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양아치가 가까스로 검사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줄 잘못 서면 변호사 간판 달고 이혼소송이나 하는 개업 변호사로 전락할 게 뻔하다. 태수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이면의 법칙을 재빨리 습득하고, 성공을 위해 온갖 악행에 가담하며 승승장구하는 캐릭터다. 그의 상승과 추락 안에 이 나라의 ‘추잡한’ 현대사가 요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쌍화점>(2008) 이후 조인성이 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가해자, 악인이라는 외피를 쓴 인물인 태수에게 조인성의 해석이 더해지면 어떨까. 여전히 스크린 속 조인성에 대한 궁금증은 닳지 않았다.
-스크린으로는 공식적인 복귀작이라 기대가 더하다.
=무식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었다. 단지 그 이유더라.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를 펼쳤는데 단숨에 읽었다. 하겠다고 바로 결정하고, 귀국하는 대로 감독님을 만났다.
-스크린 복귀작으로 기대를 모은 <권법>이 불발되면서 사실 그동안 영화 복귀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 따갑기도 했을 터다.
=그렇긴 하지만 그동안 그러한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권법>도 하려고 하고 있었고,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하는 상황이지 않았나 (<씨네21>은 891호 커버스타를 통해 제대 후 <권법> 촬영을 앞둔 조인성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러니 뭔가 빨리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 찰나에 노희경 작가님 작품을 만났다. 영화가 두 시간여의 결과물을 만드는 작업이라 보면, 그동안 드라마 두편(<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 <괜찮아, 사랑이야>(2014))을 했으니 70분짜리 작품 32개를 찍은 거다. 어쨌든 대중과 소통했으니 작품에 대한 부담을 많이 덜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미 두편의 드라마로 현장 복귀를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현장, 드라마 현장을 구분하는 게 스스로를 좀더 힘들게 하는 것 같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더라. 이번 작품도 재밌어서 선택했다. 안 그러면 너무 교만한 대답밖에 안 나올 것 같다. (웃음)
-두달 촬영했다. <쌍화점> 이후 시간이 좀 흘렀는데 그사이 영화 현장의 변화도 느껴지나.
=현장은 현장이다. 현장은 늘 춥다. 현장은 결국 추위와 더위, 시간과의 싸움이다. 어쩔 수가 없다. 군대로 치면 야전인데, 야전사령관과 실무진간의 좁힐 수 없는 갭이 있더라. 옛날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우리는 끝까지 야전에 속한 직업이더라.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는 경력이 쌓이면 현장에 덜 나오는데, 배우는 승진을 하든 하지 않든, 인기가 있든 없든 현장에서 일한다. 그건 대선배인 안성기 선배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수는 80년대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고등학생, 청년, 30대 검사로 다양하게 변모하는 모습을 선보여야 한다.
=꼭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열심히 봤는데, 그 향수가 굉장히 맛있었다. 화면으로 보다가 내가 그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88올림픽 때 내가 일고여덟살이었으니 사회적인 분위기를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어른이 돼 세트장에 온 듯했다. 역사 공부하는 심정이랄까. (웃음)
-목포에서 사투리를 쓰던 ‘양아치’ 고등학생이 검사가 되어 상류층의 룰을 알아가는 동안 물리적인 변화도 크다.
=초고에는 사투리가 더 많았다. 캐릭터를 극대화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지역적인 색깔도 두고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완화된 편이다. 액션도 많고 사투리도 해야 하고, 태수 캐릭터가 혼자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 감독님께 고충을 좀 토로했다. 할 게 많으면 지치니 차라리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극대화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이 그 부분을 이해해주시더라. 감독님과 타협점을 찾아가면서 역할이 좀 편해졌다.
-태수가 회상하는 내레이션이 극의 전체를 이끄는 구조다. 드라마의 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내레이션이 많다 보니) 그래서 많이 나오는 데 비해 실속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더라. (웃음) 촬영 전에 그 부분을 미리 다 녹음했는데 덕분에 시나리오를 좀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물론 태수 캐릭터는 혼자 만들어진다기보다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축된다. 현장에서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고 있어서 작업이 나날이 흥미롭다.
-출세를 향한 야망을 가진 인물, 전형적인 한국형 성공신화의 주역인데, 혹시 참고한 캐릭터나 인물이 있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에서 조던 벨포트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지 않나. 그런 경우에는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나는 특별히 어떤 모델을 정해놓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감독님과 대화를 하면서 이미 캐스팅부터 시작됐지 싶더라. 감독님이 “인성씨의 개인적인 면모를 살려주면 좋겠다”고 했는데 가만 보니 태수의 성격이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현장에서 감독님과 대화를 하고 패를 쪼개길 반복해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처음엔 내 생각과 다르면 어쩌나 싶어 좀 부담스럽더라. 그런데 감독님이 고마운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촬영감독님, 조명감독님, 인성씨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인성씨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있고, 촬영감독님도 있으니 함께 만들어가자”고. 그 말을 들으니 편해지더라. 아, 이걸 꼭 나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자 싶었다.
-한국 사회의 부패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누아르 장르의 무거움이 연상되는데, 시나리오의 톤이 예상외로 밝다. 검사로서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잘못된 선택을 감행하고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태수를 보면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되지 싶다.
=더욱더 사랑스럽게 연기해야지, 이런 마음은 없다. (웃음) 그런데 금방 한 얘기대로 이 시나리오가 좋았던 이유가 그런 거다. 아, 나도 이런 순간에 그랬을 것 같더라. 사람은 모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고 합리화를 해버리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큰 명제가 있지만, 그건 사회 전체의 도덕률일 뿐이지 개인의 문제로 돌아오면 달라진다. 내 문제, 가족 문제, 이런 것들이 엮이다보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지점에 대한 말하지 못한 이유들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태수의 입장을 이해할 여지가 생겼다.
-전작들의 연기 스타일에 대해 ‘그악스럽다’라는 표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표현에 있어서 어떤 노선을 가지고 있나.
=연기를 하다보니 선배님들의 말씀이 맞더라. 연기를 한다는 건 빼는 작업이다. 어떻게 하면 안 할까, 어떻게 하면 안 한 것처럼 보일까. 이렇게 승부를 보게 되더라. 더하는 건 해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데 빼는 게 어렵다. 돌아보면 노 작가님 작품을 통해 그걸 배웠다. 처음 <그 겨울, 바람이 분다>를 할 때는 글이 너무 좋으니까 느낀 대로 표현해야지 했는데 그러다보니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더라. 이후에 <괜찮아, 사랑이야>를 찍는데 작가님이 “다 버려. 다 버리는 대사야”라고 하시더라. “인성아, 네가 이걸 다 힘줄 필요 없어. 전달하려는 이 부분만 정확하게 해주고 나머지는 다 버려. 딴 데다 이야기하듯이 다 버려” 하시더라. ‘아, 그 싸움이구나 이제는. 빼는 작업이구나.’ 그때 감이 오더라. 지금도 그런 것들을 배워나가는 것 같다. 그래도 이제는 그 정도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감독님의 말을 예전보다 훨씬 빨리 파악한다고 생각하니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송강호 선배 같은 배우들과 여러 번 작업한 한재림 감독인데, 내가 자꾸 못 알아듣고 충돌하면 어쩌나. (웃음)
배우의 길을 보여주다
조인성이 바라보는 정우성
“우리 같은 ‘같은 과 배우’를 한 영화에 같이 캐스팅하는 일이 드물지 않나?” 이를테면 미남형 남자배우를 뜻하는 말일 테다. <더 킹>은 조인성의 말마따나 같은 카테고리의 배우가 역할을 나눠 갖지 않는 기존의 캐스팅을 거스르는 조합이고, 그래서 그 충돌과 조화가 궁금하고 신선하다. “우성이 형과 함께 연기한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우성이 형 때문에 배우를 시작했고 그래서 내겐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선배다.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한 작품에서 같이 하게 됐다.” 조인성이 현장에서 본 선배 배우 정우성은 그야말로 선배로서의 모범을 시전하는 배우다. “현장에서 직접 겪어보니 정말 존경스럽더라. 연기에 대해 서로 터치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많은 걸 알려주신다. 주연으로 나 역시 고민이 많은데, 같은 입장에서 고충이 있으니 물어보게 된다. 그럴 때 위로와 격려도 해주고, 내가 깜빡하는 걸 몰래 뒤에서 봐주기도 한다.” 조인성은 정우성과의 작업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