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심영섭의 <생활의 발견>론 : `오인된 홍상수`를 벗어던지다
2002-03-29
글 : 심영섭 (평론가)
<생활의 발견>, 두 가지 시선

홍상수만큼 작품마다 자기만의 선명한 미학적 서명을 새기는 감독은 정말 드물다. 그건 그의 작품 중에서 엉뚱한 유머가 가장 풍부한 <생활의 발견>에서도 변함없다. 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와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조금씩 움직인다. <생활의 발견>에서 그 움직임은 더 분명해졌다. 그의 움직임은 패턴화할 수 있는 변모의 길 중 하나가 아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생활의 발견>을 보고, 홍상수의 길을 되짚어본 두 평자의 글을 싣는다. 논쟁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두 평자의 의견은 결국 상반된 방향으로 간다. 심영섭은 홍상수에게 작가주의적 강박의 혐의를 벗겨내고 그의 영화가 더욱 깊어졌다고 말한다. 반면 김소희는 그가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더 멀어짐으로써 더욱 사소화되었다고 본다.

<생활의 발견>에서 홍상수는 더 유머러스해졌지만, 동시에 훨씬 더 큰 쟁점을 낳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은 대한민국 영화에서 유행이 된 듯하다. 그건 홍상수가 유행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홍상수식’이 유행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동안 단편영화제 심사를 할 때나, 아니면 90년대 후반의 한 예술하는 영화들, 심지어 홍상수에게서 아주 멀리 달아나버린 것 같은 대한민국의 상업영화에서조차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원형성이 힐끔힐끔 보였으니까.

<생활의 발견>이 나온 이 즈음 나는 슬금슬금 내가 혹 홍상수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홍상수가 <생활의 발견>에서 이야기하려는 대로 우리는 누군가의 말과 글을 모방함으로써 홍상수의 영화를 매우 지리멸렬하게 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 홍상수에게 배운, 홍상수를 보아온, 홍상수를 무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느 결에 디테일과 일상을 혼동하며 고정된 카메라로 꾹꾹 삶을 눌러 박으며 한 예술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마당에 홍상수는 불쑥 <생활의 발견>을 내민다. 거기에는 이미 자신이 축조한 성에서 저만큼 몸을 빼내 도망가는 홍상수가 총총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다. 혹 당신도 보이지 않는가? 한 무더기의 일상과 표면과 욕망과 위선의 아우성을 남겨두고 마침내 꺼무룩한 웃음으로 사라지는 홍상수란 뱀꼬리가.

`강원도’에 가서도 일상의 수족관에 갖힌 인물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를 ‘일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은 결코 일상적인 방식으로 찍혀지지도 않았고 또한 ‘일상적인 기억’도 아니다. 오히려 굳이 정의하자만 일상적인 기억을 포위하는 메타 기억(기억에 관한 기억)에 가깝다. 만약 우리가 상권을 붙잡고 며칠 전 다녀왔던 설악산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을까. 십중팔구 비행기를 놓친 뒤 고생담이나 여자 꼬신 이야기 등을 앞세우고 만약 그가 더 꼼꼼한 사람이라면 후배와의 잡담이나 도토리묵 이야기 등이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결국엔 비행기를 놓친 사실마저 의식의 표면에서 사라져버리고 말겠지만.

즉 비행기를 놓친 사건을 도형이라고 하고 후배와의 잡담을 배경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도형을 기둥축으로 배경이란 상판을 이어나가 기억이란 다리를 짓는다. 물론 많은 영화 역시 도형으로써의 기억을 에피소드화하여 비슷한 공법의 다리를 짓는다. 그런데 홍상수의 초기 영화들은 이 배경으로써의 기억의 묘사에 오히려 공을 들인다. 화장실에 가서 구두에 묻은 토사물을 닦고 남의 집 화분의 과일을 훔쳐 먹은 일이 애인과의 불륜이나 지방으로 출장 가 낯선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일과 동일한 질감과 중요성을 가지고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 가운데 누군가는 설악산에서 자살을 하고,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여자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열을 터뜨린다. 장르영화에서 살인과 자살이란 안전한 판타지로 소비되겠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경에 포위되어 던져지는 살인과 에피소드는 섬뜩한 현실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렇게 되면 살인이나 자살이란 도형을 목격하지 않아도 그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관객을 진저리쳐지게 할 수 있다. 기억의 행간에 끼어 들어온 판타지란 있을 수 있는 일로써 삶의 위태로움을 환기시키니까(매어달린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의 권금성에 가서 상권의 후배는 ‘저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우리와는 다른 것 같아’, ‘왜 한발만 디디면 낭떠러진데 그걸 모를까?’라고 중얼거린다). 관계의 부질없음을 메우려는 섹스는 기화되는 몸짓으로 죽음의 뒤를 쫓아다니고,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이렇듯 삐걱거리는 현실을 비껴가며 존재의 추를 질질 끌고 살아갔다. 강원도에 가서도 여전히 일상이라는 수족관에 갇혀 있는 사람들 사이로, 홍상수는 그렇게 철학자였다.

그뒤 홍상수는 아주 정반대의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기억의 행간으로써의 영화를 실험하는 듯 보였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시나리오작가는 네명이나 되었었고 구효서의 원작을 바탕으로 출발했다는 면면에서 짐작되듯이, <돼지가…>는 그만큼 많은 노력으로 기억의 행간이 ‘축조된’ 영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오! 수정>부터 홍상수는 정반대로 시나리오를 허물어 영화의 경계 안으로 기억의 행간을 끼워넣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점점 더 구어체가 되어가고, 판타지도 없어지고, 은밀하게 숨겨졌던 유머는 기억과 불화하는 언어 사이에서 안전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점은 홍상수의 영화스타일의 변화만 봐도 증명이 된다. <돼지가…>의 주인공들은 흔히 탈중심화된 미장센으로 스크린 밖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효섭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도 술좌석의 사람들은 화면 밖에 처리되어 있어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관계는 단절되고 소외감은 배가되지만 이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다. <강원도의 힘>에서는 나아가 약간은 내려다보는 카메라나 벽면의 모서리가 화면의 중심에 놓여 인물들을 나누는 ‘모서리-중심 미장센’(이런 용어는 없지만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 혹은 주인공들이 지나간 자국으로써의 텅 빈 여백이 자주 사용된다.

바깥세계와의 경계짓기와 차단, 닫힘 등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이 ‘무규정적인’ 공간은 홍상수로 하여금 아주 냉소적인 위치에서 이야기와 대상간의 간극을, 표면으로 말하는 속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든다. 인위적인 거짓 명료성에 대항하는 방법으로는 그만인 스타일일지 모르지만 이 역시 감독의 자의식이 개입된 시선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상권이 후배에게 “피부는 원래 때가 살짝 덮여 있어야 좋은 거야”라며 인간들의 가면놀이에 너그러운 관용을 베푸는 것 같다가도 빙점으로 돌아가는 시선. 한때 관객은 홍상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죽어라죽어라 하면서도 왜 당신은 죽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했었다.

괴물스런 작가주의는 되지말자?그러나 <생활의 발견>에 이르면 홍상수는 많은 것들의 눈높이를 대폭 낮추어버린다. 그는 우리의 기억의 법칙처럼 행간으로써의 배경을 대폭 줄이고 도형으로써의 에피소드는 문자로 친절하게 요약까지 해준다(예를 들면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라든가 경수가 성우를 하루종일 기다린다 등등). 카메라의 눈높이 역시 점점 내려와 앉은 사람을 쳐다볼 때는 앉은 눈높이로 선 사람을 쳐다볼 때는 서 있고, <오! 수정>처럼 흑백의 화면으로 기억을 탐사해 꽈배기하거나 뫼비우스 띠처럼 다시 이어붙이는 법도 없다. 챕터별로 나누어진 재미있는 책을 읽듯 에피소드들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넷이면 넷 셋이면 셋, 사람들을 나누는 법 없이 팬하는 카메라는 무심하고 평이하고 평면적이다(여기서 홍상수적인 화면은 뒤통수부터 잡아내는 명숙의 도입부 숏이나 거울을 통해 반사의 이미지로 구성한 무용학원의 발레장면 정도일 것이다). 홍상수는 영화 속의 대사처럼 사람되는 거 힘들지만 괴물스런 작가주의는 되지 말자고 다짐한 것일까?

<생활의 발견> 속에서 경수와 성우와 명숙과 선영은 경주와 춘천은 서로를 모방하고 반복한다. 경수가 명숙에게 ‘나에게 사랑은 그냥 많이 좋아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듯, 그것은 질적 변화가 없는 양적 변화로써의 감정이고 인간이다. 경주에는 춘천과 똑같은 오리배가 떠 있고, 경수는 태평하게도 “한국사람들은 생긴 게 다 비슷하다”고 말한다. <강원도의 힘>을 찍었을 때처럼 명암 대조가 거의 없는 낮장면은 태양빛으로 사물을 다림질하여 하늘 아래의 모든 질감을 비슷하게 만들어버린다. 재미있는 건 적당히 내숭을 떠는 유부녀 선영이나 항상 핀트에 안 맞는 이야기로 떨떠름한 미소를 짓는 경수보다, 유치한 소유욕으로 심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명숙이 어쩌면 이 셋 중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인연이란 회전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경수의 연애담은 모방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인간을 가치 판단하는 것 자체, 그 자체를 아주 우습고도 소소한 제자리걸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청평사로 가는 길, 경수의 선배 성우가 경수에게 해준 아주 썰렁한 전설은 아마도 <생활의 발견>의 핵심적인 은유인지 모르겠다.

‘당태종 때 어떤 총각이 공주를 사모하다 죽었는데, 왕의 노여움을 타서 뱀으로 변했대. 그 뱀은 공주를 칭칭 감았는데, 노승의 조언으로 조선의 청평사 앞에 온 공주는 밥을 얻는다는 핑계로 뱀을 따돌리고, 절 안으로 들어가려던 뱀은 천둥과 소나기를 맞는댄다.’ 대학교수의 부인이자 사대문 안쪽의 공주 선영을 꼬시려던 경수는 하룻밤의 정사 뒤, 지갑을 핑계로 집으로 들어간 선영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그 순간 비를 맞는 경수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낡은 한옥의 문은 경수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청평사의 회전문은 아니었을까?

<생활의 발견>, 허허실실 윤리학 이부작 2탄

그러한 면에서 개인적으로 <생활의 발견>을 <오! 수정>에 이어 사랑과 섹스, 냉소와 유머를 혼동케하는 홍상수의 ‘허허실실 윤리학 이부작’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홍상수는 자의식에 가득 찬 존재론 대신 편안한 시선으로 웃음이라는 멍석을 깔아놓고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 거기서 거기인 섞여지는 인간’으로서의 윤리학을 입담좋게 늘어놓는다. 그것은 웃음으로 부유하는 연애담 속으로 기어든 또 다른 경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결국은 점점 자의식이란 옷과 작가주의의 강박관념을 떨쳐내버리는 무위의 홍상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다 혹 하염없이 차를 마시는 동작을 반복하며 신비의 슬픔을 쌓아가는 오즈 야스히로의 인물들과 하염없이 술을 마시며 삶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홍상수의 인물은 결국 한점으로 수렴돼버리는 건 아닐까도 싶다.

그러나 붉은 조명 아래 술에 취해 옷 벗기 내기를 하던 경수와 성우 그리고 두명의 작부 중 끝끝내 바지벗기를 거부한 쪽은 경수였다. 마지막 하나까지는 안 벗는 보아뱀. 이제 이 팬티만 걸쳐 입은 원효대사께서는 다시 청평사의 회전문 앞에 서 있다. 거기서 거기인 결론이요 해탈은 또한 해탈이겠지만 마지막 팬티를 벗는 날 훌쩍 승천해버릴 것만 같은 그이기에, 홍상수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추신. 그런데 홍상수 감독이 사람에게 사람의 이상의 것 요구하지 말라고 하더라.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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