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재앙의 예언자 / 기록자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2016-08-31
글 : 정지연 (영화평론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2005년, 한국을 방문해 존 포드 특별 강연을 했던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현재 당신이 가장 주목하는 일본 감독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라고 응답한 바 있다. 놀랍지 않은 답변이었다. 당시 그들은 일본의 젊은 작가주의의 한축이었고, 세계적인 시네아스트 반열에 오른 이름들이었다. 둘 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그 유명한 ‘영화표현론’ 수업을 통해 영화세계에 입문하였으며, 일본 ‘자주영화’의 장 안에서 이른바 ‘속도주자’라고 분류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필모그래피를 축적해가는 감독들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을 둘러싼 상황들은 달라지고 있었다. 1년에 무려 세편의 영화까지 연출했던 이들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더뎌졌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2008년에 연출한 <도쿄 소나타>는 칸국제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 극장용 영화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2013)을 선보이기까지 무려 5년이나 소요 됐다. 그사이 그는 5부작 TV시리즈 <속죄>(2012)를 연출했고, 곧이어 <세븐스 코드>(2103)도 발표했다. 그러나 긴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드디어 마주한 그의 작품들은 이상해 보였다. 과거 그의 영화를 가득 채웠던 웅장한 긴장감과 영화적 시선들은 조급증과 강박증 속에 오히려 무뎌지거나 과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귀환한 영화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해안가로의 여행>이었다. 그가 지속적으로 담아냈던 인간과 유령의 세계, 영화와 현실의 세계를 다시금 하나의 시선 속에서 포용하는 이 영화는 느리고 침착했지만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유령과 영화’의 존재론을 정리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올해, 그는 20년전 그의 최고작이었던 <큐어>(1997)를 상기시키는 영화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을 연출했다. 트라우마를 감추고 살아가는 형사와 그를 옥죄는 아내, 그리고 숙명의 서클처럼 반복되는 악의 대면.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 내면의 풍경을 서늘하게 묘사 하는 이 작품은 흡사 <큐어>와 닮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반복’의 세계를 재현하는 작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에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지금 또다시?”이다.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반복과 실패

<크리피>는 범죄심리학자이자 강력범죄 형사인 다카쿠라(니시지마 히데토시)가 한 사이코패스와의 대면에서 분석과 설득에 실패하고 상해를 입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1년 후. 경찰직을 그만둔 다카쿠라는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와는 이제 막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6년 전 미결로 남은 한 사건이 눈에 들어오고, 마침 경찰 후배로부터 그 사건을 함께 조사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더이상 경찰이 아님에도 스스로 ‘취미’라 주장하며, 6년 전에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일가족 실종 미스터리를 추적하던 중 그는 새로 이사 간 마을의 이웃집 남자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윽고 그 ‘직감’은 어쩌면 자기 이웃이 6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기민한 시선을 가진 관객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이 영화는 몇 개의 ‘반복’ 코드를 활용하는 작품이다. 가장 크게는 사건의 반복이다. 수사파일에 묻혀 있던 사건은 더이상 수사 권한이 없는 다카쿠라의 호기심에 포착되고, 거의 운명처럼 동시에 그와 아내가 6년 만에 재개된 같은 범죄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진짜 흥미로운 반복은 서사의 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몇몇 플롯과 구로사와 기요시적인 캐릭터의 반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햇빛이 비치지만 닫혀 있는 창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앞에 자신의 범죄를 진술하고 있는 사이코패스와 그런 그를 응시하는 주인공 다카쿠라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오프닝 취조실은 이후 입장이 전도된 다카쿠라가 취조를 받게 될 공간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용의자들이 도주하고 비워지는 공간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이 공간의 구조와 카메라 움직임이 1년 후 다카쿠라가 새로 이사 간 집을 스케치하는 장면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닫혀 있는 새집의 거실 창으로부터 시작되는 전경과 심지어 그 창 앞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는 다카쿠라의 행위까지 흡사하다. 경찰 취조실과 새로 터전을 잡고 살아갈 집을 동일하게 간주하는 감독의 의도는 흥미롭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가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집이 어떻게 가장 불온하고 위태로운 공간으로 전화해가는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반복은 다카쿠라의 실패에서도 반복된다. 첫 번째 실패는 첫 시퀀스에서 범인을 속단하고 무모하게 대응했던 행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속단은 영화의 후반부 이웃집 남자, 니시노(가가와 데루유키)와의 결정적 대면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이 영화 <크리피>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와 정반대의 영화이다.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핵심은 주인공이 어떻게 사건의 실마리를 포착하고 그로부터 악을 차단해가는지에 관한 해결의 영화이자 ‘정상성’을 복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영화이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운명의 서클처럼 반복되는 사건과 그것에 휘말린 주인공의 연이은 실패, 그리고 그를 무릎 꿇게 만드는 악이란 과연 어떻게 존재하고 작동하는지에 집중한다.

게다가 이 영화 속 주인공 다카쿠라는 1997년작 <큐어>의 형사 다카베(야쿠쇼 고지)와 닮아 있다. 그들은 모두 상처와 책무를 속박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다카베에게는 분열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있고, 그래서 그에게 집이란 안식의 공간이 아니라 미쳐버린 아내가 빈 세탁기를 돌리고 날고기를 밥상에 올리는 불안하고 음울한 공간이다. 다카쿠라는 얼핏 아내와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영화에서 이들은 서로의 감정을 속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다. 악은 이러한 균열을 파고든다.

<큐어>

폭력과 매혹

“파시즘이라는 것이 꼭 누가 미워서 폭력을 행하는 것처럼 감정적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자유를 지배하기 위한 기계적 장치로서의 폭력을 의미합니다.” _구로사와 기요시

예전 <로프트>(2005)로 한국을 찾았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그의 작품에서 읽히는 ‘파시즘적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전작인 <카리스마>(1999)에는 숲 전체를 파괴해가는 독을 뿜어내는 나무가 등장한다. 이상한 점은 그 숲의 파괴 과정이다. 주변 나무들이 홀리듯이 그 나무로 뿌리를 뻗쳐 고사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 <큐어>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 바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메스머리즘(최면학)에 몰두한 주인공 마미야는 어느 순간 최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드는 범죄자가 된다. 그에게 최면을 당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와 감정을 상실하고, 일상적인 행위의 하나인 양 주변인들을 살해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2003)에 대한 평문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있어서는 마치 기계적인 반복이 이 세계의 원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나가 문득 타인의 사고나 행동을 모방하고 그것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삼아버린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카리스마>나 <큐어>는 모두 그러한 기계적 폭력에 대한 수동적 동조와 확산을 직시하는 영화이다.

이번 영화 <크리피>에서 폭력은 개념적으로 <큐어>와 동일하다. 범인 니시노는 <큐어>의 마미야처럼 스스로 처형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대리할 수행자들을 만들어낸다. 전작이 ‘최면’이었다면 이번에는 ‘약물’과 ‘언어적 마력’ 그리고 ‘접촉’에 대한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니시노의 범죄 공간에서 감정을 빼앗긴 어린 소녀와 아내들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남편을 무심하게 살해하고 처리한다. 그것은 흡사 <큐어>에 등장했던 한 경찰이 백주에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후배 경찰을 쏴죽이고 평온하게 일상적 행위들을 지속해가던 몸서리치는 폭력의 일상성과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큐어>에서 악을 쫓던 경찰이 결국 그 스스로 자신이 쫓던 자의 형상을 취하는 거울 구조는 이 영화 <크리피>에서도 동일하다. 다카쿠라가 6년 전 실종사건에 집착하면서 그는 당시 살아남았던 소녀의 기억을 다소 위협적으로 이끌어낸다. 그러자 소녀는 “다카쿠라씨도 똑같군요. 사람 감정을 실험 재료 다루듯 하네요”라고 응수한다. 그것은 타인의 감정을 소거시킨 니시노와 닮아 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악이 특별한 악마적 개인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악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마비되고, 타인을 위해하거나 지배함으로써 권력을 보장하는 관념과 체제가 일상화될 때, 그 폭력적 체제와 가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순응할 때, 그때 악은 일상화되고 평범화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큐어>와 <카리스마> 그리고 <크리피>의 은유(최면, 약물)를 통해 이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공유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 왜 사람 들은 폭력에 이끌리는가? 파시즘의 또 다른 정의는 ‘매혹의 정치’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동조했다. 그리고 <크리피>에서 어쩌면 가장 이상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순간들은 왜 그들이 니시노에게 이끌리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서 문과 창은 사건을 추동하는 주요한 플롯 모티브로 사용되곤 한다. <크리피>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들이다. 첫 번째 시퀀스에서 취조를 마친 다카쿠라가 복도에서 후배와 대화할 때 취조실 문이 흡사 유령에 이끌리듯 서서히 열린다. 이 열림이 다카쿠라를 첫 번째 실패로 유인한다. 두 번째 문은 다카쿠라의 아내가 홀로 니시노의 집을 방문하던 순간에 열린다. 이사 선물을 가져간 그녀가 집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돌아서는 순간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이내 니시노가 등장한다. 세 번째 문은 다카쿠라가 홀리듯 방문한 6년 전 범죄 현장에서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그 문은 과거가 아닌 현재적 공간, 즉 이웃집 니시노의 집 문이 열리는 것으로 통하게 되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모든 자들이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열려진 문과 접촉

낯선 공간의 문이 열리고 들어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혹’과 ‘접촉’에 대한 욕망을 상기시킨다. 니시노가 다카쿠라의 아내를 유인하던 순간들 중 문득 그가 아내에게 다가와 “남편과 나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인가?”를 묻는다. 관객의 눈에 그 질문은 틀림없이 어이없지만 아내의 태도는 이후 달라진다. 그리고 중반 이후 마을 터널에서 아내와 마주친 니시노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움켜쥔다. 기이한 에로티시즘과 폭력적 지배를 암시하는 이 장면에서 니시노는 “우리 집에 꼭 오세요”라고 속삭인다. 그러한 접촉의 에로티시즘은 그녀와 남편 사이에서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서 모든 접촉은 다소 불온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밝은 미래>에서 해파리에 매혹된 청년이 그것을 만지려 하자 다른 청년이 ‘만지지 마’를 명령한다. <카리스마>에서도 기이한 나무에 다가갔던 주인공에게 환청처럼 ‘만지지 마’가 들려온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접촉의 금지, 그리고 떨어져 있을 것에 대한 요청, 그것은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야기를 시동케 하는 능동적 기호”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아내가 남편을 만지려 할 때 남편은 단호하게 그것이 금지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다 결국 동침이 이루어지고 이후 남편은 점점 사위어 죽은 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사랑으로서의 접촉이 아니라 불온하고 폭력적인 것에 대한 순응적 동조로서의 ‘접촉’을 묘사해온 감독이다. <크리피>에서 니시노가 시도하는 접촉들(아내와의 악수, 중학생 딸로 가장된 소녀와의 어깨동무 등)은 ‘감염’이나 ‘최면’에 가까운 개념이다. 니시노의 집 안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다가와 손을 잡는 순간은 흔한 영화의 가족 화해나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배신과 세뇌의 폭력적 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해안가로의 여행>

속죄의 시대의식

구로사와 기요시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말은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이었다. 지식인이자 예술가의 책무 같은 것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나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들은 TV시리즈를 연출했다. 아오야마 신지는 4부작 <속죄의 소나타>를 그리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5부작 <속죄>를 연출했다. 아오야마 신지의 드라마는 어려서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소년이 중년의 어른(변호사)이 되어 ‘속죄’가 가능한지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 시리즈는 더 참담하다. 이 작품은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 다섯명 중 한명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고 그 범인과 범죄 현장을 목격한 네명의 살아남은 소녀들이 지닌 트라우마와 속죄의식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속죄의 주체에 대한 질문이다. 죽은 아이의 엄마는 살아남은 아이들이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자, “살아가는 내내 속죄하라”고 강요한다. 이 드라마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부채의식’은 공동체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으로 형상화된다. 왜 살아남은 자, 즉 다른 희생자들(네명의 소녀들)이 평생 가해의식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희생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공동체의 안녕에 균열을 내는 존재들로 간주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전도된 가해의식과 속죄는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금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반복의 작가라면, 범상치 않은 걸작 <큐어>의 질문이 왜 20년이 지난 지금 <크리피>에서 반복되는가 하는 점이다. <큐어>를 본 관객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대사, 반복되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극중 캐릭터들은 자신의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이내 그 대답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막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크리피>에서 이름은 여전히 텅 빈 것으로 간주된다. 니시노라 불리는 범인의 진짜 이름은 영화에서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그 이름을 도용했을 때, 친근한 이웃으로 가장했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떻게 쉽게 상처입고 파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스스로 ‘부채의식’이라고 말했던 시대적인 시선은 동시대 일본의 다른 감독들의 작품 속에서도 절망적인 어떤 것으로 이미 표명된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가 오랜만에 연출한 <도모구이>(2013)에서 그는 나쁜 피를 물려주는 일본의 기성세대와 가족 관계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소노 시온은 <두더지>(2011)에서 자식 세대에 해악을 미치는 아버지를 죽이고 가족 개념을 해체한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비판하는 <희망의 나라>(2012)에서는 정부나 국가가 얼마나 위악적인가를 거침없이 묘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실패한 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소소한 슬픔을 묘사한다. 한국주류영화의 중심축이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외면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일본의 작가주의 감독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지 여전히 칼날 같은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크리피>는 일본 사회를 인식했던 감독의 시선이 20여년 전보다 더욱 처참해졌음을 보여준다. <큐어>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결국 악의 숙주가 되었을지언정 절망과 책무로부터 벗어난 남자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엔딩으로 담아냈다. 그러나 <크리피>에서 살아남은 자들, 기억과 감각을 되찾은 자들은 거칠게 내지르는 절규처럼 차마 살아갈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로서 살아남은 자들이 과연 서로 보듬고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공동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 영화는 그 질문과 비명 속에서, 그리고 한때 절대악처럼 강력했던 자가 주검으로 쓰러진 모습을 관객에게 응시하길 종용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역설적 제목이었던 ‘밝은 미래’의 암울함이 재앙처럼 현실에 당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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