 아롬(<퀵>(2011)), 고추가 들어간 음식을 먹은 남자와 키스하면 심각한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비뇨기과 의사(<연애의 맛>(2015)) 등 많은 영화에서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는 언제나 발랄하고, 귀엽고, 섹시했다. 하지만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배우의 습성을 고려해볼 때 강예원의 로맨틱 코미디 편식은 바라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밝고 명랑한 모습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쉽게 오진 않았다.” 그렇다고 강예원이 스릴러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날, 보러와요>를 덥석 물 정도로 순진한 배우는 아니지 않나.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나 아닌 누구라도 하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여성 캐릭터가 폭력과 성의 희생양으로 묘사되는 보통의 스릴러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나라면 주인공처럼 고난을 헤쳐나갈 궁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주먹을 불끈 쥐게 했다.”
<날, 보러와요>에서 강예원이 연기한 강수아는 “불쌍한 여자”다.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그는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납치돼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그곳에서 미치지 않았으니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발버둥이 심해질수록 그에게 돌아온 건 강제 약물 투여와 폭력이다. 수아는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수첩에 기록한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끔찍한 설정을 보니 이제껏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강예원을 모두 지우는 일이 먼저였을 것 같다. “수아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웠다. <하모니> 때 연기했던 슬픈 감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예원은 강수아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기로 했다.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모두 바꿨다. 말수도 줄였다. 아니,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무척 외로웠다. “너무 서글펐다. 정신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강수아는 나약함에서 출발하는 캐릭터니까. 온몸에서 흐르는 땀이 벌레처럼 느껴질 만큼 집중했다.”
카메라 안팎에서 항상 밝던 사람이 일부러 입을 닫고, 눈을 퀭하게 만들고, 기운을 빼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다른 사람과 말을 섞지 않고 피폐한 감정인 상태로 사는 건 강예원에게나 그녀 주변 사람에게나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항상 밝고 고난이 생기면 캔디처럼 극복했었는데 이 현장에선 무언가에 씌인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모든 눈빛이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았고, 어느 순간 내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더라.” 아이러니하게도 심신을 가혹하게 다뤘던 만큼 연기하는 쾌감도 컸다. “독방에 갇혀 있을 때 수아로 쑥 들어가게 되더라. 산발한 데다가 화장은 아예 하지 않았다. 먼지를 항상 뒤집어썼다. 날씨가 더워서 세수도 남자처럼 막 하고. 되돌아보면 그 당시 겪었던 작은 감정들이 연기하는 데 많은 힘이 됐다.” 그녀가 이 영화를 자신의 터닝포인트가 될 작품으로 꼽은 것도 단순히 첫 스릴러영화여서가 아니라 많은 자극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하면서 감정을 대하고 다루는 게 세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즐길 수 있어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라는 게 그녀의 소감이다.
강예원은 수아에서 빠져나와 다음 영화 <트릭>(감독 이창열)을 이미 찍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암에 걸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 도준(김태훈)의 아내 영애다. 도준과 영애 부부의 병상 일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다. “TV에서 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모두 챙겨볼 정도로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평소 하고 싶었던 사실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강예원은 또 변화와 도전을 선택했다. 그 시발점이 될 <날, 보러와요>는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엽기발랄섹시’ 강예원을 잊고 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