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병태와 영철은 웃기만 한다. 한 친구가 얼굴에 왜 함박꽃이 피었냐고 물을 정도다. 그들은 현실을 이겨내려고 바보처럼 웃었던 것 같다. 웃음과 우스갯짓이 인상에 남아서 영화의 결말부를 간혹 잊는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영철(하재영)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고 입대 신체검사에서도 떨어진 자신을 불합격 인생으로 여긴다. 그는 고래를 잡겠다며 자전거를 몰고 동해(실제로는 부산)로 간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머물던 고래는 바다에서 안식처를 찾았을까, 아니면 그것은 한낱 청춘의 죽음이었을까? <바보들의 행진>을 보면 볼수록 주제는 거기에서 찾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군부독재 아래 청춘을 보내야 했던 청춘의 얼굴에서, 하길종은 죽음을 발견했다. 이후 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만들어진 청춘영화에서 바뀐 건 없다. 영화 속 청춘은 여전히 죽음과 폭력의 주변을 맴돈다. <스물>(2014)이나 <족구왕>(2013) 같은 영화는 별종에 속한다. 하긴 현실에서 바뀐 게 없는 탓이기는 하다. 1975년의 독재자가 낳은 딸이 2016년 현재 한국의 대통령이다. 한국의 수많은 청춘영화에 드리운 죽음의 긴 그림자는 1970년대의 폭압적 상황이 현재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방증한다.
청춘과 죽음의 관계
청춘영화의 폭력과 죽음은 인간에 내재한 본능보다는 사회문제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그런 상황을 은유한다. 그렇지만 청춘영화가 죽음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배경을 무조건 현실에서 찾을 수는 없다. <글로리데이>(2015)의 네 아이들은 입대하는 친구의 배웅을 겸해 포항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자가 폭행을 당하는 현장에서 그들은 싸움에 휘말린 끝에 살인범 누명을 쓴다. 권력을 등에 업은 여자는 거짓말을 내뱉고, 아이들은 가족의 계급적 위치에 맞춰 줄을 선다. 시의회 의원을 아버지로 둔 아이, 대학교 야구팀 감독을 아버지로 둔 아이,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는 아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아이. 현실의 굴레에 고개를 숙인 아이들은 가장 힘없고 약한 아이에게 벌을 넘긴다. <글로리데이>는 사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아니다.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도식적이다.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서 청춘과 죽음의 관계는 설득력을 잃는다. 죽음은 사건을 구성하기 위해 불려나온 것인데, 두 죽음을 초래한 사건이 청춘의 민낯을 까발리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왜 죽음인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커터>(2015)도 다르지 않다. 퀴어와 청춘영화의 결합을 시도한 이 영화에서 살인은 장르적 장치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느새 죽음과 청춘은 장르적 동반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청춘의 사건=죽음과 관련된 무엇이라는 등식은 왜 만들어진 것일까.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나 죽음으로 완성하는 것과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이 반복해서 보이자 나는 그들이 죽음의 놀이를 버릇처럼 욕망하는 게 아닐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런 생각도 가능하다. 만연해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춘이 우울한 세계를 버티거나 건너는 방법으로 죽음을 불러냈다는 것, 그것을 기성세대로서 읽지 못한다는 것. 슬프게도 어느 경우건 미래는 없다. 한국의 청춘영화는 성장과 무관하다. 아이들은 자기 시간 안에서 떠돌 뿐이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건 소년과 청년의 시기다. 입을 열어 저항해야 할 시기에 죽음으로 침묵한다. 나는 <글로리데이>가 왜 죽음으로 열고 닫는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수색’이라는 공간
<수색역> 또한 죽음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청춘영화다. 조폭 장르적인 성격과 예스러운 톤으로 인해 <수색역>은 곽경택의 <친구>(2001)나 조범구의 <양아치어조>(2004)와 비슷하다는 첫인상을 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비슷한 청춘영화들 사이에서 이 영화가 유독 푸대접을 당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작용한 듯하다. <수색역>을 지배하는 것은 분명 폭력과 죽음이지만 이 영화의 비극은 습관적인 소재로 읽히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수색역>이 수색이라는 공간(과 1999년이라는 시간)에 단단하게 발을 디뎠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네 아이인 윤석, 상우, 원선, 호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수색’이라는 가난한 공간의 유산을 이어받는다. 공간은 아이들을 옥죄는데, 두 아이의 몸과 욕망이 빚은 비극의 시간은 뒤틀린 채 내달리고, 두 아이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다. <수색역>은 그것들의 충돌(과 여파)에 관한 이야기다.
수색. 요즘에야 일산, 파주 등의 개발로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서울 사람들도 잘 찾지 않는 변두리였다. 그곳에 자리한 수색역 곁으로 ‘디지털미디어시티’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의 역이 들어섰다. 새로 이름을 바꾼 서울의 역들처럼 디지털미디어시티역은 ‘우리 동네가 그럴싸하게 바뀌었어요’라는 허세를 명칭으로 드러낸다. 거기에 가면 디지털과 미디어가 상조하는 시설이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펼쳐져 있을 것 같다. 일부는 사실이다. 철로 건너편으로 돈 잘 버는 방송사 빌딩들이 눈이 찢어질 만큼 거대한 빌딩을 세웠다. 조용하던 동네에는 방송사의 돈 잘 버는 인간들에게 굽실거리는 음식점과 술집이 줄줄이 생겨났다. 디지털미디어소도시의 탄생. 그렇다면 철로 이쪽 원래 수색은 어떠할까? 아직까지 마을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상공에서 그쪽과 이쪽을 나란히 본다면 도시 내 계급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하긴 이쪽 동네의 땅값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올랐을 테지만(모르고 하는 소리라면 죄송하다).
<수색역>은 한국의 망조인 부동산이 폭등했던 어떤 시기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1980년대는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유령이 얼굴을 얻어낸 시기다. 일반인이 손도 대지 않았던 주식은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거대한 돈벌이와 동시에 파산의 대상이 되었고, 아줌마들의 치맛바람급이던 부동산은 대기업의 가세로 나라를 뒤흔들 시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나마 1980년대에는 가능한 꿈이던 부동산은 21세기 이후엔 신기루가 되었다. 부자가 손바닥 뒤집듯 더하는 집 한채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수십년 동안 돈을 모아도 접근하지 못할 대상으로 자랐다. <수색역>은 그사이의 지점인 1999년에 시작한다. 물론 부동산 영화는 아니다.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을, 그러니까 그 시기를 잘못 통과한 것으로 취급받는 청춘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가난보다 강렬한 건 없다.
<수색역>의 중심에는 자기 파괴적인 성격의 상우가 있다. 양아치 특유의 헐거운 양복을 입고 어른으로 행세하려 들지만 통하는 건 하나도 없다. 아버지의 고물상을 잇기 싫었을 뿐인데 자꾸 친구들과 어긋난다. 싸울 힘도 모자라 친구, 여자친구, 깡패에게 줄지어 얻어터진다. 그래서 얼굴과 몸이 온통 멍으로 얼룩진다. 청춘의 통과의례를 몸으로 기억하는 그는 쓰레기가 나뒹구는 수색의 풍경과 닮았다. 얼핏 몰락하는 청춘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기실 몰락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들은 부모가 걸었던 길을 뒤따랐던 것이고, 그 길이 21세기로 약삭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달랐을 따름이다. 불구가 돼 걷지 못하는 원선이처럼, 다리가 멀쩡한 아이들도 동네 바깥으로 이동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어머니가 하던 야채 가게를 이어받고 누군가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공장에서 일한다. <수색역>은 운명마저 공간에 얽매인 아이들의 이야기다. 단, 공간과 비교해 그들의 이후 시간을 낭만적으로 응시하는 부분은 다소 헐겁다. 영화와 배우들의 성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21세기 직전에 머문 노스탤지어는 이 영화에 대한 지지를 머뭇거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