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제이크 질렌홀)는 잘나가는 투자분석가다. 장인 소유의 회사에서 일하는 성공이 보장된 남자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이후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직면한 혼돈의 정체는 예상 밖이다. 그는 아내가 죽어 힘든 게 아니라 ‘아내가 죽었는데도 슬프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힘들다. 데이비스의 이상행동을 알게 된 사람들은 급기야 손가락질을 하며 하나둘 그를 등진다. 불안과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구원의 손길이 의외의 곳에서 온다. 아내가 죽은 그날, 데이비스의 화풀이 대상은 고장난 자판기였다. 돈만 날름 삼키고, m&m’s 밀크초콜릿을 내어주지 않은 병원 자판기에 화풀이를 한 데이비스는 고객센터 직원 캐런(나오미 와츠)에게 매일 편지로 상담을 한다. 캐런은 그런 그를 ‘미친놈’ 취급하는 대신,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을 택한다. <데몰리션>의 스토리가 흥미를 돋우는 지점이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은 항상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사람을 다급히 몰아세워, 살아갈 길을 묻는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HIV 바이러스 감염자 론 우드루프(매튜 매커너헤이)가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해 팔았던 신약 사업 때문이었다. <와일드>(2014)의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모하비 사막을 횡단했다. 죽은 엄마를 놓아주기 위한 강행군이었다. <데몰리션>의 데이비스가 찾아낸 방법은 ‘해체’(demolition) 작업이다. 가지고 있는 온갖 집기는 물론, 기거할 집까지 부수고 마는 데이비스의 파괴력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나 <와일드>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행동만큼이나 절박함을 담고 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라는 장인의 말처럼, 데이비스는 다 부수어버린 그곳에서 시작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의지를 찾아나간다. ‘나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는 우리들마저도 이 무거운 정에 세게 얻어맞는 느낌이다. 혼돈 속에서 점차 자신을 찾아나가는 데이비스의 심리를 표현해낸 제이크 질렌홀의 연기가 울림을 선사한다. 배우들에게 극한의 상황을 제시하고 그걸 통과하게 만드는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주문이 또 한번 빛을 발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