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보고]
[현지보고] 벙커 속의 세 남녀
2016-04-07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개봉 2개월 전에야 그 정체를 공개한 <클로버필드 10번지>
<클로버필드 10번지>

<클로버필드 10번지>. 제목의 일부와 제작자가 동일하지만 2008년 개봉한 J. J. 에이브럼스 감독의 <클로버필드>의 2편은 아니다. 에이브럼스의 말을 빌리자면, DNA를 공유한 먼 친척뻘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캐릭터나 몬스터, 타임라인에도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이브럼스가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만 믿고 봐도 될까?

<클로버필드>는 뉴욕을 배경으로 스펙터클한 액션과 CG를 선보였다. 반면 이름 모를 초짜 감독이 연출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 내내 벙커를 배경으로 단 3명의 캐릭터만 출연한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실망스럽기도 한데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인터넷 영화 포털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90%의 신선도를 기록했고, IMDb에서 7.8의 평점을 받았다. 지난 3월11일 미국에서 개봉, 3월27일 현재까지 5600만달러의 미국 내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렸다(<클로버필드>의 경우 12주 동안 8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부부싸움 뒤 술병과 짐을 챙겨 집을 나선 미셸(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은 자꾸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를 무시하며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이미 벙커에 갇혀 있다. 그녀를 구해줬다고 주장하는 하워드(존 굿맨)는 지구가 의문의 공격을 받아 오염됐으며, 살길은 이 지하 벙커뿐이라고 말한다. 세계 종말론자의 광기가 엿보이는 하워드를 그대로 믿기 힘든 미셸은 벙커에 스스로 들어왔다는 에밋(존 갤러거 주니어)을 만나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누구를 믿어야 하고,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댄 트라첸버그 감독의 데뷔작인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대부분의 장면을 지하 벙커 세트장에서 찍었다. 시나리오의 순서대로 촬영한 이 작품에는 연기파 배우 존 굿맨과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외에 국내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는 스타로 통하는 존 갤러거 주니어가 출연한다(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그는 <뉴스룸> <올리브 키터리지> <숏텀 12> 등에 출연했다). 이 세 배우는, 마치 무대 앞 객석 첫줄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생동감 있는 연기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특히 하워드 역의 굿맨은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자기중심주의자 캐릭터”를 신들린 듯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윈스티드는 <에이리언>의 리플리와 맥가이버가 만난 듯한 매력적인 ‘여전사’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처음엔 눈에 띄지도 않던 에밋은 갤러거 주니어의 따뜻한 연기로,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굿맨과 윈스티드는 “이 작품이 트라첸버그 감독의 데뷔작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현장에서 늘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 오랫동안 연출해온 노련함이 보였을 정도라고. 굿맨은 “협소한 장소에 배우 3명만 나오는 작품이라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었지만, 감독의 노련함과 모두를 대하는 자세 덕분에 즐거웠다”고 전했다. 한편 <클로버필드 10번지> 역시 후반부에는 에이브럼스의 작품들처럼 스릴 넘치는 액션 장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3명의 캐릭터가 처음으로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캐릭터들은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탐색전을 벌인다. 비록 대사도 거의 없고 특수효과도 쓰지 않았지만, 심장이 멈출 듯한 긴장감은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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