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펼쳐지는 욕망의 한 시대
2016-04-20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12월 개봉예정인 한재림 감독의 신작 <더 킹> 촬영현장에 가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한국 현대사. 정권 교체로 검찰 내의 세력이 바뀌고, 그렇게 새로 재편된 라인 속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알뜰히 챙겨갔던 사람들. 더 많이 가지고 싶었고, 더 높이 오르고 싶었고, 더 넓게 누리고 싶었던 이들은 자신만을 위한 성을 ‘더’ 쌓기 위해 국민을 기만했다. 조폭과 연계한 봐주기 수사, 금품 수수, 언론 유착… 이 모든 게 검찰 내부에서 일어났다. <더 킹>은 한국 현대사, 억압의 역사에서 ‘가해자’로 규정되는 흡사 왕에 버금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들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다. 한재림 감독은 권력의 교차점마다 판세를 노리며, 그 중심까지 진출한 부패한 검사 태수(조인성)의 성공과 몰락을 통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왕’이 되는 가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현대사의 모순을 짚어보려 한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태수의 흥망성쇠와 함께 빠르게 전개되는 흐름 속, 영화는 이 뼈 있는 시선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다소 겹쳐 보이는 소재지만, 지난 정권을 총망라하고 그 속에서 대한민국, 그리고 한국인이 가진 속성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더 킹>이 그리고자 하는 지점은 또 그렇게 색다르다.

올 초 2016년 한국영화 톱프로젝트(<씨네21> 1037호)를 통해 <더 킹>의 촬영을 앞둔 한재림 감독을 만난 후, 이번엔 부산 해운대구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현장 방문을 요청했다. 촬영 초반이라 취재 방문이 부담스러울 텐데도 한재림 감독은 <씨네21> 21주년을 기념하는 현장 방문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지난 2월4일 크랭크인한 영화는 총제작비 104억원의 대작으로, 총 100회 촬영이다. 오는 12월 개봉을 목표로 바삐 움직이며, 35회차 촬영을 끝내고 이제 1/3 지점을 지나온 현장 분위기와 한재림 감독 인터뷰, 현장 스탭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야야, 너 신문 봤어? 신문!” 배성우가 신문을 흔들며 다그치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조인성이, “무슨 신문?” 하다가 그제야 다급하게 손에 쥔 신문을 펼쳐든다. 모 가수와 내연관계였던 유부남 검사가 청탁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의 기사.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스캔들로 사면초가에 빠진 유부남 검사가 조인성이 연기하는 태수, 배성우는 태수의 선배 검사 동철이다.

한재림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현장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오로지 ‘신문’이다. ‘신문?’ ‘신문!’ ‘신문.’ 전략수사 1부 앞을 슈트 차림의 남자 둘이 그렇게 연습으로 신문을 외치며 돌아다닌다. 대사의 뉘앙스를 전달하려던 한재림 감독 역시 저만치서 ‘신문!’, ‘신문?’ 하며 외치더니, 본인 촬영 신이 아닌데도 정우성마저 따라서 신문을 읊어본다. 사건의 심각성과 관계없이 컷 소리만 나면 저마다 신문을 외치는 바람에 현장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렇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의 대사 톤을 고쳐나가는 가운데, 신문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태수에게서 이어지는 장면 역시 태수의 수난시대다. “아니, 그 짐은 싸지 말라니까요? 곧 다시 올 건데 그걸 왜 싸요. 두고 가지. 간단한 것만 싸요. 간단한 것만. 금방 온다니까 자꾸 저러시네.” 좌천당한 태수 앞에서 눈치 없이 짐 싸기에만 충실한 어수룩한 수사관은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의 손모가지를 자르라 지시하던 인상적인 폭력배 역의 배우 조우진이다. 연기한 모니터 화면을 유심히 지켜보던 조인성이 한마디 한다. “나 망했다. 태수 이제 망했다고, 망했다.”

“영화 세편을 한꺼번에 하는 기분”

3월27일, 부산 해운대구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 2월 초 크랭크인한 <더 킹> 촬영이 한창이다. 하필 승승장구하던 검사 태수가 궁지에 몰린 날 찾았다 싶지만, 영화의 주요 배경인 전략수사부 세트가 철거를 앞둔 터라 오늘이 취재로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촬영 장비를 바리바리 싸들고 차로 7시간을 달렸다. 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했다. 여길 안 왔으면,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고도 후회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연신 스모그를 뿌리는 데다 세피아톤 조명이 주는 효과까지 깃든 현장 풍경은, 초고층 주상복합빌딩이 즐비한 바로 문 밖 2016년의 풍경을 금세 잊게 만들었다. 타자기와 육중한 다이얼식 전화기가 놓인 낡은 목재 책상들로 가득한 사무실. 한쪽 벽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또 다른 한쪽 벽엔 중앙 제1검찰청의 사건 수사 기록부가 보관된 열람실이 마련되어 있다. 가까이 가서 봐도 모두 ‘장관 뇌물수수 관련 수사결과 보고서’ 같은 타이틀까지 제대로 붙은 정교한 소품들이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조인성의 말처럼 영화 속 태수의 주요 근무지인 전략수사부는 지금이 아닌, 기억 속의 과거가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공간만 280곳이 등장한다.” 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김영삼 정권을 시작으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태수가 지나온 시절을 모두 재구성하다 보니 재현할 물량이 상당했다. <더 킹>의 공간을 연출한 이인옥 미술감독은 “기억이나 고증에만 매달리지 말자”는 원칙을 적용했다고 말한다. “기억은 총천연색이다. 세대마다, 개인마다 각각 다를 것이다. 프리 프로덕션 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모았는데,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과거로만 가면 식상하겠더라. 그래서 목포 양아치 출신의 태수의 과거에 초점을 두고자 했다.” 목포에서 나고 자라 서울을 동경하던 욕망에 찬 태수의 청년 시절은 원색의 과감한 톤을 사용해 컬러풀하게 갔다. 마치 태수의 욕망이 폭발하듯 목포의 풍경이 쿠바처럼 강렬하게 구현됐다. 태수가 1%의 상류층 검사가 되면서는 원색의 컬러를 버리고 서서히 고급스러움과 클래식한 톤을 더했다. 60~70년대 클래식한 영화들이 레퍼런스가 됐다. 태수의 집, 학교를 비롯해 오늘 공개한 촬영장인 전략부 세트, 전략부 검사들이 향응을 제공받는 펜트하우스 등을 모두 영화의 공간으로 제작했다. “영화 세편을 한꺼번에 하는 기분이다.”

여러 편의 영화를 콜라주한 듯한 <더 킹>의 다채로운 톤은 촬영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한재림 감독과 이번에 처음 호흡을 맞추는 김우형 촬영감독은 감독이 콘티 작업이 끝난 시점, 다소 늦게 합류했음에도 한재림 감독이 구현하고자 하는 톤을 빠르게 캐치한 든든한 조력자다. 김우형 감독은 시기별로 변화하는 색감이 태수의 속성을 말해주는 장치라는 걸 강조한다. “태수는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일을 시작한 후 어느 순간 진흙탕에 빠진 인물이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에 앞서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영화의 톤을 시종일관 어두운 누아르 톤으로 가져가지 않은 이유다. 태수가 검사가 되고 성공 궤도에 오르기 전을 컬러풀한 색감과 빠르고 가벼운 톤으로 유지하되, 검사가 되고 불미한 사건들이 불거지면서 점점 어두운 톤을 활용했다. “애너모픽렌즈를 사용해 2.35:1 화면으로 찍는데, 육중한 장비가 주는 클래식한 질감을 유지하면서도 움직임은 가볍게 가는 걸 목표로 했다.” 태수가 점점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하면서 벌어지는 변화를 살리는 것 외에도 <더 킹>은 내레이션을 위한 배경화면도 많이 촬영해야 했다. “지금까지 한 작업 중 내레이션이 가장 많다. 대사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화면으로 그 몽타주를 살려야 해서 그 부분에 대한 작업과 고민도 많았다.”

작품을 관통하는 극단의 요소들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부분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그 부분이 도드라지는 영화는 아니다.” 한재림 감독은 촬영 전 인터뷰를 통해 “<우아한 세계>에 코믹함이 섞여 있다”는 말로, 무게를 잡지 않은 <더 킹>의 톤을 설명했다. 그가 밝힌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는, 이제 막 1/3 지점을 지난 영화의 촬영현장에서 만난 스탭들의 작업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한재림 감독이 설명한 음악의 사용이 인상적이다. “굉장히 고급스러운 것과 천박한 것, 유머러스한 것과 진지한 것을 붙이려 한다. 이들의 입에서는 클럽에서 나오는 대중가요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화면으로는 클래식한 음악이 나오면서 생기는 이질적인 부조화가 이 영화를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이 상반되는 요소들이 어떤 효과를 자아낼까. 대한민국 부패의 역사를 훑는 듯한 리얼함과 그 리얼함을 판타지화하는 영화의 밝고 세련된 톤의 배합. 부산에서는 지금, 그 씁쓸한 역사의 구현이 한창 진행 중이다.

<더 킹> 시놉시스

전남 목포.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태수(조인성)는 싸움꾼이다. 고교 시절 도둑질을 일삼던 아버지가 검사에게 맞는 걸 보고, 권력과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길로 심기일전해 검사의 자리에 오르지만, 연줄 없는 검사는 일반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던 중 권력의 중심에 있는 한강식 검사(정우성)를 알게 되고 그의 수하가 된다. 목포에서 함께 자란 친구 두일(류준열)이 그의 뒤를 봐주며 함께 세력을 넓혀가지만, 과연 그 성공이 무한대일까? 나락의 끝에 결국 그는 부패의 온상인 한강식과 대결하게 된다.

정우성과 조인성의 영화 속 슈트는 몇벌?

대한민국 검사의 새로운 미적 기준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더 킹>만큼의 판타지가 또 있을까. “조인성, 정우성 슈트만 30벌이 넘는다.” 의상팀(조상경 의상팀)의 귀띔이다. 태수의 회상으로 구성된 몽타주 신도 워낙 많고, 흐름이 빨라서 상당히 많은 의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장에 마련된 의상팀 방을 노크했다. 사방을 둘러싼 행어에 조인성, 정우성의 슈트가 일목요연하게 걸려 있다. 완전하게 리얼리티를 살리기보다는 잘 안 쓰는 색감도 과감하게 적용한 특색 있는 슈트들이다. 태수의 경우, 신인검사 시절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의상에 서서히 반영한다면, 한강식은 신에 맞게 톤만 바꿔주는 정도로 세련됨을 유지했다. 정우성의 표현에 따르면, “스타일이 완성된 사람은 그 스타일을 계속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슈트 대부분이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로 제작한 것들이다. 빈티지한 옷을 구하더라도, 팔다리가 긴 두 배우가 입기에는 무리라 체형에 맞게 모두 수선을 해야 하는, 배우의 ‘기럭지’가 주는 난점이 있다. 특히 각 슈트에 맞는 셔츠나 타이로 작은 변화들을 살렸다. 영화의 시대가 80년대부터 30년을 커버해야 하니 셔츠도 색상별, 칼라 크기별로 무궁무진. 아빠 옷장에서 꺼내온 듯한 타이만 해도 수십개인데, 이 경우에는 제작을 해도 색감 차이가 나니 실제 브랜드의 빈티지 타이를 모두 구했다고 한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1초도 안 나오니 좀 아쉽긴 하다”는 의상팀의 고충 뒤로, 화려한 슈트의 세계가 펼쳐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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