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부산행>의 어떤 계보
2016-07-20
글 : 정지혜 (객원기자)

<부산행>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질문 하나. 어째서 감독 연상호는 <부산행>을 자신의 첫 번째 실사영화의 자리에 올렸을까. 애니메이션을 연출해온 연상호 감독은 그간 실사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을 꾸준히 밝혀왔다. 무엇보다 연상호표 애니메이션을 본 관객이라면 몸서리치게 섬뜩한 그의 애니메이션 속 사실적인 드라마에 놀라며 이런 이야기가 실사의 세계에서 펼쳐진다면 어떨까를 상상해봤을 것이다. <사이비>(2013)나 <서울역>(2015, 8월 개봉예정)의 리메이크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연상호의 선택은 <부산행>이었다. 올해 초 <씨네21>(1037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그는 “재난 상황에서 빚어질 드라마, 유머, 액션이 모두 담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달려가는 목적성이 분명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부산행>은 연상호의 바람들이 응축된 결과물임이 틀림없다. KTX 기차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동요한다. 그들의 공포심이 확산되는 과정을 쾌속으로 진행시킨다. 확실히 속도는 빠르고, 빠른 만큼 서사와 캐릭터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과감히 걷어냈다. 그래서인지 주요 캐릭터들이 보이는 행동은 전형적이다. 기능적인 역할 수행을 해나가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는 데 일조한다. 대신 기차 내의 상황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자리잡는 데 공을 들였다. 연상호의 이야기는 전작들에서 보인 강한 캐릭터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서사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속도를 내며 전진한다. 물론, 이 선택은 양날의 검이다. “영화라는 측면에서 실사든 애니메이션이든 큰 차이가 없다”는 감독의 평소 지론을 떠올려보면 <부산행>을 보고 들었던 첫 질문을 다시 해보게 된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사이비>에 대한 글(<씨네21> 933호 ‘신전영객잔’ )에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실사가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은 인물의 얼굴 위로 세밀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드러낸다는 데 있으며 그것이 부르는 마법과 같은 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부산행>은 전형적인 캐릭터들과 배우들의 전형적인 쓰임으로 일관됐다. 그 전형성 때문에 인물들의 정념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건 득에 따른 실이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시험대

<부산행>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서울발 부산행 KTX가 출발하기 직전, 정체불명의 소녀 (심은경)가 기차 안으로 뛰어든다. 이내 열차의 문이 닫히고 기차가 출발한다. 그 후, 우리는 이 소녀가 시발점이 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기차에 퍼져나가는 파국을 목도한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이 아수라 속에서 열차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작용과 반작용, 액션과 리액션을 해나가는지를 지켜본다. 어쩌면 진정한 파국은 그들의 행위, 그 선택들 속에 있다는 듯이.

열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승무원을 물어뜯고 승무원은 곧 사람의 혈색과 눈빛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로 변이된다. 기괴한 몸의 꺾임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반응 등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좀비임을 눈치챈다(실제로 영화에서 ‘좀비’라는 말은 인물들의 육성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감염자’이거나 ‘괴물’이라 불린다). 삽시간에 승객들은 서로를 물어뜯으며 변이해간다. “객실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는 기내 무전 교신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열차의 TV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무차별 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뉴스 자막이 뜬다. 사태의 정확한 원인이나 진행 방향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열차 안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다. 펀드 매니저인 석우(공유)와 그의 딸 수안(김수안), 상화(마동석)와 임신 중인 성경(정유미) 부부, 야구부 소년 영국(최우식)과 야구부 매니저 진희(안소희)를 비롯한 불특정 다수의 군중은 괴상하게 변한 일군의 떼들을 피해 다음 칸으로 다음 칸으로 달려간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다른 칸이거나 비좁은 화장실이거나 열차와 열차 사이의 연결부가 고작이다. 열차는 완벽하게 외부 세계와 차단된 폐쇄의 공간이자 당장 내릴 수도 없는 이동하는 밀실이다. 그럼으로 승차한 모든 사람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점에서만큼은 탑승객 전원이 평등한 조건에 처해 있다. 이러한 공간적 상황은 자연스레 감독의 전작들의 중심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계급과 서열과 위계가 층층을 이루던 <돼지의 왕> 속 학교, 절망 사이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으려는 <사이비>의 수몰 직전인 마을 공동체의 또 다른 버전처럼도 보인다. <부산행>의 공간이 전작들과 다르게 보인다면 기차 안 인물들이야말로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얽히고설킬 이해관계랄 게 전혀 없는 사람들. 오직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그들은 각자 도생의 논리를 펼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부산행>의 시험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정이 불안정의 양태로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이 변화의 원인을 누군가에게로 돌리고 싶다. 배척과 낙인이 시도되고 이것을 도약대 삼아 공포와 혐오와 악(惡)이 잉태된다. 대표적으로 이런 감정의 전이를 보이는 이가 천리마 고속 상무인 용석(김의성)이다. 그는 “괴물들”을 피해 자신쪽으로 달려오는 승객들을 뻔히 보면서도 객차의 문을 닫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는 기차가 몇번의 정차를 할 때마다 “기관차만 갑시다, 이거 떼어버리고”, “출발 안 해? 여기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냐”라며 부산으로 전력 질주할 것을 요구한다. “용석이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씨네21> 1063호 ‘커버 스타’ 중 연상호 감독 인터뷰)이라는 감독의 말대로 용석은 이기적이지만 자기목숨 부지에 무진장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꽤 설득력 있는 인물이다(그의 판단의 결과가 합리적(reasonable)이었냐는 또 다른 문제다). 펀드 매니저로 ‘개미핥기’라 불리는 데 이골이 난 석우 역시 용석과 비슷하게 자기 안위를 중심에 두고 살아온 인물이다. 위험한 열차에서 딸 수안이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자 석우는 “지금 같은 땐 자기 자신이 우선”이라 말한다. 그런 석우를 변화시키는 건 어쩌면 이 극악한 상황에서 가장 선한 발언과 행동을 일관하는, 잇속의 세상에서 아직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아이 수안이다. “아빠는 자기밖에 몰라, 그러니까 엄마도 떠난 거잖아요”라는 수안의 말이 아빠를 흔들어 깨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인물들의 감정에 관객이 집중할 틈을 주기보다는 계속 달리는 쪽을 택한다. 그사이 석우는 용석에게 “왜 그랬어. 왜 미친 새끼야. 다 들어올 수 있었잖아”라고 소리지르며 그의 이기심을 질타한다. 서로 협력할 경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을 낳지만,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면 결국 서로에게 불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문제가 이들 앞에 놓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악이라 생각할 때 더한 최악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던 연상호 영화의 인장은 바로 이다음 순간에 찍힌다. 관객이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인물이 결정적인 칼자루를 쥐고 사태를 단숨에 키워버리는 장면이 있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 이 순간은 사실 연상호의 야심일지도 모른다. 극 초반 뉴스 화면 속 시위대를 보며 “나라 어지럽게 뻑하면 데모질이나 하고”라고 말하던 이가 궤멸의 순간을 연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연상호식 문제의식, 어떤 화해와 안정이 가능할까

<부산행>은 열차 안에서만 진행되지 않는다. 열차는 중간 역들을 통과하며 열차 밖의 괴생물체들과 맞닥뜨리고 그들과 실제로 맞서고 그들로부터 도망치며 속도를 유지해나간다. 자칫 지루할 수 있었던 한정된 공간에서의 서사 전개를 공간의 확장으로 꾀한 점은 유용한 선택으로 보인다. 역사와 철로를 오가며 대규모 좀비 액션물을 시도했는데 그 완성도도 나무랄 데 없다. <부산행>의 열차 안 TV로는 국가의 위선과 무능력함을 읽을 수 있는 보도들이 흘러간다. 작금의 한국적 상황을 오버랩시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부산행>의 주된 관심은 아니다. 그런 정부, 기차 외부의 상황이 직접적으로 괴생물체들을 낳았다고 볼 수도 없으며 그런 보도가 새로운 독해를 열어젖히는 실마리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 <부산행>을 ‘한국형’ 좀비물로 묶어둘 수는 없다. 오히려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이 천착해온 문제의식, 즉 인간의 악성은 어째서 발로하며 어떻게 진화하는가, 그 악성의 결과에 탈출구는 있는가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형태의 자문자답이다. 감독은 <부산행>을 두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까” (<씨네21> 1063호 ‘커버 스타’ 중 연상호 감독 인터뷰)를 고민하며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적어도 전작들처럼 ‘드럽게’ 끝내고 싶진 않았다.… 앞 세대와 화해를 할 것인가, 직접적인 화해 없이도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앞 세대를 인정하게 될 때가 있지 않겠나”라고도 말했다. 그것은 어떤 화해와 인정인 걸까. <부산행>의 최후의 이들(그들의 성별을 가만히 보면 흥미롭다)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까. 연상호가 보여줘온 ‘더러운’ 악의 지옥도들 뒤에 찾아온 ‘종합 엔터테이닝 무비’<부산행>. 전작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규모의 상업영화 시장에서 연상호의 세계관이 취한 하나의 형태이기도 하다. 연상호의 이 시험이 과연 어떤 강도로 균열을 낼것인가는 이제부터 지켜볼 일이다.

<서울역>

<부산행>의 어떤 계보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프리퀄 형식으로 개봉할 <서울역>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부산행>과는 느슨한 연결 고리의 영화다. 요소 요소로 이어지는 것도 거의 없고, 두편이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렇게만 말해두겠다. <부산행> 열차 내 TV에서 나오는 뉴스 화면이 <서울역>의 세계다. 재난이 일어났고 그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폭도라고 치환돼가는 과정, 그것에 대한 영화다.” 한편, <서울역>은 감독의 애니메이션 <지옥: 두개의 삶>(2003)을 만들 당시 구상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개의 파트로 구성된 <지옥: 두개의 삶>은 지옥이 두려워 저승사자를 피해다니는 걸 택한 남자와 천국행이 예고됐지만 죽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 도망가길 택한 여자의 이야기다. 무엇을 택하든 결론은 지옥행이다. 세편만으로도 연상호 세계의 어떤 계보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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