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한 얼굴의 네 청춘배우들을 보고, 밝고 쾌활한 영화일 거라 짐작하면 오산이다. <글로리데이>는 스무살을 제대로 즐겨보기도 전에 꺾여버리고 마는, 성장통의 순간들을 서늘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그건 20대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구상한 최정열 감독이 30대에 비로소 <글로리데이>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진실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30대를 살아가면서 어느새 나도 진실에 대해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나도 내가 보았던 어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 이 영화가 첫 장편 데뷔작인 그는 30대인 자신의 모습,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로리데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속 친구들이 더 잔혹하게 무너져내려갈수록, 어른들이 더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짐작과 함께.
-<글로리데이>의 시나리오를 쓴 건 10여년 전이라고 들었다. 그때 어떤 계기로 이 이야기를 구상했나.
=단편영화, 독립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하던 때였다. 현장에 있는 게 너무나 즐거워서,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과 이 에너지를 현장에서 함께 발산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청춘영화, 성장영화를 기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고.
-당시에는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이었다고.
=수능 끝나고 졸업을 앞둔, 그러니까 20대를 새롭게 시작하는 영광스러운 날을 바로 앞둔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들이 고등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엔딩 신에서 졸업식 장면을 꼭 찍고 싶어서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친구들이 부모가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졸업식장을 떠나 세 갈래 길로 걸어가는 것. 그게 이 영화의 핵심적인 이미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예산 문제로 주요 배경이 되는 계절과 설정은 바뀌었지만 캐릭터가 지니고 있는 느낌은 지금과 비슷했다.
-영화 초반부터 세게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쫓기는 네 친구들의 모습을 경쾌한 톤으로 보여주다가 갑자기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타이틀이 뜬다.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닥쳐오는 불행을 표현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잘 다루는 영화를 좋아하고, 나 역시 영화에서 시간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등장인물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보면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십년의 변화를 다루잖나. <글로리데이>에서는 그보다 더 빨리,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불행과 심리적인 변화를 다뤄보고 싶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네 친구의 변화된 심리를 구획짓는 틀이다. 행복하고 좋았던 경험은 낮에, 혼란스럽고 난처한 일들은 밤에 일어난다.
=시간적 대비가 이들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봤다. 좋았던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 친구들끼리 보냈던 낮 시간과 어른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는 밤시간을 계속적으로 대비하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낮과 밤이 계속 교차하지만 이야기의 진행 방향만큼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거나 꺾이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용비를 연기한 배우 지수의 말을 들으니 <글로리데이> 오디션은 20대 배우들에게 단연 화제였다고. 4개월 동안이나 오디션을 진행한 이유는.
=부끄럽다. (웃음) 이 작품을 준비하며 내가 이미 지나온 20대를 다시 기억한다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했었고, 지금 20대인 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캐스팅의 첫 번째 목적은 최대한 많은 20대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거였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어보며 밖에서 바라보는 20대와 진짜 20대의 간극을 줄이고자 하는 게 오디션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오디션이 화제가 된 데에는 사실 젊고 재능 있는 20대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장영화, 청춘영화 장르가 산업 안에서 굉장히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스팅의 자세한 내막도 궁금하다.
=지수씨의 경우 시나리오를 쓸 때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배우가 눈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용비라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분출해야 하는데, 그걸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이 너무 매력 있었다. 그 큰 스크린에 단독숏을 잡았을 때, 예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이정재 선배님처럼 청춘을 상징하는 듯한 이미지로 다가왔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류준열씨의 경우 정확하게 그와 반대되는 이유로 캐스팅했다. 마치 지금까지 존재했던 청춘배우의 계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리는 듯한, 새로운 느낌의 배우였다. 그래서 한 앵글에 지수씨와 담겼을 때 어떤 느낌일지 기대가 되더라. 두만 역의 김희찬씨는 굉장히 남자다운데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목소리와 눈망울로 진실을 얘기한다면,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김준면씨는 네 주연배우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난 배우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멋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영화와 어떻게 어울릴지 고민을 좀 했는데, 오디션을 진행하고 자주 보면서 이 친구가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작을 한 임순례 감독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원래 임순례 감독님 제작사에서 다른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잘 안 되며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다. 뭔가 잘 안 풀렸을 때 오는 공허함 같은 게 오더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예전에 써놨던 시나리오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글로리데이>를 보게 됐고, 마침 CJ 버터플라이 공모전을 하길래 출품했는데 당선이 된 거다. 제작사를 찾아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임순례 감독님을 떠올렸다. 그리고 감독님이 만드신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세 친구>의 정서나 감정들이 이 작품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좋은 지지자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십사 하는 바람으로 제작을 부탁드렸는데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됐다.
-10여년 전 쓴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의 느낌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나.
=20대에 쓴 시나리오는 투닥거리다가 끝나는 소동극의 느낌이 강했다면, 30대에 수정한 <글로리데이>의 시나리오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무너지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요즘의 20대를 바라보면 예전보다 훨씬 더 각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가 더 비극적인 정서를 띠게 된 것도 이들의 좋은 시절을 보는 이들이 더욱 아깝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있긴 있다. 영화를 시작할 때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둔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지. 내가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었는지. 이 두 가지를 늘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