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은 외지인(구니무라 준)이 낚싯바늘에 지렁이 미끼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낚시꾼의 모습을 하고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구니무라 준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도무지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기어이 관객이 ‘미끼’를 물게끔 만든다. 더군다나 대사도 거의 없어 오로지 신체의 언어로 ‘다양한’ 외지인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리들리 스콧의 <블랙 레인>(1989),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003),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2010),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2014) 등 35년간 다양한 영화적 경험을 쌓은 그는 <곡성>으로 처음 한국영화를 체험했고, 제69회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도 밟게 되었다. 한국을 찾은 그에게서 <곡성>을 경험한 소감을 들었다.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 큰 캐릭터였는데, <곡성> 출연을 결심하기까지 어떤 고민들을 했나.
=확답을 하기까지 고민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일단 시나리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영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흥미로웠다. 또 나홍진 감독이 나를 만나러 직접 일본에 왔고, 감독과 얘기를 나누면서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추격자>(2008)와 <황해>(2010)도 찾아봤다.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외지인 캐릭터는 어떤 사람 같았나.
=일종의 이질적 존재인데, 초반엔 스스로 그런 자각이 없는 인물처럼 그리려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면 외지인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데,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마지막 모습에서 시작해 역으로 계산해서 외지인 캐릭터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나홍진 감독과의 첫 만남, 첫 작업은 어땠나.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땐 마치 소년 같았다. 이 사람이 영화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라는 게 전해졌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시나리오를 써서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
-감독과는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촬영 중간에 감독님이 나한테 질문한 적이 있다. 외지인 캐릭터가 신이라고 생각하는지 악마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때도 정확히 답은 내리지 않았다. 나는 외지인 캐릭터가 선과 악의 모습을 모두 가진 동전의 양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앞면이 보이면 신으로 보이기도 하고, 뒷면이 보이면 악마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두 모습을 모두 가진 하나의 존재가 아닐까, 그렇게 해석했다. 연기할 때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노출 장면,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는 장면 등 강렬한 장면이 많다.
=이런 장면을 연기한 건 처음이다. 동물 사체를 뜯어먹는 장면에선, 내가 입을 대는 부분만 육회를 발라 만든 동물 사체 소품을 이용했는데, 육회를 좋아하는데도 테이크를 너무 많이 가니까 힘들었다. 이제는 좀 그만했으면,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웃음) 요괴처럼 등장하는 장면에선 어떻게 하면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연기했다.
-나홍진 감독의 집요함을 느낀 순간이 있다면.
=항상 그렇게 느꼈다. (웃음)
-원래 대퇴부가 안 좋아서 촬영하면서 약을 많이 복용했다고 하던데.
=촬영할 때 몸상태가 안 좋았다. 그런데 산속에서 뛰어다녀야 했다. 나홍진 감독도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내가 더 건강했다면 ‘좀더, 좀더’ 그랬을 텐데 내 몸상태를 생각해서 봐준 게 아닐까 싶다.
-훈도시만 걸친 빨간 눈의 요괴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시나리오상에선 네발로 걷는 설정이었던 것으로 안다. 두발로 걷는 모습으로 바뀐 건 왜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현장에선 네발로 걷는 연기도 했는데, 나홍진 감독이 최종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다. 네발로 걷는 연기보다 두발로 연기하는 게 관객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느낌이라 그런 건 아닐까 싶다.
-<곡성>의 촬영지가 주는 기운은 어땠나. 현장의 기운에 영감을 받기도 했나.
=시나리오만 보고 공간을 상상하면 감이 잘 안 온다. 현장에 가서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냄새를 맡으면 그제야 내 몸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산속에 위치한 외지인의 집을 확인하고 나서 그 공간의 기운에 맞게 캐릭터를 연기했다. <곡성>은 산속 촬영이 많았는데, 나무에서 생명력도 받고 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받았다.
-자신의 은신처에서 굿하는 장면이 있는데, 굿을 위해 따로 배운 게 있나.
=나홍진 감독이 처음엔 독특한 모양의 북채로 북을 두드렸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북채가 티베트 지역에서 사용하는 북채라고 하던데 영 손에 익지 않았다. 촬영 전까지 계속 연습했는데 잘 안 되더라. 촬영날 나홍진 감독 앞에서 북을 치는데 영 어설펐는지 크게 실망하더라. (웃음) 그래서 이상한 모양의 북채로는 도저히 안 될 거 같으니 평범한 북채로 북을 두드리면 안 되겠냐 해서 북채를 바꿨다. 제대로 된 북채로 하니까 오케이가 났다.
-한국영화에 출연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일본영화 작업할 때와 차이점이 있던가.
=배우들에게서 차이를 느꼈다. 한국 배우들은 영화 작업에 대한 동기 부여가 굉장히 큰 것 같다. 영화 작업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크게 두고 작업하는 것 같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국에서 영화의 위상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국 배우들이 가진 영화에 대한 인식과 에너지에 나의 수준을 맞춰야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의 수준과 에너지를 높이는 게 중요했다.
-소노 시온 감독과도 작업한 적이 있다. 소노 시온 역시 범상치 않은 감독인데, 나홍진 감독과 둘을 비교하면 어떤가.
=소노 시온과 나홍진 두 감독은 에너지 면에서 닮은 듯하지만 다른 타입이다. 소노 시온 감독이 영화 자체를 가지고 노는 느낌이라면, 나홍진 감독은 자신의 몸을 깎아가면서, 생명을 깎아가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 같다.
-영화에선 그토록 소름끼치는 눈빛을 보여줬는데 직접 보니 두눈에서 소년의 천진난만함이 보인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웃음) 배우들의 일은 이미지를 갖고 노는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상상한다.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연기하면 결과적으로 현실과는 다른 인물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연기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였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다.
=제일 큰 터닝 포인트는 아마도 리들리 스콧 감독과 작업한 <블랙 레인>이지 싶다. <에이리언>(1979)을 보고 대단한 감독이라 생각했는데 그와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블랙 레인>이 나의 두 번째 영화였다. 영화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던 때에 운 좋게 할리우드 시스템도 경험할 수 있었고 이제는 고인이 된 다카쿠라 겐, 마쓰다 유사쿠 같은 배우들과의 작업도 기억에 남는다. <블랙 레인>을 찍고 나서 앞으로 계속 영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현장을 굉장히 즐기는 것 같다.
=그렇다. 육체적으로 힘든 현장이라고 하더라도 현장에 가는 건 즐겁다. 그게 힘들게 느껴지거나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일은 더이상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