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식은 태수의 롤모델이다. 그는 <더 킹>에서 묘사되는 상위 1%의 세계, 권력과 부와 명예가 집약된, 누구나 오르고 싶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 무소불위의 세계를 요약하는 인물이다. 이십대 초반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차세대 검사장으로 각광받는 한강식은, 그 근사함 뒤에 잔인한 폭력의 속성을 감춘 악인이다. <나를 잊지 말아요>(2014)의 멜로적 감성을 뒤로하고 정우성이 보여줄 새로운 도전은 그래서 악독하고, 거대하고, 강하고, 강렬하고, 무섭다. 검사에게 취조받는 듯한 심정으로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태수(조인성)의 눈으로 형상화된 한강식에 대한 묘사를 보면 캐릭터의 파워가 느껴진다. ‘정글의 사자처럼 여유 있는 걸음걸이, 세상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처럼’ 설렁설렁 등장하는 캐릭터라니, 상상이 안 가는 포스다.
=사실 사자 같은 느낌은 아니고. (웃음) 한강식의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첫 촬영 때 런웨이하듯 나타나는 그런 촬영을 하긴 했다.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상상하거나 형상화하진 않았다.
-영화에서 한강식의 포지션을, 한재림 감독의 전작을 통해 가늠해보자면 <관상>(2013)의 수양대군 같은 임팩트 있고 군림하는 캐릭터가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작품 선택에서도 그 강한 표현력에 대한 끌림이 있었을 것 같다.
=한재림 감독님은 한강식이 <관상>으로 따지면 수양대군이라고 얘기하는데 실상은 전혀 다르다. 수양대군은 권력을 잡는 사람이고 한강식은 권력을 휘두르다가 몰락하는 인물이다. <관상>의 수양대군이 영화 안에서 그리고 영화 밖에서 관객에게 끼쳤던 파급효과, 그럼으로써 배우가 가져갔던 그런 영광들. 그런 것들을 한강식 캐릭터가 가져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똑같은 캐릭터를 만들 수도 없고, 또 똑같다면 재미도 없을 거다. 난 오히려 정점에 올랐다 몰락하는 한강식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키득거리고 재미있어 했으면 좋겠다. 한강식은 그런 풍자적인 성격이 더해지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 파워를 갖추고 클래식함과 고급스러움으로 중무장한 악역이다. 특별히 레퍼런스로 삼은 캐릭터가 있나.
=연기하면서 캐릭터에 레퍼런스를 잡고 간 적은 없다. 그렇게 시작을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감쪽같이 흉내를 잘 내고 그러면 더 멋있어 보였으려나. (웃음) 사실 연기를 할 때는 정우성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캐릭터와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크다. 그래서 캐릭터 자체의 묘사보다는 그 캐릭터가 관계된 배경에 대한 공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임한다.
-그럼에도 한강식에게 깃든 외적 면모는 기대할 수밖에 없다. 흐트러짐 없는 외모 뒤에 감추어진 부패한 권력의 모습, 그 이중성이 어떻게 구현될까.
=한강식은 말 그대로 우아를 떠는 인물이다. 돌아보면 그동안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렇게 정장을 갖춰 입고 나온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직업적으로 옷을 많이 입어봐서 옷이 주는 움직임을 좀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옷에 대한 나름의 인식이 있고,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색다른 제스처가 있는 건 아닌데, 어떤 장소에 있느냐에 따라 태도가 바뀌듯이 정장을 입으면 그 분위기를 느끼며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촬영 분량이 없을 때도 현장에 자주 나와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본다고 들었다. 두달가량 진행된 촬영에서 느낀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벌써 두달인가. 띄엄띄엄 진행해서 그런지 시간이 그렇게 흐른 줄 몰랐다. (웃음) 어려운 건 지금껏 검사 역을 해보지 않은 데서 오는 생소함이 있고, 한강식의 강압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낯설다. 강압적인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본성을 거스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액션이라고 표현하는데, 폭력적인 장면도 있고. (웃음) 그러다보니 처음엔 표정이나 태도에서 센 감정 상태의 표현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부분들을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부딪히고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몇년간 정우성의 모습은 다채로웠다. 그러다 최근 출연했거나 예정인 작품들의 경우에는 점점 강한 면모를 부각하고 있는 것 같다. 촬영을 마친 <아수라>에서도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에 도전했다.
=<아수라>에서는 어설프게 나쁜 놈이 더 나쁜 놈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는 캐릭터를 맡았다. 심리적 묘사에 있어서는 <아수라>의 한도경을 연기하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어떻게 보면 <아수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더 킹>에서 풀어야겠다는 심리적인 작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지점은 나 스스로 추구한 것도 있지만 영화계 전반적인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남자배우 캐릭터가 그런 강성의 캐릭터들로 변화하고 있고, 관객도 그 모습에 호응하면서 오는 시류적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이 시대가 느끼고 있는 스트레스가 이런 강한 캐릭터들을 통해 나오는 게 아닐까. 어쨌든 배우는 주어지는 시나리오 안에서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 강성의 캐릭터들이 자꾸 나오니 자연스럽게 그런 연기를 하게 되는 것 같다.
-강성의 연기를 통해 배우가 갖게 되는,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지점도 물론 없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그런 역할을 할 때 연기자로서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원하는 모습이 표현될 때 파생되는 심리적인 짜릿함 같은 것들이 강한 이펙트로 다가오는 거다. 사실 한강식의 경우, 그냥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캐릭터라 그 강함이 짜릿하게 다가올 수 있다. 영화가 굉장히 현실적인 지점들을 꼬집고 있지만 영화 속 상황은 모두 가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전략부’는 대한민국 검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있을 법한 어떤 걸 가지고 희화화하는 것이다 보니 표현의 넘나듦이 자유롭고, 그러다보니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모습도 더 재밌는 이미지로 만들어낼 여지가 생긴다.
-<더 킹>은 태수의 시선을 따라가는 작품이고, 주연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의외의 선택이다 싶기도 하다.
=물론 외부에서 바라봤을 때 정우성이 왜 굳이 작은 역할을 할까. ‘굳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할 거다. 이해타산적인, 객관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력이 이 정도 됐으니까 좀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마치 <감시자들>(2013)에서 연기한 ‘제임스’와 같은 맥락에서의 선택이다. 게다가 맨날 주연만 하면 얼마나 그것만 찾아다니고 바쁘겠나. 재미도 없고. (웃음) 부담 없이 참여하고, 내가 참여한 작품은 작게 기여했어도 내 영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에게도 이 정도 여유가 생겨서 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제작자로 도전장을 낸 <나를 잊지 말아요>가 흥행이나 비평 측면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제작자의 짐을 내려놓았으니 그때에 비해 이번은 조금 편한 현장이 아닐까 싶다.
=그때도 현장에서 부담감은 없었다. 늘 현장에 있을 수 있는 제작자였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경험을 전수해줄 수 있는 역할에서 오는 즐거움도 컸다. 게다가 ‘이 작품을 제작해서 흥행해야지’ 하는 그런 계산법으로 다가간 게 아니었기 때문에 타격은 크지 않다. 따지고 보면 감성적이었던 거지. (웃음) 오히려 제작을 끝내놓고 나니 감성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고민을 좀더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그래서 진짜 부담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첫 제작한 작품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니 다시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작을 해야 하니까.
-연출 계획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현재 진행 중인 작품이 있나.
=한편은 중국 촬영을 하면서 예전부터 쓴 시나리오다. 그런데 이게 중국 로케이션인 데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막 쓰다 보니 제작 규모가 크다. 실현하자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따졌을 때 고민이 깊다. 두편은 한국에서 찍을 작품으로,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중국 작업은 감독으로서 작품을 좀더 보여주고 나서 손을 대야 할 것 같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나갈 생각이다.
함께하는 기회가 소중하다
정우성이 바라보는 조인성
“그냥 이 현장이 편안하고 재밌다.” 정우성은 이번이 조인성과 첫 작업이다. 조인성은 정우성의 이전 소속사(싸이더스HQ)에서 데뷔했고, 그때부터 긴 인연을 맺어온 선후배 사이다. 그럼에도 함께 출연할 기회는 없었다. 영화 속 태수가 성공한 검사 한강식을 롤모델로 삼고 쫓아오듯이, 조인성에게도 정우성은 그런 ‘선배’였다. “인성이가 정우성이라는 선배를 바라봤던 사적인 마음도 이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계가 반영되면서 재밌기도 하고.” 정우성은 촬영이 없는 날도 현장에 나와서 배우들과 함께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오랫동안 배우로 활동해왔고, 후배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한번도 같이 작업하지 못했던 데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주어진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선택하게 하는 데 분명히 작용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