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네아스트 클레르 드니 감독이 서울을 찾았다. 4월12일부터 5월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되는 감독의 회고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빔 벤더스, 짐 자무시를 비롯해 올해 초 타계한 자크 리베트 감독의 조감독을 거치며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이다. 한국과는 영화제를 통해 인연을 맺어왔다. <금요일 밤>(2002)으로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감독은 그해 영화제의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고, 2011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어느 여행자의 기억: 디지털 삼인삼색 2011>(2011) 중 <데블>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국의 시네필들이 사랑하는 감독이지만 아쉽게도 국내 개봉작은 최근작 <돌이킬 수 없는>(2013)이 유일하다. 감독의 작품이 낯선 관객이라면 감독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총 16편을 상영하는 이번 회고전을 그 입문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관객은 익숙한 관계 안으로 부지불식간에 파고드는 낯선 이의 침입 혹은 틈입을 통해 클레르 드니가 그리는 두려움의 실체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젯밤(4월15일) <돌이킬 수 없는> 상영 후 서울 관객과 첫 만남을 가졌다. 관객 질문이 끊이지 않는 등 상당히 열띤 현장이었다.
=무척 기뻤다. 관객과의 대화는 참석할 때마다 내게 ‘균형’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관객으로서는 다소 듣기 거북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감독으로서는 솔직한 생각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켜준 관객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혹시나 관객이 나의 말을 듣고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내가 코미디언까지는 못 되지만 어떻게든 즐겁게 해보려고 하는데…. (웃음) 때때로 관객과의 대화가 끝나면 ‘아,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곤 한다. 다행히 어제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즐거운 만남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시나리오를 쓸 때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성역>과 구로사와 아키라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1960)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들을 즐겨 읽는다. 그가 가족, 이웃 등 일군의 무리를 묘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집단 안에서 개인은 자신이 동의하지도 않았는데도 어느새 비극의 한가운데에 서 있곤 한다. 포크너의 소설을 읽고 있자면 인간이 마치 인생의 포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독자에게 인생에 대한 거대한 비전을 제시해보게끔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누아르, 컬트영화를 통해 2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의 잔인한 미래상을 보여줘왔다. 그는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빈부의 격차, 직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 원치 않는 일임에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지점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당신 영화의 비극성은 종종 혈연공동체인 가족 내의 균열이나 그 가족을 위협하는 외부의 요인들 때문에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오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의 경우는 사회적 금기인 부녀간의 섹슈얼한 관계 맺기까지 보여준다.
=비극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도시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도시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는 곳이 가족이다. 그것도 굉장히 잔인한 방식으로. 가족간에도 서로의 관계가 지나치게 강렬하게 엮여 있으면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아들이 엄마와, 딸이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남매 사이도 마찬가지다. 나도 어릴 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치게 과장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가족간의 유대라는 것도 강력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남녀가 갑작스레 만나 관계를 맺는 <금요일 밤>은 물론이고 프랑스 내의 흑인, 이주민 사회를 들여다본 <35 럼 샷>(2008)과 같은 영화에서도 섹슈얼리티를 탐하는 긴장감이 흐른다.
=<35 럼 샷>은 성적 긴장감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애정이 깊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그렇게 평생을 함께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이이고, 딸과 나란히 누워 잘 수도 있지만 딸을 보호해주려는 아버지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의 부녀 관계는 다르다. 일반적인 부녀 관계의 선을 넘어 서로를 침범한다.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신체를 이용하는 작업이 아닌가. 감독인 나도 영화를 만들면서 내 몸을 느낀다. 내 안의 감정을 배우를 통해서 표현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내 영화가 관능적으로 보인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관능적인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는 서로를 탐하는 육체를 정면으로 보여주려기보다는 신체의 세부를 가까이 또는 멀찍이서 바라보는 방식을 택한다.
=진정성을 갖고 배우들과 작업하고자 한다. 배우들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촬영의 순간에 배우들이 나를 신뢰하길 바란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2001)에서 여주인공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감독인 내가 화면을 통해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를 본 누군가는 그런 장면 속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말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성교에는 동물과 같은 면모가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인간이 육체적인 경험의 극치를 경험하면 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인간적이 된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남녀 사이의 성적 관계를 담을 때의 내가 택하는 카메라의 위치도 그렇다. 그들이 침대가 아닌 계단이나 차 안처럼 좁은 공간에서 관계를 맺는다면 당연히 카메라는 침대에서와 다른 위치에서 그들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이때도 중요한 건 영화는 모사된 것(fake)이라는 점이다. 영화가 가짜라면 굳이 성적 관계를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나. 되레 카메라가 관객에게 이미지를 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 카메룬을 배경으로 백인 장교의 아내와 원주민 남성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뷔작 <초콜릿>(1988), 아프리카 대륙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백인 여성의 이야기 <백인의 것>(2009) 등을 통해 아프리카 사회를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을 담아왔다. 카메룬, 소말리아, 지부티 등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험이 작품 안에 자연스레 녹아든 것 같기도 하다.
=어떨 땐 학교에 가면 나 혼자 백인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계속 이주를 하다보니 주변 친구들의 인종, 종교도 달랐다. 또 대도시보다는 외곽으로 갔고, 야생의 생활을 많이 했다. 사실 나는 그런 환경이 지극히 정상적인 줄 알았다. 물론 ‘내가 백인이구나, 이들과 다르구나’라고 인식하긴 했지만. 내 가족이나 내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주변의 다른 백인 가족들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지 흑인을 대하는 그들의 방식은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우월하게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런 경험이 내 영화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초콜릿>의 배경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가 끝나갈 무렵이다. 반면 <백인의 것>은 식민지 시대 이후, 현대를 바탕으로 한다. 두편의 영화는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그곳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백인의 것>의 백인들은 아직까지도 본인들이 흑인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다. 물론 내가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 데는 이보다 더 사적인 경험이 반영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돌아보면 사실 같은데, 내 어머니 덕분이다.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당시 성장기를 보내셨는데 그때 영화관 가길 굉장히 좋아하셨다. 외할아버지와 일주일에 한두번씩은 꼭 극장에 가셨다고. 연세가 지긋한 지금도 영화를 좋아하신다. 아프리카에서 영화관을 갈 수 없었기에 영화관에 간다는 건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35 럼 샷>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를 오랫동안 보여준다. <돌이킬 수 없는>의 주인공은 자동차로, <백인의 것>의 주인공은 버스로 이동하며 <침입자>(2004)에도 자전거가 나온다. 유독 탈것에 오른 인물을 길게 보여줘왔다.
=인물의 직업적 특성과도 연관되지만 그보다는 인물의 감정, 특히 사랑을 대하는 인물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여가는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지켜봐야 하는 게 바로 그것이라 생각해 길게 보여주곤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금요일 밤>의 뱅상 랭동, <침입자>의 그레구아르 콜랭뿐 아니라 마티 디오프, 니콜 도그 등 한번 작업한 배우들과 여러 편을 같이 해왔다. 익숙한 배우들과의 작업을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그들을 좋아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기도 바쁘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위해 쏟아부을 힘도 이젠 없다. (웃음)
-인복이 있다고 해야 하나. 좋은 사람을 만났기에 계속 작업해보고 싶어지는 게 아니겠나. (웃음)
=사람을 좋아하려고 하다보면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어떤 감독은 배우와 싸워야만 좋은 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싸우기 좋은 배우를 찾아 작업하곤 한다. 물론 감독도 어느 정도 자기 안의 감정이 올라와줘야 작업하는 게 수월한 건 있다. 각자의 방법이 있겠지.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나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과 같은 유를 좋아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나선 셈이다.
-때때로 당신의 영화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어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해피 엔딩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모든 영화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관객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사하는 데 자신이 없다. 마지막이 행복하게 끝나는 데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거기에 행복감을 위해서라는 이유는 없다. 나는 영화의 리듬, 사운드, 이미지 등의 상호작용과 그 연결고리를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잘 짜인, 구성된 즐거움에 가깝다. 그걸 느끼는 데 해피 엔딩은 필요 없다. 대신 내 영화에는 엔딩이 반드시 있다. 이야기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식의 오픈 엔딩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현재 신작을 촬영 중인 걸로 안다. 시나리오를 작업할 때마다 음악을 꼭 듣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번 작업은 어떤 음악을 들으며 시작했을지 궁금하다.
=평소에는 모리스 라벨의 곡을 많이 듣는다. 2차원적인 현실에 입체감을 불어넣어준다. <35 럼 샷> 땐 코모도스의 <나이츠 시프트>를, <백인의 것> <침입자> 때는 틴더스틱스의 <마이 시스터>를 많이 들었다. 신작의 음악도 나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 틴더스틱스의 리더인 스튜어트 A. 스테이플스가 만들고 있다. 내 오랜 친구인 촬영감독 아그네스 고다드와 촬영 중이다. 꿀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벌떼처럼 모든 스탭들이 집중하고 있다. 그 꿀의 질이 어떨지는 두고봐야겠지만. (웃음)
-최근 벌어진 부산국제영화제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영화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영화제를 대하는 부산시와 정치가들의 모습이 마치 잘 자란 나무를 베는 벌목꾼들 같다. 작은 나무가 자라 큰 나무가 돼 꽃을 피웠는데 잘 자랐다며 잘라내는 것과 뭐가 다른가. 내 작품을 상영했던 영화제라 내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큰 의미가 있다. 나뿐이겠는가. 전세계 영화인들에게 꼭 필요한 중요한 영화제다. 솔직히 말하라. 부산시도, 정치인들도 영화제가 필요하지 않은가. 부산국제영화제가 파행으로 운영되는 건 정말 원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