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전이 또 한번 무너졌습니다.” <터널> 속 TV뉴스 앵커의 대사가 콕 박힌다.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는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무너져내린 터널 안에 홀로 갇히고 만다. 그가 가진 것은 78% 남은 배터리의 휴대폰과 생수 두병, 그리고 딸의 생일 케이크가 전부다. 대형 터널 붕괴 사고 소식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정부는 긴급하게 사고 대책반을 꾸린다. 사고 대책반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은 꽉 막혀버린 터널에 진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구조는 더디게만 진행된다. 자연스레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 등 한국 사회가 겪었던 재난 상황이 내리꽂히듯 연상된다. 터널이 무너졌고, 그 안에 사람이 갇힌 상황. 구조대 출동은 더디고, 언론은 특종에만 급급하고, 정치인들은 기념촬영하기에 바쁘다. <터널>은 스피디한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구성으로 주목받은 <끝까지 간다>(2013)의 김성훈 감독의 신작이다.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를 토대로 장르적인 재미를 놓지 않는 가운데, 감독은 무너져내린 현재 대한민국의 희망에 대해서도 얘기하려 한다.
-<터널>은 여름 블록버스터 대열 중 한편으로 분류된다. 흥행에 대한 부담 등 <끝까지 간다>의 성공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끝까지 간다> 때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칸국제영화제에 초청이 되고 그때부터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너무 많은 호응을 해주셨다. 이번에는 차근차근 하려다보니 생각도 더 많아지고 부담도 크다. 예산도 두배(<터널>의 순제작비는 77억원이다)나 들었고. 사실 촬영할 때는 영화 속에 중장비가 투입되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많아진 것뿐이지 별 차이를 못 느꼈다. 주요 스탭들도 <끝까지 간다> 때와 거의 같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후반작업 때부터 자꾸 기사화되고, 여름 경쟁작으로 거론되다보니 ‘나도 의무감을 가져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
-소재원 작가의 원작 <터널>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차기작 고민이 많았을 텐데 어떤 지점에서 이 작품에 착수했나.
=데뷔작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2006) 이후 두 작품을 쓰고 있었다. 한편이 <끝까지 간다>였다. 차기작으로 그 작품을 하려고 했는데, <터널> 제안을 받게 됐다. 다른 작품을 염두에 두었다가 이 작품을 하겠다고 결심한 건, 재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마냥 어둡지만은 않게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갇힌 생존자를 둘러싼 구조대원의 대처, 정부의 대응, 장관의 보여주기식 행동 등 <터널>의 상황은 세월호 사고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기자회견에서는 “그렇게 대범한 성격이 아니다”라며 그 은유라는 점을 떨쳐냈지만, 세월호 사고 이후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소재원 작가가 쓴 동명 원작 소설은 세월호 이전에 나왔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 건 그 이후였다. 염두에 두거나 의도했으면 오히려 이렇게 못 썼을 것 같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는 한국 사회 전체를 흔들었던 참사이고 아직까지 그 영향이 남아 있다. 뭘 만들든 그 자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터널>을 준비하면서 도움받은 게 이만희 감독의 <생명>(1969)이었다(1967년 구봉광산 낙반사고로 16일간 갱 속에 갇혀 있다 구출된 광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편집자). 만약 그 영화가 지금 나왔다면, 우리 영화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 같다. 또 세월호 사건 이전에 <터널>이 만들어졌다면,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사고와 연관짓지 않았을까. 특정 사건을 다루었다기보다 결국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슬픔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터널에 고립된 정수는 섬에 고립된 <캐스트 어웨이>(2000)의 척(톰 행크스)이나 화성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마션>(2015)의 마크(맷 데이먼)와 비슷하다. 그들처럼 절망 속에서 낙관을 보이는 캐릭터다.
=<캐스트 어웨이>나 이해준 감독이 연출한 <김씨 표류기>(2009)처럼 섬에 고립된 이야기들은 다 찾아봤다. <마션>은 영화 촬영 중에 나와서 확인을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 영화보다 더 낙관적이더라. 특별히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사느냐 죽느냐의 심각한 문제를 놓고 희화화할 수는 없지만, 원작보다 유머러스하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반부에 유머러스한 상황이나 대사들을 배치한 것도 그래서다. 유머가 고기의 마블링 같은 역할을 하길 바랐다. 단백질만 있으면 뻑뻑하고 맛이 없지 않나. 심각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유머가 있을 수 있다. 두 시간 넘게 극장에 있는 관객이 그 인물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그래서 정수나 정수를 연기하는 배우 모두 낙천적이었으면 했다. 이런 상황을 버틸 수 있는 낙천성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더 끔찍하고 보기 힘든 영화가 돼버렸을 거다.
-유머는 본격적인 코미디였던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때부터 꾸준히 보여주는 감독의 특징인 것 같다. <끝까지 간다>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상황을 비판하는 블랙코미디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사고 현장에 장관이 도착했다고 대경과 구조대 막내(조현철)만 놔두고, 그를 영접하러 구조대원들이 다 빠져버려 남은 이들끼리 분투하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씁쓸하다.
=블랙 유머를 많이 썼다. 내가 꼬여서 비꼬거나 그러려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게 재밌다. 살다보면 어떤 상황에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웃음들이 있다. 실제 우리 생활이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좀전에 사진 촬영 할 때도 사진기자님이 ‘거기 기대주세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다리가 짧아서 그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아 버둥거렸다. (웃음) 그런 걸 옆에서 지켜보면 좀 우스워지는 것 같다. 영화에도 이렇게 일상에서 항상 나오는 웃음들을 많이 배치했다.
-정수의 직업이 자동차 판매원인 건 원작과 달라진 부분이다. 평범한 인물이라는 필요성에서 가져온 직업처럼 보이기도 하고, 재난 액션물에서 필요한 선택이지 싶기도 하다. 정수의 차 안에는 구조에 필요한 각종 기기들이 구비되어 있다.
=자동차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이 현실성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자동차라는 특정 차의 딜러로 설정한 건, 뭔가 외제차 딜러라고 하면 우리 영화와 동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터널 안에서 그가 손전등, 손톱깎이 같은 것들을 사용하는데, 차 안에서 그런 것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 필요했다. 그런 직업이 뭐가 있을까 많이 스캐닝했다. 그렇게 찾다보니 형님이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데 트렁크에 증정용 회사 사은품이 항상 있더라. 그런 점에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되겠더라.
-최초 붕괴 이후 터널은 2차 붕괴 등의 영향으로 내부구조를 계속 바꾼다. 정수도 달라진 터널의 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처하게 되고, 그에 따라 취하는 액션도 바뀐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베리드>(2010) 같은 상황을 연상했는데, 관이라는 규격화된 공간에 갇힌 채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 영화와는 사뭇 다르더라.
=<베리드>의 경우 보는 사람까지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리지 않았을까. <터널>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설계를 했다. 이야기가 긴장, 유머 등으로 배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터널 내부도 조금씩 조금씩 확장시켜주었다. 정수는 붕괴 이후 차 안에서 행동을 하고, 환풍기를 보고, 또 앞차를 발견하고 공간을 이동해간다. 갑자기 무너진 공간으로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기도 한다. 원래 있었던 공간인데, 공포에 질린 정수가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공간을 알게 되고 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그렇게 차츰 정수가 움직일 공간을 확장하고 만들어 관객이 다음 상황을 기대하게 만들려고 했다.
-터널 내부는 모두 세트에서 작업했다. 배우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그만큼 큰 구성이었다.
=초반의 주유소 장면과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다 세트에서 찍었다. 일종의 1인극 같은 상황인데, 배우가 혼자 리액션 없이 연기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들고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배우에게 터널이라는 환경이 일종의 상대역이라는 느낌을 가지라고 연기를 유도했다. 나는 이런 표현을 썼는데, ‘옆에 있는 맹수 한 마리와 연기한다는 느낌으로 하라’고 했다. 붕괴된 터널이 일종의 맹수와 같은 거다. 초반에는 정수가 잔돌 하나만 굴러가도 맹수가 덮칠까 긴장을 하다가, 어느 순간 공간과 친숙해지면 외부 상황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같은 존재가 되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유기적인 호흡을 유지해나갔다. 정우씨 연기가 좋았던 게, 촬영현장에서 의도치 않은 소리가 날 때 그걸 놓치지 않고 반응해주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더 자연스럽고 생생한 느낌으로 나올 수 있었다. 촬영 때 고생도 상당했는데, 말 그대로 먼지와의 싸움이었다. 배우가 얼마나 괴로웠을까는 상상도 못한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먼지도 같이 움직여야 하고 그걸 포착해야 하니 CG로 하면 가짜 같아진다. 그래서 먼지가 약하면 계속 먼지를 더 만들었다. 스탭들은 마스크에 고글까지 쓰고 촬영했는데, 촬영 끝나면 배우고 스탭이고 온몸이 하얘져서 나왔다. 정말 어머어마한 먼지였다.
-터널 안과 밖에서 정수와 구조대원 대경이 소통하는 형식이 존 맥티어넌 감독 <다이하드>(1988)의 구성을 연상케 하더라. 건물 안에 갇힌 형사 존(브루스 윌리스)이 사투하는 가운데, 구조는 힘들어지고 유일하게 포웰 경사(레지날드 볼존슨)만 그의 상황에 귀기울여준다.
=<다이하드>! <다이하드>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해 장르를 벗어나 사회성을 담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그런 분위기를 많이 생각했다. 만약 두 캐릭터가 좀더 전화를 많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구도로 더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영화에서 그러면 119 구조대원이 철없이 통화만 한다고 거부반응이 생길 것 같더라. 그래서 통화는 최소화하면서 둘의 소통, 교감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하정우와 오달수 배우의 합이 좋았다.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암살>(2015)에서 이미 완성됐다고 본다. 정우씨를 먼저 캐스팅하고 대경 역을 나중에 캐스팅했는데, 구조대원을 사명감이나 정의로움만 가진 인물로 묘사하면 너무 전형적일 것 같더라. 다른 무언가 하나를 더 칠해줘야 관객이 호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뜨겁고 인간적인 모습을 갖되, 왠지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사람, 그리고 외형적으로는 정감 가는 이미지를 찾았다. 달수 선배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그런 면이 다분히 있다. 두 배우가 촬영 때는 거의 만나는 장면이 없는데, 정우씨가 세트장에 있으면, 달수 선배가 집에서 전화로 통화하는 장면을 다 받아주셨다.
-붕괴 상황에서의 생존율과 관련해 사실적인 지점에서 설득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휴대폰 배터리는 딜레마 중 하나였다. 충전기는 망가져 있고, 배터리가 78% 잔량이 된 상태다. 정수가 너무 통화를 많이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할 텐데, 휴대폰을 꺼둔 상태에서 며칠 간다는 것들을 조사했더니 영화 속 통화를 실제로 환산하면 그 정도는 가능하겠더라. 칠레 광부가 매몰되었던 사건이나 동남아 쓰나미, 미국 필라델피아 카타리나 수해, 한국의 삼풍백화점 사고 등에서 생존자들의 구조 시간도 검토했다. 물 공급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부분 17~18일 정도가 최장 생존 기록이었다. 그런 것들을 보다보니 역으로 다른 고민이 생기더라. 인간이 여기까지 사는 건가. 아니면 그 이후는 못 산다는 생각에 구조를 포기하는 건가. 결말 부분에서 그런 고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끝까지 간다>의 주인공 고건수(이선균)가 애초 비리를 일삼는 경찰이었고 그 비리를 덮기 위해 내달렸던 것과 달리 <터널>의 정수는 말 그대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주유소에서 잠깐의 지체 때문에 터널을 빠져나가지 못한 거였지, 정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붕괴된 터널에 갇힐 수 있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대결하는 <끝까지 간다>와 <터널>이 달라지는 지점이다.
=이 영화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좀 착하지 않나. <끝까지 간다>의 인물들과는 많이 다르다. 나 스스로 착한 사람을 보고 싶었다. 특별한 악인을 투입해서 반인륜적인 행동을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악이 있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시대의 공기와 지난한 상황들이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는 점을 그리고 싶었다. 이 영화에 단선적인, 일차원적인 악당은 그래서 없다. 오히려 이 영화의 악은 ‘절망’이라고 볼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비교하자면, 후반부의 톤이 상당히 달라져서 좀 이질적이다.
=<터널>은 생명에 관한 영화다. 생명이 승리하는 걸 보고 싶었다. 기적을 보고 싶었던 거다. 기적은 항상 내 주변에서 매일매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생명 자체가 희망이고 승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 영화의 유머러스한 부분들도 즐기고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관 밖에 나와서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차기작 계획은.
=<터널>을 보면 희망과 절망이 계속 교차한다. 물 때문에 갇혔지만 물 때문에 살고, 갑자기 나타난 강아지도 방해가 됐다 도움이 됐다 한다. 내일은 나가겠구나 하다가 절망하기도 하고, 절망하는 순간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첫 작품을 하고 오래 쉬면서 힘들었는데 <끝까지 간다>가 내게 선물이 되기도 했다. 그런 것 때문에 이 작품과 내가 비슷하다 싶다. 아직은 계획이 없는데, 일단 <터널>을 떠나보내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내가 재밌을 만한 작품을 또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