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앤드루 가필드] 진중하게 답을 찾는 연기
2016-04-05
글 : 이예지
<라스트 홈> 앤드루 가필드
<라스트 홈>

영화 2016 <핵소 리지> 2016 <사일런스> 2014 <라스트 홈> 201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2012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0 <소셜 네트워크> 2010 <아임 히어> 2010 <네버 렛 미 고> 2009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2008 <천일의 스캔들> 2007 <보이A> 2007 <로스트 라이언즈>

드라마 2009 <레드 라이딩: 1974> 2009 <레드 라이딩: 1980> 2009 <레드 라이딩: 1983> 2007 <닥터 후> 시즌3 2005 <슈거러시>

딜레마의 남자. 배우 앤드루 가필드가 맡아온 배역은 늘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소년범 ‘보이A’이자 과거를 청산한 ‘잭 버리지’였고(<보이A>), 평범한 소년 ‘토미’이자 장기를 기증할 용도로 길러진 클론이었으며(<네버 렛 미 고>), ‘피터 파커’이자 ‘스파이더맨(<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었던 그는 영화에서 번번이 가혹한 운명에 처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자아 정체성을 고민하는 남자를 연기해온 앤드루 가필드는 언제나 위태로운 사춘기 무렵의 소년 같았다. 유난히 빛을 많이 반사해내는 까만 눈망울과 숱이 많아 덥수룩한 머리, 비스듬한 어깨에 어쩐지 애처로워 보이는 긴 목, 그러나 웃을 땐 해가 나듯 화사해지는 얼굴까지. 여린 소년의 감성을 담은 얼굴은 때때로 상대배우 혹은 관객과의 벽을 일순 허물어버리며, 어떤 장르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기어코 멜랑콜리한 무드를 형성하곤 했다. 인물이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는 과정에서 앤드루 가필드의 세심하고 감성적인 연기는 감정의 무게를 전달하기에 적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가 브라운관에서 첫 연기를 선보인 영국 드라마 <슈거러시>는 그의 소년다움이 극명히 드러난 작품이다. 데뷔 당시 22살의 어리지 않은 나이였지만, 중학생 소년처럼 풋내 나는 비주얼의 그는 짝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기 일쑤인 소년의 모습을 그려냈다. 대뜸 키스를 해놓고 화장실로 뛰어와 입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보고, 치약 아닌 제모제를 입에 짜넣었다가 황급히 뱉어내는 모습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코믹하고 밝은 모습일 터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존 크롤리 감독의 <보이A>에서였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은 비뚤어진 친구와 어울리다 한 소녀를 죽이고, 14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잭’이란 이름으로 새 출발하려 하지만 그를 뜻하는 ‘보이A’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는다. 자아를 확립해야 할 시기에 교도소에서 복역한 잭을 앤드루 가필드는 어린아이 같은 백지 상태로 표현해낸다. 처음 사귄 친구와 연인의 사소한 호의 하나하나에도 쉽게 감동하고 지레 움츠러드는 그의 제스처는 놀랍다. 불안감과 행복감의 경계를 일렁이는 눈빛, 미소를 머금다가도 곧 탄식을 뱉을 것처럼 벌어지는 입, 뒷걸음치다가도 이내 놓칠까 두려워 꼭 그러안는 두팔. 방어적이면서도 사랑받길 갈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경이로울 정도다.

그는 <보이A>에서 보여준 순수한 모습을 <네버 렛 미 고>와 <아임 히어>로 이어갔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클론들의 사랑을 그려낸 <네버 렛 미 고>에서 ‘토미’ 역시 천진하고 동물적인 캐릭터다. 잭처럼 토미도 끊임없이 자신이 영혼을 지닌 인간이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려 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단편 <아임 히어>에서는 금속의 로봇으로 분해 사랑하는 로봇에게 팔과 다리, 몸통마저 내주고 머리만을 남긴다. 표정조차 쓸 수 없는 한정적 상황에서 그는 자기희생적인 캐릭터를 목소리와 행동만으로 살려낸다. 네모난 금속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유독 따뜻하다. 어딘가 결핍돼 있지만, 그래서 더 순정적인 모습들이다.

전과자, 로봇, 클론 등 유약한 소수자의 얼굴을 탁월하게 그려내던 앤드루 가필드는 <소셜 네트워크>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대중의 시선을 환기했다. 천재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의 동업자이자 투자자 왈도 세브린은 하버드 재학생으로서의 지성과 핸섬한 외모, 재력을 갖춘 인물이다. 너드에 냉혈한인 마크 저커버그와 대조되는 훈훈한 외모와 인간미를 갖춘 그는 더는 ‘짠한’ 소년이 아닌 ‘매력적인 수컷’으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왈도 세브린 역시 전작에서의 멜랑콜리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왈도는 믿었던 친구 마크에게 배신당하며 약자의 포지션에 서고, 그 실연의 서사를 거의 연인 사이의 그것처럼 재연해낸다. 멋진 외관 이면의 열등감과 상처받은 마음은 기존 앤드루 가필드의 매력을 멜로드라마적으로 살린 대목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그의 연기를 “믿을 수 없는 감정이입이었다”고 말했다.

“3살 때부터 스파이더맨 슈트을 입는 게 꿈이었던” 앤드루 가필드는 리부트 작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캐스팅되면서 연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기존의 <스파이더맨>을 멜로드라마적으로 재해석하고, ‘피터 파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섬세한 결을 불어넣는다. 마크 웹 감독은 앤드루 가필드를 낙점한 까닭으로 “그는 감정적인 무게를 다룰 줄 안.다. 피터 파커는 언제나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매우 중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부모님의 부재, 정체성을 고민하는 스파이더맨인 동시에 20층 아파트 발코니를 뛰어넘어 꽃을 한아름 바치고, 멋쩍은 듯 씩 웃는 로맨틱한 스파이더맨이기도 했다.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로 거듭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전세계에서 약 7억5800만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영화 속 로맨스는 실제로 이어져, 앤드루 가필드와 에마 스톤은 장장 4년간의 만남을 지속하며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히어로물의 하이틴 스타로, 할리우드의 핫한 커플로, 셀러브리티로 거듭났지만 동시에 이 시리즈는 그에게 족쇄이기도 했다. 시리즈 2편에 4년을 묶여 있어 필모그래피는 한동안 공백이 됐고, 무엇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처참한 완성도는 그의 실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앤드루 가필드는 “제작사 소니의 지나친 간섭으로 초기의 좋은 각본이 산으로 갔다”고 소신껏 발언해 소니에 미운털이 박혔고, 결과적으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감독과 주연배우가 모두 하차하며 종료됐다.

스파이더맨 슈트를 벗은 그는 성큼 자라서 돌아왔다. 그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초래된 부동산 대공황 사태를 다룬 <라스트 홈>을 차기작으로 선택했고, 제작에도 처음으로 참여했다. 영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을 차압당하는 당사자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차압당하는 이와 차압하는 부동산 사업자 갑을 구도에서 앤드루 가필드가 맡은 역할은 ‘갑’이 된 ‘을’ 데니스 내쉬다. 주택담보 연체자였으나 부동산 업자 릭 카버(마이클 섀넌)의 동업 제안을 받은 그는 자신의 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집을 빼앗아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앤드루 가필드는 수염을 기르고 오물을 묻히는 연기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서사에 가까이 밀착해 영화를 견인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땟국 진 인부의 옷에서 멀끔한 정장까지 갈아입으며 모습을 바꾼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인가, 사회가 규정하는 나인가’를 고민했던 그가 이젠 딜레마의 층위를 ‘나는 어떤 내가 되어야 하는가, 사회와 나는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의 윤리와 당위의 문제로 확장한 셈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또 다른 두 작품 역시 촬영을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멜 깁슨 감독의 <핵소 리지>에서는 군 거부를 주장한 첫 양심적 병역수이자 군의관인 드몬드 도스 상병을 연기한다. 17세기 예수회 사제가 일본에서 받은 박해를 그려낸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사일런스>에선 로드리게스 신부 역을 맡았다. 두 작품에서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데서 나아가 그 신념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넌 어렸을 때부터 아주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살아왔지. 그 의문들이 삶의 원동력이자 우리의 본질이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벤 파커가 피터 파커에게 건네는 이 말은, 배우 앤드루 가필드의 연기 인생에도 유효한 대사다. 숱한 물음표들이 모여 만들어낸 그의 초상은 점점 더 근사해질 것이다.

<보이A>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어

<보이A>의 잭은 교도소에 수감된 14년의 세월의 공백으로 사회성이 결여되고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인물이다. “살면서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말하고 들을 수 있을 줄 몰랐어.” 떨리는 눈빛과 애달픈 목소리로 미셸에게 고백하는 이 장면은 그중 백미.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인물임에도 보이A가 아닌 잭의 등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전적으로 앤드루 가필드의 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앤드루 가필드는 이 작품으로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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