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형국의 영화비평] 상실로 드러나는 진실 <데몰리션>
2016-07-20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이후(after)를 통해 이전(before)을 상상하게 하는 <데몰리션>
<데몰리션>

성형외과나 체중감량 업체의 거리 광고에서 우리는 ‘before & after’의 대조 이미지를 본다. 광고 속 모델의 면과 선이 매끄럽게 바뀌면 인생도 반질반질해질 것처럼 유혹한다.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는 촬영 단계에서부터 얼굴을 인식해 피부를 밝고 곱게 보정해준다. 사진은 SNS에 올라 ‘좋아요’를 부른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으면 요구하지 않아도 기미, 주근깨, 뾰루지를 없애주는 것은 물론 턱선을 갸름하게 매만진 뒤 인화해준다. 전자제품의 버튼은 미끈한 터치패드로 대체되고 있다. 기업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의 공통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두드러지는 선을 없애고 매끄러운 제품 표면을 만들어낼 것인가로 모인다. 솔기 하나 없는 천의무봉의 선녀 옷을 원하는 욕망은 선과 면을 최소화한 디자인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거칠고 복잡한 내부는 매끈한 표면 아래 숨는다. 원래 있던 것(before)은 욕망하는 것(after)에 가려진다.

매끈한 것들 사이에서 발견한 균열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는 최근 저서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이렇게 썼다.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가 ‘부정성’을 예술의 본질로 보았듯,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면서 과잉된 긍정, 매끄러움에 의해 “타자 혹은 낯선 자의 비동일성 혹은 부정성은 완전히 제거된다”는 것이다. 과잉 긍정은 현대사회에 대한 냉정한 진단, <피로사회>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홀)는 아내 줄리아(헤더 린드)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다. 얼핏 표정만 봐도 낙제점 남편임이 드러나는 데이비스는, 2주째 물이 새는 냉장고를 고쳐달라는 아내의 말에 집중하는 척 매끄럽게 넘겨보려 하지만 실제론 건성으로 반응하고 있다.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줄리아가 남편을 바라보는 사이, 그러니까 관객이 줄리아의 시점으로 데이비스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교차로를 달리던 차 한대가 운전석쪽을 거세게 들이받는다. 여기까지가 1분 반쯤 되는 이 영화의 프롤로그다. 아내가 실려와 끝내 숨진 병원 복도에서 데이비스는 자판기 초콜릿을 사먹으려다 기계 고장으로 동전만 날린 뒤 업체에 항의 편지를 쓴다. 아내가 세상을 뜬 날부터 ‘손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데이비스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걸 인식하게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번지르르한” 집과 잘빠진 포르셰와 번듯한 금융투자 회사에서, 삐걱거리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매끈한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균열이 있는 것들을 발견해 하나하나 분해하고 부수던 데이비스가 집 냉장고를 모조리 해체해버린 새벽 2시, 자판기 회사의 고객서비스를 담당한다는 캐런(나오미 와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분해와 해체로 드러나는 실체

가까운 사이가 아닌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경우는 많다. 대부분 지인들로 연결된 페이스북에 비해 익명성이 강한 트위터에서 불평과 비판이 더 자주 폭발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매끄러운 표면이 아닌 거친 내면은 종종 익명 속에서 드러난다. 데이비스가 다음의 말을 털어놓는 상대는 열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다. “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내가 죽었는 데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마찬가지로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에다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아내와 결혼하게 된 과정이라든가 장인 필(크리스 쿠퍼)이 대표로 있는 회사 이야기를 시시콜콜 적어내려간다. 편지를 받은 캐런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데이비스의 화려한 표면이 아닌 울퉁불퉁한 내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캐런 역시 회사 사장과의 허깨비 같은 연애에 의문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이같은 고백 과정과 함께 데이비스는 자신의 결혼생활이며 회사생활의 껍데기를 하나하나 뜯어나간다.

<데몰리션>은 그날 이후(after)를 보여주면서 이전(before)을 상상하게 해주는 독특한 힘이 있는 영화다. 인물이 겪은 스펙터클한 재난 자체보다 그 이후를 주목하는 것이 재난의 실체에 접근하는 길임을 알려주는 빼어난 작품도 많은데(최근의 사례로는 <룸>이 있다), <데몰리션>이 주목하는 쪽은 ‘before’다. 화면은 사건 이후를 따라가지만 관객은 데이비스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조립돼왔는지, 그의 직장생활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됐는지 포장을 벗기고 분해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내의 흔적을 하나하나 해체해가던 데이비스는 급기야 줄리아와 결혼생활을 꾸려온 자신의 집을 죄다 때려부수기에 이른다.

애플의 디자인 원칙이나 북유럽 스타일의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선호하는 이라면 저 아까운 집과 세간들이 파괴되는 걸 보고 있기도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그 와중에 극 초반부터 눈에 밟히는 가구가 하나 있다. 직선과 직각만이 존재할 것만 같은 반듯하고 반들반들한 그의 집 침실에 구불구불한 선과 장식을 가진 줄리아의 화장대는 언뜻 보기에도 이질적이다. 끝내 화장대를 해머로 부수던 데이비스는 그 안에서 아내가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발견한다. 원래 있던(before) 숨은 사실이 굽은 다리와 금색 장식이 달린 앤티크한 화장대에서 나온다는 설정은 단순 논리라 해도 될 만큼 상징적이다. 이 시퀀스 직전에 캐런의 아들 크리스(유다 르위스)가 숨겨온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묻는 장면을 배치한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드러나 있는 것은 매끈하지만 대개 허상이며, 숨어 있는 것은 거칠지만 종종 사태의 실체에 가깝다.

현대인의 거친 내면을 보다

디지털 정보만으로 거액을 융통시키는 데이비스의 회사, 장인이 설립한 금융투자회사는 매끄러움을 좇는 현대사회의 또 다른 지표다. 실물이 아닌 데이터만으로 돈과 사람을 좌지우지한다. 앞의 책 <아름다움의 구원>에는 이렇게 써 있다. “데이터에는 내면성이, 뒷면이, 애매함이 없다. 데이터와 정보는 완벽한 가시성에 자신을 내맡기며, 모든 것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 정보에는 지식의 특징인 내면성이 없다. 지식은 흔히 일정한 저항을 극복해야만 쟁취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지식에는 부정성 또한 내재한다. 정보에 내재된 시간은 무차별한 현재 지점들로 구성된, 매끈해진 시간이다.” 장인은 줄리아가 남긴 보험금으로 그럴듯한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긍정의 힘으로 충만한 선의의 자선재단은 어디 한곳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장인은 뿌듯하다. ‘줄리아 장학재단’이 세워져 첫 장학생을 발표하는 행사 뒤편에서, 선발된 장학생이 유치한 변태라는 사실을 캐런만 알게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편치 않은 진실은 대개 번지르르함 뒤에 숨기 마련이어서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모른 채 살아간다.

데이비스의 파괴 행위를 도식적인 은유로 볼 수 있는 만큼, <데몰리션>은 장 마크 발레 감독의 감동적인 전작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나 <와일드>에 비해 지지 여부는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행복했더라는 결말 또한 부지런하지는 못한 각본이라고 판단하기에 무리가 없다. 종종 유령처럼 타자의 시선으로 줄리아를 등장시키다 막판에 손쉬운 화해를 하는 듯한 인상으로 지은 매듭은 특히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도 이 영화에서 매력이 보이는 이유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초점이 맞아가는 데이비스의 눈빛이, 매끈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현대인의 거친 내면을 정확히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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