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권력자 시선의 한국 현대사를 전하고 싶었다”
2016-04-20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한재림 감독 인터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그리고 싶었다.” 영웅이 아닌 ‘악인’을 주연으로 내세운 만큼 <더 킹>은 새로운 시선이 예상되는 기대작이다. <관상>(2013) 이후 3년 만의 차기작 제작 현장에서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100회차 촬영의 1/3 지점을 통과했다는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 “촬영 전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조인성씨와 작업을 먼저 마쳤는데, 헤어지면서 스탭들과 사운드 후시할 때 여기서 다시 보자고 했다. 그게 7월 이후다. 7개월이나 지나야 다시 녹음실로 가겠구나. 무섭더라. (웃음)” 전쟁터 같은 촬영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2월 초 크랭크인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고민과 현장에서 오는 차이는 무엇인가.

=더 좋아지는 부분도 있고, 더 재밌어지는 부분도 있다. 내가 썼지만 새로 알게 되는 부분들도 생긴다. 아, 이런 뉘앙스가 더 짙어지는구나 싶기도 하고 김우형 촬영감독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자고 했다. 다소 늦게 합류했고 프리 프로덕션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도 역시 김우형 촬영감독이구나 싶더라.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서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고, 그렇게 서로 아이디어를 ‘던지면서’ 찍고 있다. 그렇게 던지고 보안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오늘 현장을 보니 세트 구현이 무척 정교하다. 촬영 전 인터뷰에서 “80년대부터 각 시대를 재현하지만 오히려 그걸 느낄 수 없게 하는 클래식함을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고민이 많아지더라. 전체 톤을 어떻게 잡을까가 관건이었다. 리얼하게 갈 건가, 영화적으로 갈 건가. 그 중간지점을 찾기가 힘들더라. 리얼하게 가다보면 재미가 떨어지고, 영화적으로 가다보면 너무 과장되고. 지금 보이는 클래식한 분위기가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를 통과하는 시대 배경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 같았다. ‘촌스러운 것도 세련된 것도 아닌, 어떤 시대에도 있을 만한 것들을 좀 찾아보자. 옛날 영화인데도 세련된 영화들이 있다. 그게 뭔지 찾아보자.’ 그걸 고민했다.

-현재의 태수가 자신이 걸어온 흥망성쇠를 지켜본다. 내레이션으로 구성된 1인칭으로 극 전체를 끌고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를 권력자들의 시선에서, 권력자들 편에서 이야기를 그리자 생각했다. 한국 현대사를 비극이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많이 그렸는데 권력자나 성공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린 시도는 별로 없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권력을 유지한 사람들 입장에서 지켜보는 한국 현대사가 더 재밌고, 더 아이러니하고, 더 많은 걸 느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권력의 층을 지나온 인물이 회상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나는 양아치였다. 그런 놈이었다. 판단은 당신들이 하는 것이다’에 이르며 자기반성을 하게 되고, 결국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1인칭 내레이션은 아무래도 태수라는 일반적 의미의 ‘악인’을 합리화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태수의 ‘정도’를 정하는 게 그래서 힘들더라. 어쨌든 관객이 동화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톤을 잡기가 힘들더라. 어떤 점에서는 이해가 되다가도, 어떤 면으로 보자면 너무 나쁜 놈이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내가 왜 저런 놈을 따라가지 싶어질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태수에 대한 관객의 허용치를 가늠하면서 쓰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태수의 회상으로 과거가 구성되다보니 극의 전개가 워낙 빠르다. 이렇게 빠른 전개에서 오는 가볍고 밝은 톤이, 기존의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과 달라 보인다.

=<더 킹>이라는 제목에서 오는 뉘앙스도 그렇고, 모두 좋은 슈트를 입고 있지만 그 이면의 천박함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멋있는 사람이지만 하는 행동들은 웃기고,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그냥 툭툭 해버리고. 이런 상반된 대조가 주는 재미가 있어서 찍다보니 나도 키득거리게 되더라. 누아르영화에서 주는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버리고 재밌게 찍으려고 노력 중이다. 하나의 드라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찍으면서 다양한 느낌을 받고 있다. 나중에 예고편을 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배우가 들어오면서 다소 미묘한 지점들이 구체화됐을 것 같은데.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기존 작품에서 보여준 속성이 그악스럽긴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게 어떤 효과를 불러오던가.

=인성씨가 갖고 있는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섹시한 면. 관객이 싫어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건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타고난 선물인 것 같다. 그런데 이걸 우리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인성씨가 그 미묘한 지점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다. 내가 지금 끼를 부리는 건 아닌가, 일부러 귀엽게 해서도 안 되고. 리얼하게 감정을 표현하면서 미워하지 않게 보여야 하는 연기다. 그런 면들은 감독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다. 내가 대신 보여줄 수도 없고(웃음), 그런데 인성씨의 해석이 뛰어나서 깜짝 놀랐다. 이 영화가 나오면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이제까지와는 확실히 달라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겪는 태수와 달리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건 권력의 정점에 있는 한강식을 연기하는 배우 정우성이다. <관상>의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 같은 강렬함을 기대하게 된다.

=그간 내가 본 정우성 선배는 굉장히 젠틀하고 재밌었다. 다른 면으로 이런 특징을 활용하면 어떨까 싶더라. 처음부터 한강식 역에 정우성 배우를 생각했다. 한강식은 이미 권력자다. 태수가 권력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유지하는 사람이다. <관상>의 수양대군이 목적의식이 굉장히 강한 야욕을 가진 사람인 것과 달리 한강식은 좀더 교활하고 천박한 면이 많은 인물이다. 한국 사회의 권력자가 가진 리얼함을 영화적으로 담으려고 한 인물이다. 어제도 폭력 장면을 찍는데, 카리스마 있기도 하고, 굉장히 웃기기도 하고, 기복이 심한 캐릭터라 보는 재미가 크더라. 무엇보다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하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태수의 욕망은 검사가 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검사가 되어, 부자가 되고 싶고, 세련된 옷도 입고 싶고, 품격도 갖추고 싶어 한다. 태수의 욕망 안에 결국 한국인이 잘사는 사람들을 향해 가진 콤플렉스가 집약되어 있다. 출세를 꿈꾸고 실행하는 태수를 관찰하고 있으면 지금의 한국 사회가 적나라하게 요약돼 있다.

=촬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정말 한국 사회가 이런 거 아니냐. 겉으로는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교양이 없기도 하고. 신사도나 명예에 대해 깊이 생각지도 않는다. 너무 실리적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천박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딱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대한 가치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검사의 권력을 이용하는 태수의 선택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이다. 관객이 악인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실은 조인성이나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그런 것을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컸다. 시나리오를 보고 누군가 이 영화를 ‘화려한 <우아한 세계> 아니냐’고 하는데 사실 <우아한 세계>는 리얼한 쪽으로 갔다. 판타지도 없고 드라이한 쪽으로 확 가버렸고, 엔터테인먼트한 요소들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지금 이 사회에서 들끓고 있는 지점과 만나면 효과가 있을까 궁금하더라.

-회차가 많은 데다 톤의 변화도 심해 스탭들의 고충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공간이 많아서 그렇다. 전체 100회차 되는데, 공간이 280개, 신이 170개다. 영화에서 공간이 280개가 지나는 거니 그런 거다. 하루 가서 두세 신 찍는다. 여기 잠깐 갔다가, 저 얘기 하면 저기 가 있고. 이 얘기 하면 여기 가 있고. 그러니 자연히 작업량이 많아진다. 그런데 그게 재미다. 공간이 바뀌는 걸 보면서 태수의 인생이 변화하는 걸 보는 거다. 그게 장점이니 버릴 수도 없고. (웃음) 매 신 뭔가 새로 찍는다. 시대도 계속 바뀌고, 시간도 바뀌고, 흐름도 빠르고. 흐름이 빠르다고 대충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엄청 빨리 지나가는데 지금까지 찍은 걸 보면 다행히 엉성하다는 느낌은 없다. 관객에게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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