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시사가 있던 하루 전 ‘여름 블록버스터 변칙 개봉’ 기사가 먼저 쏟아졌다.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의 독립애니메이션을 연출하고 극장 상황 때문에 개봉까지 애를 먹은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2016)을 제작한 연상호 감독으로서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연상호 감독은 이런 상황에 대해 “두 골룸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한다. 115억원이 투입된 좀비 액션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연상호의 전작에서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보이는 작품이다. 더불어 ‘실사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연상호 감독이 실사영화를 만들었을 때 일어날 법한 모든 근심과 우려, 기대가 한곳으로 수렴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액션과 서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꽤 근사한 결과물이 나왔다. 앞서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며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 감독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를 구현하는 연출 방식은 명백하게 ‘연상호 월드’ 안에 속하는 작품이다. 대중 상업영화 안에 자신의 색깔과 고집을 새겨 넣는 몇 안 되는 감독 리스트에 이제 연상호라는 이름을 올려도 좋을 듯하다.
-<부산행>은 ‘애니메이션 <서울역>의 그다음 날 이야기’다. 이야기의 초반 구성으로 돌아가보자. 왜 KTX고, 부산행인가.
=처음엔 지금처럼 부녀가 아니라 부자가 KTX를 탔는데 사람들이 좀비에 감염되기 시작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내가 쓴 최초 버전은 규모가 작았다.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처럼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요소의 영화를 생각했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2007)나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2002)같은 분위기도 떠올렸다. 무궁화호가 아니라 KTX로 설정한 것은 그 기차가 가진 속도감을 활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닫힌 공간인데 그 공간이 이동한다는 점이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역이 아닌 ‘부산행’이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부산역이라고 하면 애니메이션 <서울역>의 다른 이야기쯤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부산행>이라는 제목에서는 전혀 다른 단독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이 ‘속도전’이 일어난 발화점이다. 그리고 충무로 좀비물이라는 측면으로는 도전이기도 했다.
=원래 좀비물 마니아는 아니다. 배급사 NEW와 <서울역>을 진행하면서, 충무로에서 좀비물에 대한 소재의 위험성이 줄었고, 대중적으로도 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실사영화를 해봐도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기획하게 됐다. 좀비를 설정하면서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2004)와 하나자와 겐고의 만화 <아이 엠 어 히어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새벽의 저주>는 좀비물로는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드문 영화로, 리얼함을 바탕으로 좀비물을 구현하는 점이 신선하더라. 그동안 좀비가 서양인으로 주로 묘사되어왔으니 동양인에게도 과연 어울릴 것인지가 고민 중 하나였는데, 그런 점에서는 일본 좀비가 등장하는 <아이 엠 어 히어로>를 보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 좀비 장르의 특성과 역사에 크게 위배되지 않아야 몰입도를 획득할 수 있다.
=문외한으로서 세운 기준이 ‘대중이 알 수 있는 좀비여야 한다’라는 점이었다. 좀비 설정이 잘못 받아들여지면 영화가 나아가는 줄거리 자체가 어색해질 수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 고민 때문에 촬영 때 바꾼 것도 많았다. 터널에 들어갈 때 떨어지는 야구공에 감염자들이 반응하는 설정은 현장에서 만들었다. 그래서 야구공을 급히 사오기도 했다. (웃음) 감염 속도가 정해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나는 사람마다 바이러스 잠복기가 다르니 그건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봤다. 그리고 지금껏 나온 좀비영화는 다 본 것 같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언데드’는 좀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는데도 언젠가부터 좀비영화의 표본이 되었다. 이후 여러 영화에서 좀비는 계속해서 변화해왔다. 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은 영화 속 설정들에 대해 모니터 시사나 칸국제영화제 상영 때도 문제가 되지 않아 안심했다.
-‘부산행 KTX’라는 구체적 실제와 좀비라는 이질적 요소를 무리 없이 결합하기 위한 설득력이 필요했다.
=그 부분은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의 크리처 디자이너인 장희철 디자이너가 잘 알고 지내는 형이라 디자인을 지켜볼 수 있었다. <괴물>에서 괴물이 처음에는 에일리언과 비슷한 형태였다가 점점 달라졌는데, 그때 봉 감독님이 요청한 사항이 있었다.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 송강호와 같이 섰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지적이 나에게도 도움이 됐다.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려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작업했다. 서구 장르영화에 한국인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스토리텔링, 톤 앤드 매너, 대사 모두 한국영화에 맞게 철저하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부산행>에 좀비라는 단어가 딱 한번 나오는데, 승객들이 휴대폰 보는 장면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좀비’가 떠 있다. 어떻게 감염되었는지 다루는 기사에, 한의학적 관점으로 볼 때 사상체질과 관련 있다는 댓글이 있다. (웃음)
-실사영화는 처음이라 애니메이션 작업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에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쓴 박주석 작가가 공동작가로 참여했다.
=아무래도 이런 영화는 아이디어가 중요한데 같이 이야기하고 전개시킬 상대가 있다는 게 좋더라. 시나리오와 콘티가 나오기 전까지는 실사영화를 한다는 부담이 컸다. 그런데 막상 시나리오가 나오고서부터는 그닥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시나리오대로 찍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1회차부터 별 부담이 없더라. 배우들은 좀 놀라기도 했다.
-초반에 배우들을 ‘당황하게’ 만든 빠른 연출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역시 비주얼을 동시에 진행하는 애니메이션 연출의 특성이 다분히 반영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평균 3테이크 만에 오케이가 났다. 건질 것 중심으로만 가고 변수가 없으니 배우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었을 거다. 나도 그런 부분은 애니메이션을 작업해와서 그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편 <창>(2012)을 만들 때 편집을 안 했다. 지원작이라 마감이 정해져 있었는데, <돼지의 왕>이 개봉한 직후라 <창>의 후반작업을 할 시간이 없었다. 1번부터 200몇번의 그림을 랜덤으로 걸 시간이 없어서 순서대로 정렬해서 만들었다. 편집을 안 하고 완성했다니 나 역시 놀랐다. (웃음) 애니메이션을 하던 방식대로 콘티 짤 때부터 아주 안전하게 짰다. 삐끗해도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게.
-석우(공유)와 딸 수안(김수안)을 제외하고는 열차에 타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그 안에서 스토리를 구축한다. KTX에 탑승했다는 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지만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구성된다.
=탑승객을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인물들로 구성하고 싶었다. 중요한 건 캐릭터들의 변화였다. 그건 <서울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서울역> 오프닝에 나온 지나가는 청년들은 보편적 복지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통해 어떤 정치적 성향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나중에 청년들은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할 때 물대포를 맞는다. <부산행>에서는 할머니 두분이 뉴스에 나오는 시위 장면을 보며 말을 한다. 나중에 할머니들의 돌출행동과 그 대사들이 상반된 효과를 보여준다. 영화가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캐릭터를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받아들이기 쉬운 보편적인 캐릭터여야 했다. 상황 자체가 이미 특수하니 이전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에서처럼 어려운 캐릭터로 가면 영화 호흡이 떨어질 것 같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갈 경우, 캐릭터들이 단순화될 우려가 크다. 캐릭터들이 단순하다는 비판도 이런 지점에서 오는 측면이 있다.
=초반 시나리오에는 상화(마동석) 설정이 없었고 석우와 상화가 합쳐진 하나의 캐릭터가 있었다. 여성 캐릭터도 지금보다 훨씬 셌다. 석우의 아내가 등장해 비극성을 더 강조하려 했다.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을 다양한 군상으로 나누면서 어떻게 보면 캐릭터들이 더 기능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연출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가령 수안의 경우, 재난영화에서 보통 어린이들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민폐 캐릭터’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수안은 오히려 어른들을 돕기까지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감염체들에 의한 생명의 위협이 극대화되면서 이 영화의 ‘악’이 도출된다. 선과 악의 개념에서 벗어난, 이 사회가 가진 이기심의 발로를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다.
=열차 칸의 사람들을 선동하는 용석(김의성) 역을 처음엔 중학생으로 설정했다. 노숙자 역시 처음엔 악역으로 설정했다.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복수하는 캐릭터로 그렸다. 그런데 너무 부담스럽게 받아들여질까봐 유연하게 바꾸었다. 바꾸는 데 크게 미련은 없었다. 앞서 <서울역>이 그런 걸 반영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 거부감이 없더라. 연출자로서도 두편을 다르게 만드는 게 재밌다고 여겼다. 칸국제영화제에 가자, 이런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서울역>이 칸에 갈 줄 알았더니 <부산행>이 가더라. (웃음)
-달리는, 좁은 KTX는 <부산행> 액션의 볼거리이자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지점이기도 했다. 어떻게 설계했나.
=좁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 액션을 만들지가 촬영감독과 무술팀 전체의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KTX에 올라갈까 생각도 해보고 별별 생각을 다 했다. 100% 해결 안 되고 들어간 것도 있었다. 그래서 찍으면서 많이 고쳤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구상했다. 닫힐까 말까 한 문 하나로도 액션의 컨셉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 액션보다는 상황에 대한 컨셉을 더 중요하게 가져갔다. 특히 역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령 대전역의 ‘회전초밥 신’ (좀비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 장면이나, 천안 아산역의 ‘사파리 신’ (자동차 타고 가면서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사파리같이 좀비들을 구성) 같은 장면이 그렇다. ‘좀비 아쿠아리움’ (전복된 기차에서 보이는 좀비들) 같은 것도 구성했다. 세팅 자체를 특이하게 만들어주면 단조로운 액션의 변곡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액션에 능통한 히어로나 액션 전문가가 등장하지 않고, 도주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펼치는 액션이 주가 된다. 힘이 세고 긍정적인 상화를 통해 지금 사회가 원하는 소시민의 영웅을 창조했다.
=관객이 그러더라. 좀비들이 마동석 피해간 거 아니냐고. (웃음) 박주석 작가가 제일 잘하는 형태가 마동석 같은 캐릭터를 구현하는 일이다. 거기에 마동석 선배가 들어오면서 장르가 마동석이 돼버렸다. 마동석 선배가 그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줬다. 이미 촬영 때 배우가 가진 캐릭터가 폭발 직전이었는데, 그 이유가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015)의 ‘아트박스 사장’으로 막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아트박스 사장은 잠깐 등장한 인물일 뿐이고, 그동안 마동석 선배가 가진 이미지를 100% 보여준 건 없었다. <부산행>이 그 총합을 보여주는 정점이라고 본다.
-단순하고 긍정적인 상화 캐릭터는 ‘연상호 월드’에서는 가장 보기 힘들었던 이질적인 캐릭터의 등장이다.
=상화 캐릭터는 찍으면서 부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장면에서는 음악도 더 부각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같은 영화를 보면 주제가가 나오면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나. <부산행>에서는 마동석 선배가 그런 역할이다. 대중이 기대하는 것을 카타르시스로 승화하는 역할. 캐릭터의 의외성을 보여주는 것만큼 그렇게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것도 재밌는 요소다 싶더라. 그 역할의 활용을 통해 연출가로서 배운 것도 많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200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모순을 담고 있다면, <부산행>은 좀비가 출몰한 아비규환의 혼돈을 통해 지금의 한국 사회의 사건들을 반영한다. 특히 세월호에 대한 연상작용을 거둘 수가 없다.
=만들어놓고 보니 그런 게 있더라. 하지만 만약 세월호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면 더 직접적으로 묘사했을 것 같다. 지금 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바를 뉘앙스로나마 전하려 했다. <돼지의 왕>에서 교실이 그 우화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였다면, 이번엔 KTX가 그 역할을 한다. 지금은 혐오의 시대다. 앞으로 우리가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용석이 있는 칸 사람들의 태도가 대변해준다. 가족을 잃은 사람을 보고도 그들을 보호하거나 손을 맞잡아주는 대신 자기 살겠다고 매몰차게 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태도가 지금 현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같이 사는 세상에서, 무언가 짜증나는 걸 못 견디는 모습들이다. 짧게 들어가긴 했는데, 그 장면에 그 의도가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충격의 반전이나 극악한 결론이 없다는 맺음에 대해, 상업영화 안에서의 타협이라는 시선도 있다. 결말을 어떻게 구상했나.
=엔딩에 대한 유추를 많이들 하더라. 하지만 유추가 안 된다. 어느 순간에 그렇게 힘겹게 달려온 목적지인 부산이 안전하냐, 아니냐의 이슈가 아닌 다른 이슈의 엔딩으로 간다. 인간과의 관계의 문제고 원래 기획의도에 그게 있었다. 아주 기분이 더럽지 않은 선에서 엔딩을 가자, 이렇게 큰 사이즈의 영화를 만들면서 엔딩을 비관적으로 가기는 힘들더라. 상황 설정이나 인간 군상은 <미스트>에 가깝고 엔딩은 존 힐코트의 <더 로드>(2009)와 같이 대안가족을 구성하는 내용을 찾았다. 반전에 관해 말하자면, 이 영화는 반전이 없다는 게 반전이다. 엔딩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마지막에 굴곡을 크게 주지는 말자, 반전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2000)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 영화의 반전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식스센스>(1999)를 만든 감독이다보니 이 사람이 하는 게 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해석되는 게 아닐까 싶더라. (웃음)
-마지막 장면의 언급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그 표정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산행>을 연출하면서 중요하게 가져간 게,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였다. 이게 나에게는 중요했다. 인물들이 엉엉 울면서 끝나길 바라지 않았다. 좀더 힘이 있기 바랐다. 배우들한테도 그 이야기를 했다. 슬픔으로 관객을 대하지 않도록. 이후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의지를, 짧은 시간이지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일종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창하게 위로라고 이야기하기까지는 뭣하지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 단단하게, 힘 있게 잘 살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