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본 시리즈를 돌아보다
2016-08-01
글 : 조재휘 (영화평론가)
<제이슨 본>

제이슨 본이 돌아왔다. 더이상 시리즈를 지속할 뜻이 없음에도 스튜디오가 속편 제작을 강행하자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을 포함해 주요 스탭이 이탈한 <본 레거시>는 엄청난 혹평과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에 직면해야 했다. 3부작의 골격을 잡았던 각본가 토니 길로이가 직접 메가폰을 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가 <제이슨 본>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많은 팬이 환호한 것은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이 선사했던 경이로움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 조재휘가 지난 시리즈를 되돌아보며 지금의 <제이슨 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맷 데이먼의 화려했던 과거를 5개의 장면으로 추억한다.

<제이슨 본>

<제이슨 본>(2016)은 종적을 감춘 제이슨 본의 후일담으로 막을 연다. <본 얼티메이텀>(2007)에서 블랙브라이어 작전의 실체를 폭로한 지 12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그리스와 알바니아 국경지대에서 격투기 선수로 생계를 이으며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암살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난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해”라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던 중 동료로 행동을 같이했던 니키 파슨스(줄리아 스타일스)가 CIA의 전산망을 해킹해 관련 정보를 유출하면서 본이 미처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려주려 하나 발각되어 그들에게 쫓기게 된다. CIA의 사이버 수사팀장 헤더 리(알리시아 비칸데르)와 국장 듀이(토미 리 존스)가 니키를 뒤쫓고, 본은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본 얼티메이텀> 이후 9년, 외전 격인 <본 레거시>(2012)가 등장한 지 4년이 지나 돌아온 이 작품에서 본은 다시 한번 CIA의 음모에 맞선다. 암살요원을 육성하는 트레드스톤과 블랙브라이어 프로그램은 폐기되었지만 CIA는 아이언핸드라는 또 다른 작전을 실행하며 다시금 전세계를 자신들의 감시망 아래 놓으려 한다. IT기업 딥드림의 대표 칼루어(리즈 아메드)가 개발한 새로운 플랫폼을 뒤에서 조종해 전세계를 감시, 감청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 <마션>(2015)에 관한 인터뷰를 하던 중 맷 데이먼은 이전의 작품들이 부시 전 행정부의 대외정책과 연관되어 있었고, 폴 그린그래스와 같이 차기작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상해왔지만, 프리즘 폭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새로운 영화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실체가 드러난 트레드스톤 작전이 1950년대 MK 울트라 프로젝트(CIA가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여 사람을 맘대로 움직이는 실험)와 테러리즘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면, <제이슨 본>은 국가안보국(NSA)이 전세계의 인터넷을 감시, 감청하면서 과거와 다른 양상의 정보전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음을 시사한 프리즘 폭로 사건과 SNS가 보편화된 현실에서 제이슨 본이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는다.

각본가 토니 길로이와 촬영감독 올리버 리드, 세컨드 유닛과 스턴트를 담당했던 댄 브래들리 등 전작의 영광을 일구었던 스탭들은 미처 합류하진 못했지만, 핸드헬드와 셰이키캠을 전격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와이드 숏으로 동선을 연결하는 촬영과 편집의 기교, 칼리 아르니스와 절권도를 접목한 격투 안무는 <제이슨 본>이 여전히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제이슨 본>은 이전 시리즈의 이야기 흐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연기하는 사이버 수사팀장 헤더 리의 존재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상, 포스트 스노든의 시대에서 제이슨 본 시리즈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물론 ‘인터넷을 통한 세계 감시’라는 소재는 <007 스펙터>(2015)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테네 반정부 시위 시퀀스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인 현실감은 <제이슨 본>이 장르영화의 한계를 넘어 다시 한번 관객이 살아가는 당대를 이야기하고자 시리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음을 입증한다.

<제이슨 본>

<본 아이덴티티> 부터 <본 얼티메이텀> 까지

제이슨 본은 1980년 로버트 러들럼(1927~2001)의 소설 <본 아이덴티티>로 처음 세상에 등장했다. 42살 무렵부터 전업작가의 길에 뛰어든 러들럼은 주로 스릴러에 천착한 장르소설을 출간했는데 25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 상당수는 음모론과 결합한 스릴러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따른다. 혼자이거나 소수인 영웅이 정부의 정보기관이나 비밀결사, 군산복합체 등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세력에 대항한다는 것. <본 아이덴티티>(2002) 또한 이러한 러들럼의 성향이 짙게 밴 작품이다. 이 소설은 <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최고의 스파이 소설로 선정되어 대중적 인기를 끌며 영화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1983년에 이미 유니버설에서 판권을 구입해 버트 레이놀즈 주연의 영화를 추진했지만 무산되었으며 1988년에는 동명의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나온 바 있다(이 드라마는 국내에선 <잃어버린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TV에 방영되고 <저격자>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출시 되었다).

<제이슨 본>

<본 아이덴티티>의 영화적 가능성을 다시 눈여겨본 이는 더그 라이먼 감독이었다. <스윙어즈>(1996)를 끝낸 직후 러들럼을 만난 라이먼은 영화화를 위한 각색 허락을 받아냈으며, <데블스 에드버킷>(1997)의 각본가 토니 길로이를 기용해 각본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라이먼은 길로이로 하여금 소설을 읽지 않고 자신이 쓴 메모를 기반으로 각본을 쓰라고 요구했다. 기억을 잃은 남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기본적인 컨셉은 유지되었지만 중년의 본은 젊은 청년으로 바뀌었으며, 그의 적수 또한 악명 높은 킬러 카를로스에서 CIA로 바꾸고 트레드스톤 작전의 성격도 변화를 주는 등 대담한 생략과 각색이 따랐다. 브래드 피트와 매튜 매커너헤이 등도 캐스팅 대상에 포함되었던 주인공 제이슨 본은 맷 데이먼이 꿰찼고, 그리하여 완성된 영화판 <본 아이덴티티>는 6800만달러 제작비를 들여 2억1천달러 수익을 거둬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다(원작자 로버트 러들럼은 영화가 제작 중이던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 아이덴티티>로 포문을 연 이 시리즈는 기존 첩보영화에 대한 안티 테제의 성격이 짙다.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비교하면 본 시리즈의 지향점은 명료해진다. 제임스 본드와 이단 헌트처럼 정보기관에 소속되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작전에 임하는 소속된 스파이를 정의의 사도로 내세운 것이 기성 스파이영화의 관성이라면, 본 시리즈는 조직에서 이탈해 국가 정보기관의 비리와 범죄에 맞서는 안티 히어로를 내세우고 있다. 007과 <미션 임파서블>이 최신 과학기술이 투입된 장비와 대규모 스펙터클이 맞물려 첩보물의 바탕에 혼합된 세미 SF와 블록버스터의 성격을 띤다면, 본은 테러리즘 이후의 국제 정세, 철저히 현실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집요한 첩보전의 전개 과정을 펼쳐 보인다. 더그 라이먼이 떠난 뒤 제작자 프랭크 마셜이 시리즈를 이어서 연출할 감독으로 폴 그린그래스를 지명한 건 바로 이처럼 현실성이 중요한 시리즈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제이슨 본>

폴 그린그래스는 특히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2002)에서는 분명 연출된 영화임에도 실제 현장에 뛰어든 듯 압도적인 현장감을 선보였고, 이를 눈여겨본 프랭크 마셜이 그를 발탁해 만든 <본 슈프리머시>는 시리즈의 면모를 일신하며 첩보 액션물의 패러다임을 뒤엎은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린그래스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핸드헬드와 셰이키캠의 전격적인 활용은 영화의 현장감과 사실성을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액션의 박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스턴트 코디네이터이자 세컨드 유닛 지휘를 맡은 댄 브래들리, 절권도와 에스크리마의 달인으로 격투 장면의 안무를 담당한 제프 이마다의 액션 설계는 칼리 아르니스와 크라브마가, 절권도 등을 혼합한 초근접전에서의 실전 무술을 도입함으로써 <매트릭스>(1999) 이래 답보 상태에 있던 액션 연출의 트렌드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여기에 원작과 완전히 다른 오리지널 스토리지만 로버트 러들럼의 작가적 성향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21세기에 맞게 접목한 토니 길로이의 각본(단 <본 슈프리머시>의 각본은 길로이의 각본 초고를 <로빈 후드>(2010)의 각본가 브라이언 헬겔런드가 완전히 뜯어고쳤다. 계약상의 문제로 헬겔런드는 크레딧에 각본가로 표기되지 않는다)과 올리버 우드의 촬영이 맞물리면서 세팅은 완성되었다. <본 슈프리머시>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본 얼티메이텀>까지 함께하면서 이 시리즈를 마무리했고, 지금 본 시리즈 특유의 개성으로 인정받는 특징들을 완전히 확립했다. 더그 라이먼이 <본 아이덴티티>로 시작했음에도 이 시리즈가 폴 그린그래스의 것으로 인정받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제이슨 본>

오리지널이 돌아왔으나...

더이상 시리즈를 지속할 뜻이 없음에도 스튜디오가 속편 제작을 강행하자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을 포함해 주요 스탭이 이탈한 <본 레거시>는 엄청난 혹평과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에 직면해야 했다. 3부작의 골격을 잡았던 각본가 토니 길로이가 직접 메가폰을 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세계 관객을 매혹시킨 시리즈 본유의 매력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본 얼티메이텀>이 제작비의 4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 반면, <본 레거시>는 겨우 제작비를 회수하는 수준에 그친 것도 <본 레거시>가 안겨준 실망감을 방증한다.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가 <제이슨 본>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많은 팬이 환호한 것은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이 선사했던 경이로움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이슨 본>

<제이슨 본>은 스노든의 프리즘 폭로 사건과 SNS, 그리스 사태 이후 변하고 있는 유럽 세계와 신자유주의의 현실을 붙잡고 장르영화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 공통의 진보적 시선을 투영하는 작품인 건 분명하다(2015년 8월 인터뷰에서 맷 데이먼은 그리스가 민주주의, 라스베이거스는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린그래스 특유의 현장감을 중시하는 연출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는 제이슨 본의 캐릭터 또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제이슨 본>이 이전의 장점을 답습하려 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다. <본 얼티메이텀>에서 모든 기억을 되찾았던 본이 여전히 기억에 집착하는 묘사는 동어반복적이며, 뱅상 카셀이 맡은 암살자와의 대결,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카체이싱 같은 액션 시퀀스들은 당대 액션영화의 한계를 돌파했던 전작들과 같은 놀라움을 안겨주진 못한다. 트레드스톤과 블랙브라이어 작전이 제이슨 본 개인의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서사의 몰입감을 높이는 장치였다면, 아이언핸드 작전은 단순한 타도 대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도 <제이슨 본>의 서사가 노출하는 안이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오리지널의 복귀는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세계가 변화한 만큼, 제이슨 본 시리즈 또한 지금의 세계에 걸맞은 새로운 서사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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