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가만히 있는데도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강렬한 에너지가 오래 남았다.”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은 몇해 전 우연히 마주친 김주혁의 첫인상을 또렷이 기억했다. 감독을 놀라게 했던 김주혁의 에너지라는 건 아마도 말수 적고 점잖은 사람 특유의 심도 있는 눈매가 만드는 파장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다. 내가 손해보고 말지. 배우라면 때론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김주혁은 어떻게든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애태우는 쪽보다는 세상사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며 덤덤히 받아들이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으로써 얻게 됐을 평정심이 그의 ‘강렬한 에너지’가 돼준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은 없다>의 종찬 역에 김주혁을 덧대보는 건 영 엉뚱한 일 같지 않다. 종찬은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정치 신예다. 곧 있을 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하려는 야심가다. 승부사인 종찬은 속마음을 꾹꾹 눌러뒀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터뜨리는 타이밍을 태생적으로 아는 유의 인간이다. 선거 15일 전, 종찬의 딸이 실종됐다. 하지만 종찬은 흔들리지 않고 선거 유세에 몰두해간다.
딸이 사라지면서 가족의 실체가 드러나는 <비밀은 없다>의 서사에 김주혁은 주저 없이 끌렸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갈증은 더없이 컸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종찬이다보니 그 상태를 표현한다는 게 정말 힘들었다. 연기자는 뭔가를 조금이라도 더 표현하려 한다. 그래야 관객이 캐릭터를 좀더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번에는 끊임없이 감정을 눌러야 했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한다고 해서 배우가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컨대 어떤 상황이 벌어진 상태에서 종찬이 밥을 먹는다고 하자 감독님은 종찬이 밥만 먹고 있는 듯 보이길 바라셨다. 상황에 대한 종찬의 생각이 투영되면 안 됐다. 자칫 극 전체가 재미없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의뭉스럽고 답답해 보이기까지 한 종찬의 톤을 잡기 위해 김주혁은 그 어느 때보다 감독의 디렉션에 의지했다. “내가 연기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될까, 계속 의문이 생기더라. 모 아니면 도겠구나 싶으니 두려움이 생겼다. 관객에게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느냐 아니냐는 사실 종이 한장 차이로 결정나는데 혹시나 내 연기 때문에 그 순간이 갈리게 될까봐 무서운 거다.” 그러면서도 김주혁은 “힘들었지만 하나라도 배웠다면 그것으로 됐다”며 느긋해지려 한다. <비밀은 없다>로 그는 발산이 아닌, 참고 끝까지 버티는 감정 연기가 뭔지를 제대로 경험했다.
<비밀은 없다>를 시작으로 김주혁의 선택들은 어쩐지 좀 달라지는 분위기다. <좋아해줘>(2015), <커플즈>(2011)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물의 연장선도 아니고, <구암 허준>(2013), <무신>(2012)과 같은 사극 드라마의 확고한 이미지도 아니다. 지난해 여름 연남동에서 촬영을 마친 홍상수 감독의 장편영화(제목 미정)에 출연한 것만 해도 그렇다. “감독님께서 촬영 한 시간 전 A4 넉장 분량의 시나리오를 주시는데 어떻게 외웠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연기해야지’라고 미리 준비하지 않고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거기서 희열이 오더라. 심지어 당시 내가 다리가 부러졌는데 부러진 채로 목발 짚고 찍었다. 영화 속 지질한 남자 캐릭터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더라. (웃음)” 날것 그대로의 연기를 하는 데는 2년간 출연한 예능 <해피선데이-1박2일> 덕도 컸다. “배우들이 예능에 출연해보길 추천한다. 연기자는 연기하는 자신만 화면으로 보게 되지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다. 근데 예능을 하면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게 연기에 도움이 되더라.” 악역도 맡았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와 손톱>(가제, 감독 정식)에서 미스터리한 인물 도진을, 촬영 중인 <공조>(가제, 감독 김성훈)에서 남북 형사가 공조해 잡아야 할 “나쁜 놈”이 됐다. “요즘 무슨 역을 해도 연기가 재밌다. 쉬지 않고 계속 작품을 할 생각이다. 작품 하나를 끝내면 미처 못다 한 연기에 대한 후회가 생긴다. 그 마음을 다음 작품으로 가져가 풀어야 한다. <공조> 끝내고 얼른 다음 작품 해야지. 쉬어봤자, 뭐, 내가 혼자 헬스장밖에 더 가겠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