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미안해’라는 한마디 - 이성강 감독의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2016-08-15
글 : 나호원 (런던 통신원)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이하 <카이>)은 가족영화이자 이성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카이>를 설명하는 가장 분명한 코드를 꼽는다면 바로 이 두 가지 지점일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흥행 스코어가 작품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비평의 주된 독자는 가족영화의 관객과는 거리가 있다. 비록 비평의 독자가 부모/보호자로서 가족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기존의 영화적 심미안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서론이 구구절절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다룰 <카이>는 가족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건 한편으론 무의미하고 억지스러운 접근이다. 이성강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연상호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 작품에 과도한 기대와 높은 기준을 요구하기도 하고, 반대급부로 지나친 비판이 뒤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이>에 대한 감상만큼은 가족영화의 한축인 어린이 관객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여러 평가의 잣대에 파묻혀 객석에 앉지만, 그들은 작품 속에 뛰어들어 기꺼이 즐길 수 있는, 쾌락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눈의 여왕>과 동아시아 판타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은 꽤 매력적인 작품이다. 트롤이 장난삼아 만든 ‘세상을 흉하게 비추는 거울’에서 출발하여, 외로이 살면서 세상을 모두 얼려버리려는 ‘미모의’ 여왕이 등장하고, 그녀에게 잡혀간 친구 카이를 찾아 나선 ‘소녀’ 게르다의 모험담이 펼쳐지고, 마침내는 ‘어린이다움’을 유지하면서 어른이 되는 법을 깨달으며 이야기는 종결된다. 세상의 악과 추함, 아름다움의 유혹, 차가운 냉담과 뜨거운 열정, 고난과 성장, 사랑의 회복 등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애니메이션이 이를 놓칠 리 없다. 1957년에 만들어진 러시아 작품 <눈의 여왕>부터 디즈니의 <겨울왕국>, 그리고 또 다른 러시아 애니메이션(이번엔 3D) <눈의 여왕>(2012)까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품만 해도 제법 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작품은 안데르센의 원작을 고스란히 따르지는 않고, 저마다 원작이 지닌 매력을 선별하여 접근한다. ‘세상을 추하게 비추는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눈송이 속에 흩뿌려지다가 사람들의 눈과 심장에 박혀버린다는 설정은 세상에 대한 서늘한 풍자로서 매력을 자아낸다. 세상을 얼려버리는 눈의 여왕은 ‘차가운 아름다움’이라는 독특한 미를 설정한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두 요소는 원작의 텍스트 안에서 매끈하게 연결되지 않는 지점이다. 그래서 다양한 작품 해석은 원작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넣는 작업이기도 하다.

<카이>는 나름 성공적으로 이 두 지점을 연결한다. 눈사태 때 엄마에게 구조되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샤무이, 거울 조각은 그런 샤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힌다. 얼어버린 호수 밑으로 다가온 눈의 여왕 하탄은 얼음판 위에 서 있는 샤무이의 거울 이미지와도 같다. 엄마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한 샤무이를 통해 하탄의 처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카이가 샤무이를 구해내려는 이야기의 마지막 지점에서, 샤무이는 얼음 속에 갇힌다. 이제는 샤무이가 하탄의 거울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이 안데르센의 원작과 달리 남녀주인공의 역할을 바꾼 설정은 소녀 샤무이와 눈의 여왕 하탄의 관계를 한층 단단하게 연결시키려는 목적도 있다. 그래서 원작에서 모호하게 남겨졌던 ‘어째서 눈의 여왕은 소년을 죽이지 않고 그냥 얼음 왕궁에 방치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한다. 버림받은 자는 샤무이와 하탄이며, 이 둘은 거울-얼음 속에서 서로를 마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목에 ‘거울 호수’가 쓰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카이>가 소년, 소녀의 역할을 원작과 뒤바꿈으로써 소년의 모험 또한 강화된다. 3일이라는 시간 조건, 샤무이를 구출하고 하탄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미션. 이를 위해 새롭게 투입된 강의 정령이라는 신비한 수호신과 제제를 비롯한 조력자들. 장르로서의 퀘스트가 마련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르적 장치보다 더 부각되는 것은 바로 판타지 공간이다. 몽골이라는 동아시아적 풍경을 끌어들였다. 이성강 감독은 예전에 여행하면서 접한 몽골 평원의 광활한 풍광이 판타지에 적합하다고 밝힌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 북유럽에서부터 북극에 이르는 거대한 횡단 스케일을 담고 있고, 이를 차용한 이제까지의 애니메이션들이 여전히 원작의 지리적 풍경을 보여준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한 거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판타지 어드벤처 이야기 위에 동아시아적 스펙터클이라는 레이어를 얹은 셈이므로 풍경의 소스인 몽골의 이미지가 여행자였던 감독에게 그랬듯이 관객에게도 판타지적 설득력을 드러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묘한 이중적인 인상을 받는다. 한편으로 몽골의 풍경은 낯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낯이 익다. 여행자로서, 그리고 그 시선을 따르는 다큐멘터리 이미지로서의 몽골은 여전히 낯선 동아시아의 한 풍경이면서도, 판타지를 위해 끌어들인 몽골은 이미 익숙해 보이는 이미지(광활한 초원의 전형성)로 다가온다. 이는 판타지 스펙터클로 작동하는 데 실패했다는 선고가 아니라, 판타지가 이미지로 소비되는 이중적 속성을 갑작스레 우리에게 드러낸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판타지는 익숙함 속에서 낯섦으로 작동한다. 판타지로서의 풍경은 우리에게 또 다른 거울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성강 감독의 장편들이 종종 마주하게 되는 지브리 스타일이라고 해서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초기 TV시리즈부터 꾸준히 (아시아가 꿈꾸는) 유럽의 풍경은 차용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원시, 과거, 자연 그대로의 아시아가 인용되어왔다. 그렇게 축적되고 재생산된 이미지가 판타지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였고, 이 장르를 다루는 애니메이터들에게는 레퍼런스이자 변형을 위한 아카이브가 되었다(부언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초창기 시절, 1957년작 <눈의 여왕>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2007년부터 지브리가 이 작품의 일본 내 배급을 맡았다고 한다).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

감독 이성강의 서정과 감수성

<마리이야기>(2002) 이후 <천년여우 여우비>(2007)까지는 5년이 필요했고, <카이>는 9년이 더 걸렸다. 그사이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지형도 바뀌고, 관객의 세대도 바뀌었다. 이 작품이 전작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타깃 관객층의 연령대를 좀더 낮췄다는 것이다. <마리이야기>와 <천년여우 여우비>가 사춘기 문턱의 관객을 향한 반면, <카이>는 유치원을 막 벗어날 무렵의 어린이들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전작들이 일상에서 출발하여 환상으로 진입하면서, 그 또래가 겪는 정서와 갈등을 이야기하고자 한 반면,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판타지 안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마지막까지 유지된다. 일상 속 주인공 소년과 어느 정도 연결고리를 찾아볼 법한 ‘소년 이성강’은 더이상 작품 속에 없다. 이제는 ‘감독(이자 어른인) 이성강’만이 작품 밖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빠져나온 감독은 비로소 현실 세계의 ‘어른’이 해야 할 말을 카이의 목소리에 심어넣는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구해내지 못한 아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붙들지 못한 아이,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 때문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아이에게 건넨 말은 ‘미안해’였다. 카이가 엄마를 대신해서 ‘사랑’, ‘가족’을 얘기했지만, 결국 샤무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안해’였다. 샤무이가 듣고 싶어 했던 말, 그리고 어른으로서 감독이 꼭 해야 했던 말. 어쩌면 이는 가족영화 관객의 또 다른 축인 부모들이 유독 놓치지 않았을 말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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