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대 선수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는 철종과 영훈(왼쪽부터). 두 배우는 “최국희 감독이 애드리브를 많이 주문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최국희 감독은 “애드리브를 많이 주문했다기보다는 컷 사인을 늦게 하는 편”이라며 “계속 카메라를 돌릴 수 있다는 게 디지털의 장점이지 않나? 컷 사인을 안 하니 배우들이 뭔가를 하나씩 더 하게 되는데, 그게 재미있었고, 그걸 즐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2. 내기 볼링의 판을 설계하는 백 사장 역의 권해효(오른쪽 두 번째). 차가워 보이는 극중 역할과 달리 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최국희 감독의 큰 체구를 두고 “완전 UFC 출전 선수의 몸 같다”고 농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 “시나리오가 매력이 있었다. 전형적인 스포츠영화와 다른 재미가 있었다”며 “백 사장은 볼링장 신에서만 등장한다”는 게 그의 설명.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 홍상수 감독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과 제목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또 다른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3. 이정현은 철종과 영훈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희진을 연기한다. 최국희 감독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정현 배우의 베스트 영화는 <범죄소년>(2012)”이라며 “어린 나이에 버린 아들을 만나 서투르게 아들을 대하는 불량엄마의 연기가 너무 인상적이었고, 그 불량엄마에게서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모성애가 철종과 영훈을 감싸안는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말했다.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주가가 많이 오른 배우가 신인감독의 영화에 크지 않은 역할을 하고 싶다며 연락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4. 철종의 선수 시절 라이벌인 두꺼비 역을 맡은 정성화(가운데). 두꺼비는 아직 자세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철종, 영훈, 희진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다.
지난 6월2일 자정, 영업이 막 끝나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수원 시내의 한 볼링장이 영화 촬영 준비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배우 권해효가 “레인 숫자만 총 34개에 이른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볼링장”이라고 귀띔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마어마한 규모가 눈에 확 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현장 가이드를 자처(?)한 권해효는 출연진, 제작진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볼링영화 <스플릿> 42회차 촬영현장의 관전 포인트를 알려주기까지 한다. “볼링 중계방송의 전형적인 장면이 있지 않나. 선수가 레인에 오르기 전에 수건으로 볼을 닦고, 볼을 든 뒤 레인에 서서 핀들을 바라보고, 스텝을 밟아 볼을 미끄러지듯 굴리는 장면들 말이다.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새로운 그림들로 가득해 볼링영화의 레퍼런스가 될 만하다. 또 최국희 감독이 신인답지 않게 굉장히 노련하게 현장을 진행하니 유심히 지켜봐 달라.” 그는 영화에서 “도박 볼링의 판을 설계하는 백 사장”을 맡았다고 하니 캐릭터에 어울리는 현장 가이드답다. 화려하게 준비된 무대(볼링장)를 보니 대단한 대결이 펼쳐지려나보다. 현장 한구석에선 미술팀이 가짜 돈을 준비하고 있었다. 5만원권 지폐로 1억원이란다. “판돈이 1억원짜리 시합인가 보다”라는 기자의 질문이 귀찮다는 듯 미술팀은 “아뇨, 1억원에서 시작해 판돈을 점점 키워나가는 시합”이라고 콧방귀를 뀐다. 판돈 규모를 보니 이야기에서 꽤 중요한 대목임을 추측할 수 있겠다. 레인 뒤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슈트와 드레스 차림의 남녀 10명이 자리를 잡고 점잖게 앉아 있다. “영화에선 가장 규모가 큰 볼링장 신”이라는 남성호 PD의 말이 실감난다. 마침 유지태, 이다윗이 연기하는 철종과 영훈 두 선수가 현장에 도착해 레인 앞에서 몸을 슬슬 푼다. 이정현이 맡은 희진은 두 남자 뒤에서 이들을 격려한다.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두 선수의 손을 떠난 볼링볼 모두 스트라이크, 핀이 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무척 경쾌하다. 한때 잘나갔지만 어떤 일을 겪은 뒤 밑바닥으로 추락한 철종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자폐 성향의 영훈이 이 위험한 게임에 도전장을 내민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둘의 표정이 무척 결연해 보인다.
철종과 영훈,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두 볼링 천재가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마지막 한판을 그린 <스플릿>은 지난 6월13일 크랭크업해 현재 후반작업 중으로 하반기 개봉예정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를 졸업한 신인 최국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두 천재가 성장하는 따뜻한 이야기” - 최국희 감독 인터뷰
-평소에 볼링을 즐겨 하나. 애버리지가 몇점인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볼링 공부를 많이 해 이론적으로는 빠삭하다. 반면 실전엔 그리 강하지 않다. 며칠 전 볼링장에 갔는데 150점 정도 나오더라. 잘 친다고 하기에도, 못 친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점수다.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초등학생 아들과 집 앞 시립체육관 볼링장에 피서를 가곤 했다. 어느 날 아이가 볼링을 치다가 내 뒤로 자꾸 숨기에 옆 레인을 봤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한 아저씨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볼링을 치고 있더라. 그는 볼을 레인에 굴린 뒤 아무도 없는 의자에 하이파이브를 하더라. 그 모습을 본 아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흥미로운 건 말도 안 되는 폼으로 수준급의 점수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써내려간 시나리오 초고는 <허슬러>(감독 로버트 로즌, 1961)의 주인공 폴 뉴먼 같은 루저가 자폐 성향의 볼링 천재를 이용해 도박 볼링을 하다가 개과천선하는 누아르였다. 여러 차례의 각색을 거치면서 어두웠던 이야기는 두 천재가 성장하는 이야기가 되면서 지금의 따뜻한 시나리오로 바뀌었다.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참고한 볼링영화가 있나.
=볼링을 소재로 한 영화는 <킹핀>(감독 피터 패럴리·바비 패럴리, 1996), 프랑스영화 <볼링>(감독 마리 카스틸 멘션 샤르, 2012)밖에 없었다. 코미디영화 <킹핀>에서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지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히려 당구를 소재로 한 누아르영화 <허슬러>와 그 영화의 속편 격인 <컬러 오브 머니>(감독 마틴 스코시즈, 1986)를 훨씬 많이 돌려봤다.
-볼링 중계방송과 다르게 보여주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이야기 내내 볼링 장면이 등장하는 까닭에 볼링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볼링을 지루하지 않고 새롭게 보여줄 수 있을까. 볼링공과 핀들의 충돌을 카 액션 신으로 비유해 생각하기도 했다. 촬영팀과 고심한 끝에 돌리나 슈팅카를 활용해 볼링공을 따라가며 찍을 수 있는 그립 장비도 만들었다. 또 콘티 작업하기 전에 시각특수효과(VFX)팀과 CG로 구현할 수 있는 그림도 미리 테스트해봤다.
-유지태의 어떤 면모가 철종 역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요즘 드라마 <굿와이프>를 보면서 유지태씨가 얼마나 슈트 차림과 검사 역할에 잘 어울리는 배우인지 감탄하고 있다. 실제로 곧고 올바른 사람이다. 반대로 철종은 술독에 빠져 살면서 삐딱한 루저다. 유지태씨처럼 바르고 순수해보이는 사람이 루저가 되었을 때 더 재미있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훈 역을 연기한 이다윗에게는 어떤 주문을 했나.
=연기 얘기보다 술 마시고 노래방 가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친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짧은 시간에 금세 친해졌다. 하도 놀기만 해서 다윗씨가 물어보더라. 영훈은 어떻게 연기해야 될지 몰라 막막하다고 말이다. 그때 다윗씨에게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경증의 자폐아 영상들을 많이 보여줬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부터 조언을 구했던 배우 심리 슈퍼바이저 김환규 정신과 의사와의 미팅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한 덕분에 쉽지 않은 캐릭터를 잘해냈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굉장히 여유가 넘쳐 보이더라. 장편영화 데뷔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
=총 47회차, 2300컷을 찍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계산해보니 회차당 평균 50컷을 소화해야 되더라. 가뜩이나 급한 성격인데 촬영 초반에는 혼자서 용을 쓰며 서둘렀다. 장편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유지태씨가 조언을 많이 해줬고, 그게 큰 도움이 됐다. 혼자서 용을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지금 한창 편집하고 있는데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내 영화 중 애드리브가 가장 많다” - 철종 역의 유지태
-파마와 수염이 눈에 띈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17년 전 송지나 작가가 썼던 SBS 드라마 <TV영화 러브스토리-유실물>에서 수염을 기른 적 있다. 철종이 마냥 어두운 역할은 아니다. 한때 잘나갔던 볼링 선수였다가 어떤 일을 겪으면서 밑바닥까지 추락해 지금은 허허실실하는 캐릭터다. 그런 사연을 부여하기 위해 파마며, 수염이며 외양에 변화를 줘야 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철종은 어떤 남자였다.
=원래 시나리오 속 모습은 지금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지금보다 훨씬 어둡고 세상에 삐딱한 남자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최국희 감독이 나사가 반쯤 풀린 느낌으로 가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고, 감독님이 흔쾌히 받아주셨다. 덕분에 괄약근이 풀린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웃음)
-평소 볼링은 즐겨 하나.
=볼링을 친 적 있지만 제대로 운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얼마나 연습했냐고?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받았다. 지금은 애버리지가 180점 정도 나온다.
-신인 최국희 감독과의 호흡은 어떤가.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많이 주문하신다. 약속한 길이보다 컷 사인을 늦게 해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감독님도 그걸 즐기시는 것 같고.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에서 가장 애드리브를 많이 한 영화가 될 것 같다. 나중에는 배우들이 카메라를 향해 컷 사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호흡이 잘 맞고, 서로 편하게 찍었다. (웃음)
“최대한 폼을 특이하게” - 영훈 역의 이다윗
-이야기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기에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연기하기 어려운 역할이었던 까닭에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대로 도망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계속 하니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다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영훈은 어떤 캐릭터로 다가왔나.
=물음표투성이었다. 시나리오에 이 친구가 무엇을 원하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대목이 없었다. 자장면, 밀키스 등 영훈이 좋아하는 몇 가지만 나열되어 있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캐릭터를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단순하게 출발했다. 이 친구는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스스로에게 왜, 라고 많이 물어본 것도 그래서다. 영훈이는 왜 이것을 좋아할까? 왜 저것을 싫어할까?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고민했다. 음식이나 작은 행동부터 차근차근 정리 해나갔고, 그렇게 하다보니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영훈의 어떤 행동들이 어느 정도 추측이 되더라.
-영훈의 볼링 폼이 특이하더라. 여러 폼을 두고 고민했다고 들었다.
=‘잘 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폼을 특이하게’가 영훈이 폼의 기준이었다. 다양한 폼으로 연습했는데 어떤 폼으로는 도저히 핀을 맞출 수가 없었다. 감독님과 상의한 끝에 지금의 자세가 나왔다. 실제로 이 자세로 스트라이커를 칠 수 있다. (웃음)
-이 영화는 볼링영화이면서도 철종과 영훈의 버디무비이다. 그 점에서 유지태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현장에서 (유)지태 선배는 한없이 자상한 선배였다. 항상 편하게 대해주었다. 서로가 감정을 주고받는 캐릭터가 아니어서 나름 고민이 많았다. 어느 날 연기하다가 앞에 서 있는 지태 선배를 봤는데 눈물이 났다. 함께 연기했던 시간들이 쌓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